“요즘 골프 때문에 기분이 별로야. 스트레스로 잠도 설쳐. 여러 달 그렇게 잘 맞던 골프가 또 왜 이러는지 몰라.”
남해안으로 며칠간 골프투어를 다녀온 친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퇴직하고 여유롭게 생활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자 그에게서 돌아온 답변이었다. 그를 고민에 빠뜨린 건 다름 아닌 골프다. 1980대 초중반을 오가던 전성기 골프 실력을 되찾아 좋은 성적을 내다가 최근 연속 세 번 90대에 머물렀다. 지방 골프투어를 하면서 낮에 워낙 헤매 동료들이 잠든 달밤에 혼자 원인을 알려고 몸부림쳤다.
“망가진 이유도 모르겠고 환갑 넘긴 나이에 레슨을 받자니 엄두가 안 나고 이번에 골프를 끊어버릴까.” 급기야 심한 스트레스에 골프를 중단하고 싶다는 자폭 발언마저 내뱉었다.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재미나야 할 골프가 왜 이토록 그를 괴롭힐까.
골프는 감정 무덤이다. 골프 심리를 담은 숱한 명언과 유머가 이를 말해준다. 골퍼들이 필드에서 겪는 심리를 담은 유머 있는 글(<나쁜 골프>)이 있어 스토리를 입혀보았다.
“오늘은 잘 되겠지”라는 설렘과 걱정을 안고 필드에 나서지만 결국 “오늘은 오늘도”로 바뀐다. 제대로 폭망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일주일 뒤 나간 골프장에선 희한하게 예전 스코어가 돌아온다. 불가사의다.골프장에선 빈말이 난무한다. “빈 스윙은 프로야”라는 말을 나도 수없이 들었다. 나 역시 동반자에게 던졌다. 한 마디로 빈말이다. 연습을 안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지 연습을 안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상대 방심을 유도하는 전략이자 자신의 스코어가 좋지 않더라도 미리 변명거리를 깔아놓는 심리다. 초보 때 빈말을 참 많이 들었다. “골프 영재 납셨다”라는 말이다. 선배가 나보다 뒤에 입문한 후배에게 똑같이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들을 때까지 내가 진짜 골프 천재인줄 알았다.
대학 입학시험 합격 못지않게 뿌듯할 때가 있다. 어프로치샷으로 공을 핀에 붙여 컨시드 받아 놓고 동반자들 퍼팅을 구경할 때다. 동반자 모두 공을 물이나 숲에 날려 보냈는데 홀로 페어웨이 한가운데에 안착시켜 양탄자 같은 잔디를 밟고 가는 기분을 아는가. 웨지를 한 손에 든 그 보무 당당함과 뿌듯함이 골프에 미치게 만든다. 쳐야 할 곳(공)보다 가야 할 곳을 항상 먼저 본다. 이 때문에 구력 20년 골퍼인 나도 헤맨다. 골프의 영원한 숙제 헤드 업(head up)이다.
“골프는 기술이 아니라 머리에 좌우된다”는 유머가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이 골프도 잘한다는 말로 알았다. 헤드 업을 하지 말란 얘기다.
살면서 골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어쩌다 든다. 동창 모임에서 골프 이야기가 나왔을 때다. 골프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그때랑 똑같네. 그때도 운동을 못하더니”란 말을 들을 뻔했다. 골프를 하지 않는 사람에겐 주야장천 골프 얘기가 정말 지겹다.
간혹 골프장에서 화사한 꽃과 아름다운 단풍, 창공의 양털 구름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잘 칠 때다. 남의 샷도 그제서야 보인다. 골프를 끝내고 한 동반자가 식비를 지불한다. 기분이 좋다. 내가 식비를 내면 더 기쁘다. 단 그날 딴 돈으로 계산한다.
‘잘됐다 → 안됐다 → 잘됐다 → 안됐다’ 하다가 결국 ‘안된다, 안된다’로 끝나는 게 골프다. 세월에 장사 없다. 잠을 설치면서까지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너무 괴로워해도 오만이다.
빈정 상하지만 말을 못 한다. 멀리건 2개나 쓴 녀석이 나보다 한 타 이겼다고 좋아하면서 자랑할 때다. 며칠 지나 다른 동창을 통해서도 이 소식이 날아들어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것이다.
동반자들 일파만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첫 홀과 마지막 홀 모두 제대로 적은 나는 유구무언이다. 상대가 직장 상사라면 더욱 말을 못 한다. 캐디가 무시해도 빈정 상한다. “클럽 보고 프로선수인 줄 알았어요.” 동반자가 한술 더 뜬다. “복장은 아예 PGA급이야.”
그린 주변에서 어프로치샷을 하면서 세상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실감한다. “굴릴까, 세울까, 띄울까.” 공을 핀에 붙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방법도 이런가.
스코어는 같아도 같지가 않다. 아쉬운 보기가 있고 나이스 보기가 있다. 스코어는 같지만 스토리가 다르다. 파보다 훌륭한 보기도 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샷을 하기 가장 좋은 곳에 공이 놓였을 때란 유명한 골프 격언이 있다. 롱 홀에서 핀까지 80m를 남기고 세 번째 샷을 하다 뒤땅을 하고 만다. 인생도 좋은 라이에 놓였을 때 조심하라는 건가.
골프장 전반 홀과 후반 홀 사이 그늘집이 있다. 그늘집에서 앉은 네 명 가운데 얼굴에 그늘진 사람이 반드시 한 명은 있다. 전반을 망친 사람이다.
첫 홀과 마지막 홀은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등대다. 첫 홀을 잘 치면 그날 라운드를 기대하게 되고 마지막 홀을 잘치면 다음 라운드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린에 올라가는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 버디를 잡는다는 설렘을 안고 가는 사람과 잘해야 더블 보기를 걱정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다르다.
실수를 범하면 공통적인 반응이 나온다. 드라이버로 OB를 내고는 “이상하다”라고 말한다. 이어 아이언으로 뒤땅을 하면 “오늘 왜 이러지?”라며 한숨을 쉰다. 마지막으로 스리 퍼팅을 범하고는 “어!” 하고 말문을 닫는다. 어제도 그제도 아니고 과연 오늘만 그런지 묻고 싶다.
직각 벙커에 공이 빠지면 공포와 긴장이 몰려온다. 벙커 높이는 걱정의 깊이다. 수차례 시도에도 탈출하지 못하고 철퍼덕거리면 핸드 웨지(손)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간혹 나를 돌아본다. 하루 전날 지인이 전화로 골프가 가능한지 물어왔을 때다. 땜빵인 줄은 알겠는데 나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을까, 나는 몇 번째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린피 무료 초청골프라면 과연 나는 그에게 몇 번째 순위일까.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 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