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 탕’ 날아가는 비둘기를 향해 방아쇠가 당겨지고, 총에 맞은 비둘기들의 사체가 관중석으로 떨어지며 난리가 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시합에서는 인명사고가 발생해 시합이 중단되고, 가건물에 불을 붙여 경쟁적으로 끄는 시합도 정식 종목이었다. 두 나라만 참가한 줄다리기 시합이 있었는가 하면, 6개국 500여 명 어부들이 낚시 경쟁을 펼치지만 어떤 기준으로 순위를 매길지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다. 이 황당한 이야기들은 1900년 제2회 파리올림픽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박람회(당시 우리는 만국박람회로, 영어는 World Expo, 불어로는 L‘Exposition universelle)에 대한 프랑스의 집착과 열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1851년 런던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린 최초의 세계 박람회에 참석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박람회의 산업적 측면뿐만 아니라, 국제교역, 예술적 측면에서의 국제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특히,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을 한자리에 집약해 놓은 것을 보며, 프랑스인으로서 느낀 질투와 함께, 영국을 따라잡기 위한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프랑스는 사실 1789년부터 자국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박람회(Exposition des produits de l‘industrie francaise)를 개최해 오고 있었다. 생산자가 아닌 유통 기업이나 모조품 생산기업의 참가를 제한하는 등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운영되었으며, 1844년 제10회 박람회에서는 우수 참가기업 31곳을 선발해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 행사가 1885년부터 국제행사로 격상되면서 파리에는 큰 변화가 발생한다.
1855년 영국의 수정궁을 모방한 산업궁전(Palais de l‘Industrie)이 들어선다. 1878년에는 당시 단일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실내 공간을 가진 기계박물관(Gallery of Machines)이 샹 드 마스(Champs de Mars)에 들어서고, 트로카데로 언덕에 트로카데로궁이 세워진다.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국가와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국가의 전시관을 세우기 위해 앵발리드 광장(Esplanade des Invalides)과 센강 우안이 새롭게 정비 되었으며, 1889년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당시 세계 최고 높이인 300m 건축물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는 네 번의 세계박람회 성공 노하우를 결집해 1900년 세계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파리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킨다.
영국을 모방해 지은 산업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금의 그랑팔레를 세운다. 정식 명칭이 순수예술 대궁전으로 번역되는 Le Grand Palais des Beaux-Arts가 상징하듯, 영국이 내세운 산업적 세계화를 넘어서 프랑스식 예술의 세계화에 보다 무게 중심을 둔 것이다. 그랑팔레 맞은편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 건축물 작은 궁전 프티팔레(Petite Palais)가 들어서고,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산더 3세 다리의 황금빛 페가수스 동상도 그해 박람회를 맞아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엑스포를 보러 오는 관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오를레앙과 파리를 연결하는 철로의 종착역으로 세워진 오르세역(Gare d‘Orsay)은 지금 마네, 모네, 고흐의 인상파 명작들이 전시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의 전신이다. 세계에서 7번째로 지하철이 개통된 도시 파리가 1900년 지하철을 개통하면서 새롭게 내건 가치 또한 예술이었다. 프랑스 건축가 엑토 귀마(Hector Guimard)가 설계한 독특한 철제 구조물 입구에서는 일반 대중의 일상적인 삶 속에도 예술의 혼을 불어넣고 싶어 했던 당시 파리지앵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1900년 세계박람회를 통해 파리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던 박람회 조직위원장 알프레드 피카(Alfred Picard)에게 쿠베르탱이 가져온 올림픽 아이디어는 어쩌면 박람회의 흥행을 위한 작은 부대행사 정도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1900년 파리올림픽의 정식 명칭은 올림픽이 아니었다. 국제 운동 및 스포츠 시합(Concours internationaux d’exercices physiques et de sports)으로 불린 대회는 박람회 기간에 맞춰 그해 5월 14일부터 10월 28일까지 열린다. 크게 좌절한 쿠베르탱은 제3회 미국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파리에서의 교훈을 활용, 올림픽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도 세계박람회와 함께 개최되는데 이는 박람회에 대한 관심을 이용해 올림픽을 세계적인 행사로 성장시키기 위해 파리에서의 실패 교훈을 활용코자 했던 쿠베르탱의 남다른 사업가적 기질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올림픽위원회는 은퇴하는 쿠베르탱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1924년 올림픽을 파리에서 개최키로 결정한다. 하지만 1924년 파리 올림픽이 1900년 올림픽의 상처를 충분히 해소해준 건 아니라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그리고 백 년이 흐르고 1900년 만들어진 건축물들로 세계 최고의 관광도시의 입지를 다진 파리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린다. 파리지앵들은 이번에도 정말 뜻밖의 결정을 내린다. 누구나 강둑에 나와 올림픽 개막식을 볼 수 있게 센강을 개막식 행사장으로 선정한 것이다. 개최 장소의 95%를 기존에 존재하거나 일시적인 경기장을 사용해 올림픽 개최로 인한 대규모 탄소 발생 건설을 피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올림픽을 즐기는 ‘과감하게 개방된 올림픽(Games Wide Open)’을 기치로 내건 목적의 일환이다.
2024년 7월 26일 저녁, 올림픽에 참가한 각국의 선수단은 화려하게 장식된 162개의 선박을 타고, 오스테를리츠 다리(Pont d’Austerlitz)에서 서쪽으로 6㎞를 행진하게 된다.
아름다운 파리의 다리와 명소를 지날 때마다 각종 공연과 쇼가 선수단을 맞이하고, 그 행진은 개막식 주 공연 장소인트로카데로 광장까지 이어지게 된다. 파리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타봤을 유람선 바토 무슈(BATEAUX MOUCHES)의 동선을 닮은 이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1900년 파리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명소들이다. 오르세 미술관, 그랑팔레, 프티팔레, 알렉산더 3세 다리, 앵발리드 광장, 센강 좌안과 우안의 국가별 전시관이 들어섰던 강변까지, 마치 도열한 의장대처럼 올림픽에 대한 경의를 124년 만에 반성과 함께 헌정하는 모습이다.
1900년 산업과 예술을 아우르는 세계화를 추구했던 파리가 당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참여(participation)라는 가치의 세계화까지 함께 녹여냄으로써 2024년 이후의 파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아울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역사를 잊지 않고 새롭게 가치를 발견하는 프랑스인들의 철학에도 고개를 숙이게 된다.
조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