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을 끝으로 50대 후반에 직장생활을 마친 A씨는 은퇴 후 강원도에서 통나무집 펜션을 운영 중이다. 산속 비포장도로를 이용해 화목난로용 목재·장비 등을 자주 운반해야 했던 본인의 두 번째 차로 픽업트럭인 포드의 ‘레인저’를 구매했다. 평일에 회사·집·육아만 반복하는 ‘워킹맘’ B씨는 주말마다 가족과 캠핑을 간다. 코로나19 이후 생긴 취미다. 그는 캠핑용 차량으로 쌍용차가 만든 픽업트럭인 ‘뉴 렉스턴 스포츠&칸’을 선택했다. B씨는 “아이를 태우고도 안전하게 오프로드는 물론, 오르막길과 미끄러운 길을 다닐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주중에서 사업가로 바쁜 일상을 보내지만 주말에는 프리다이빙을 즐기는 C씨는 각종 장비들을 여유롭게 적재할 수 있고, 무엇보다 다이빙 장비를 말리기도 편하다는 이유로 준대형 픽업트럭인 제너럴모터스(GM) 쉐보레의 ‘콜로라도’를 구입해서 타고 있다. 그는 “프리다이빙 장소를 찾기 위해서는 전국 곳곳을 다녀야 하는데, 눈길이나 비포장도로를 달리기엔 픽업트럭이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화물차 용도를 넘어 캠핑·낚시 등 외부 활동과 패러글라이딩·프리다이빙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용 ‘세컨드 카’로 픽업트럭을 주목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국내 캠핑 인구는 지난 10여 년간 11배나 성장해 7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캠핑 트레일러 등록 대수 역시 매년 높은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국내에 등록된 캠핑 트레일러는 2020년 기준 1만7979대로 2015년 4692대 대비 4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사로잡기 위해 픽업트럭을 만드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한국 시장 공략도 본격화하고 있다. 픽업트럭이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화물차 기능을 접목한 차종이다. 픽업트럭은 승용차·SUV가 아닌 화물차로 분류된다.
사실 오늘날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차종인 SUV는 픽업트럭에서 파생됐다. SUV는 상업·농업 용도로 사용됐던 트럭을 의미하는 유틸리티 차랑에 야외 레저 활동을 의미하는 ‘스포츠’가 붙은 이름이다. 다목적 상업 용도와 승용 목적이 결합되어 탄생한 픽업트럭이 오늘날 SUV의 원조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 첫 포문을 연 건 GM이다. GM은 최근 프리미엄 픽업·SUV 브랜드인 ‘GMC’의 한국 출범과 함께 첫 번째 모델인 초대형 픽업트럭 ‘시에라(Sierra)’를 출시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한국에도 풀사이즈 픽업트럭 시대가 열린 것으로 평가한다.
정정윤 GM 한국사업장 최고마케팅책임자는 “GMC 시에라는 다른 표준형 픽업트럭과 확연하게 차별화된 과감한 디자인과 웅장한 규모의 사이즈, 최첨단 사양의 기능을 지녀 트렌디하고 다양한 프리미엄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시에라의 핵심 타깃 고객층의 페르소나에 완벽하게 적중하는 차량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핵심 타깃층이 40~50대 성공한 전문가·사업가 남성들이라 덧붙였다.
시에라는 아발론 화이트 펄, 턱시도 블랙, 퍼시픽 블루, 볼케이노 레드, 러시 그레이 등 총 다섯 가지 외장 컬러로 출시된다. 인테리어 컬러는 제트 블랙과 브라운 스톤 두 가지가 준비돼있다. 적재함의 경우 세계 최초로 GM이 독점 제공하는 기술인 ‘6펑션 멀티프로 테일게이트’를 적용, 사용자 목적에 따라 6가지 형태로 변형되는 테일게이트를 통해 높은 공간 활용성과 편리한 접근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가격은 드날리 트림이 9330만원, 드날리-X 스페셜 에디션이 9500만원이다.
GM이 그동안 픽업트럭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 초대형 픽업트럭인 시에라 드날리를 과감히 내놓은 데는 준대형 픽업트럭인 ‘쉐보레 콜로라도’의 앞선 성공이 있었다. 지난해 콜로라도는 3000대 가까이 판매되며 수입 픽업트럭 점유율이 70%에 달했다. 한국지엠은 특히 콜로라도를 구입한 고객 중 자영업자 비중이 60%가 넘는 데 주목했다. 한국지엠 관계자는 “콜로라도를 모는 자영업자 중 보유 차량이 2대 이상인 경우가 90%가 넘었다”며 “과거 자영업자들은 업무용으로 포터·봉고 등을 찾았다면, 최근에는 업무 외적으로도 활용하기 위해 디자인 등을 따지는 고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GMC 시에라는 성공적인 첫 출발을 알렸다. 2월 7일부터 온라인 계약을 실시한 지 단 이틀 만에 첫 선적 물량 완판을 달성한 것이다. GM 한국사업장 영업·서비스 부문 카를로스 미네르트 부사장은 “GMC 시에라가 출시와 동시에 고객들의 높은 호응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니치마켓을 타깃으로 한 프리미엄 전략이 적중한 결과”라며 “현재 추가적인 선적이 진행 중인 만큼, 신속한 차량 인도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21년 4월 레인저를 출시했으나 크게 재미를 보진 못했던 ‘픽업트럭 명가’인 미국의 포드는 2년 만에 완전변경 모델인 ‘넥스트 제너레이션 레인저’ 출시를 통해 명예 회복을 벼른다. 넥스트 제너레이션 레인저는 포드의 글로벌 트럭 디자인 DNA에 기반한 강인하면서도 다양한 사용목적에 부합하는 실용적인 내외부 디자인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와일드트랙과 랩터 두 가지 트림으로 출시된다. 두 트림 모두 2.0ℓ 바이터보 디젤 엔진과 10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했다.
넥스트 제너레이션 레인저는 픽업트럭 본고장인 미국을 비롯해 오프로드가 많은 동남아시아·호주·유럽 등 글로벌 시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신뢰할 수 있는 픽업트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전 세계 130개국·5개 대륙의 다양한 환경과 거친 기후·지형에서 극강의 주행 테스트를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운전자 필요에 따라 다재다능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전 세계 5000여 명 이상의 소비자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거쳐 얻어진 다양한 정보들을 반영해, 세세한 부분까지 사용자 중심적으로 설계된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넥스트 제너레이션 레인저 와일드트랙은 올해 3월, 랩터는 2분기 중 인도될 예정이다. 가격은 부가세 포함 와일드트랙이 6350만원, 랩터는 7990만원이다.
포드가 픽업트럭 최강자로 불리는 이유는 ‘F 시리즈’ 모델이 작년까지 미국서 무려 46년 연속 판매 1위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약 65만 대 팔렸다. 또 일본 상용차 브랜드인 이스즈도 연내 픽업트럭 모델인 ‘디맥스’를 출시할 계획이다. 디맥스는 전 세계 약 100개국에 수출되는 픽업트럭이다. 디젤 엔진을 탑재해 파워풀한 주행과 3.5t의 압도적인 견인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브랜드 특유의 콤팩트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도심 출퇴근과 주말 레저 등 다목적으로 활용 가능하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그 밖에 지프는 올해 다양한 색상의 ‘글래디에이터’를 선보일 계획이다. 지프는 지난 2020년 랭글러를 기반으로 제작된 올 뉴 지프 글래디에이터를 국내에 선보였다.
그동안 우리나라 픽업트럭 시장은 쌍용차가 사실상 독식해왔다. 2018년까진 4만 대 넘게 팔린 픽업트럭이 모두 ‘렉스턴 스포츠’이거나 ‘코란도 스포츠’였다. 해외 브랜드 3곳이 픽업트럭 시장에 참전했으나, 여전히 작년에 팔린 약 3만 대 중 2만5000대가 쌍용차 브랜드다. 쌍용차 관계자는 “작년 하반기 ‘뉴 렉스턴 스포츠&칸’ 판매실적을 보면 여성 비중이 21%에 달할 정도로 고객층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쌍용차는 지난해 ‘뉴 렉스턴 스포츠&칸’을 선보였다. 이 영향으로 작년 렉스턴 스포츠의 신차 등록 대수는 전년보다 2.5% 늘어난 2만5388대를 기록했다. 전체 국산 승용차 신차 등록 순위로 보면 21위로 높지 않아 보일 수 있다. 1위를 차지한 기아 쏘렌토의 경우 6만8220대가 팔렸다.
하지만 픽업트럭 시장 규모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동차 통계 플랫폼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픽업트럭 신규 등록 대수는 2만9685대다. 연간 3만 대 규모 시장의 대부분을 쌍용차가 가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뉴 렉스턴 스포츠&칸은 국내 픽업 모델 최초로 첨단 커넥티드카 서비스 적용은 물론, 최첨단 주행안전 보조시스템(ADAS)을 장착했다.
스포츠&칸의 또 다른 강점은 경쟁 모델과 달리 이용자가 용도·필요에 따라 데크 스펙을 모델별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칸의 데크는 스포츠(1011ℓ, VDA 기준)보다 24.8% 큰 용량(1262ℓ, VDA 기준)과 75% 증대된 중량으로 최대 700㎏(파워 리프 서스펜션)까지 적재 가능하다. 다이내믹 5링크 서스펜션 모델은 500㎏까지 가능하다(스포츠 400㎏).
여기에 현대차그룹도 국내 픽업트럭 시장에 뛰어든다. 기아는 내년 12월부터 기아 최초의 픽업트럭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또 디젤이 아닌 전동화 모델인 전용·전략형 전기 픽업트럭도 2027년 전에 선보일 계획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기아가 준대형 SUV인 모하비에 기반한 픽업트럭을 출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의 픽업트럭 주 공략 대상은 미국 소비자였다. 현대차는 2021년 SUV와 픽업트럭의 장점을 결합한 신개념 ‘스포츠 어드벤처 차량’인 싼타크루즈를 미국에 출시한 바 있다. 생산은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이뤄지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국내 픽업트럭 수요 증가세에 따라 현대차가 싼타크루즈를 국내에 출시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픽업트럭은 화물차로 분류되기 때문에 연간 자동차세가 2만8500원에 불과하다. 개인 사업자는 부가세 환급(차량 가격의 10%)도 된다. 그러다보니 개인 사업자 구매 비중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다만 화물차이기 때문에 고속도로 1차선에서 주행할 수 없다.
이유섭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