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대대적인 비상 경영에 돌입한 것은 실적부진 공포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곳곳의 불확실성 리스크가 커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3분기 국내를 대표하는 주요 산업 부문에서 특히 실적부진이 눈에 띄게 늘어난 데다 이런 상황이 4분기까지 이어지는 것이 기정 사실화되고 있다. 또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대미 수출 불확실성이 증폭되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다보니 기업별로 임원 승진 최소화와 임금 반납, 조직 슬림화, 경비 절감, 희망퇴직이 줄지어 확산되고 있다. 내년 경기 전망도 어둡다. 내년에 편성할 일반 예산까지 올해보다 대폭 삭감하는 분위기다. 국내 시가총액 1위 기업 삼성전자에 대한 위기 우려는 이런 분위기의 시발점이 됐다. 지난 10월 31일 3분기 실적을 발표한 삼성전자는 매출 79조1000억원, 영업이익 9조180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분기 기준 역대 최고치를 찍었지만 시장의 분위기는 차갑다. 영업이익이 10조원이 넘을 것이란 시장 전망과 달리 영업이익이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어닝쇼크가 발생한 탓이다.
한때 10만전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상승했던 주가 역시 1주당 5만원 벽이 결국 무너졌다. 특히 삼성전자 사업의 핵심축인 반도체 부문의 실적 부진이 아쉽다는 평가다. 반도체 부문은 3분기 3조86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는데 이 역시 시장 기대치에 크게 못미친 수치다. 문제는 현재 인공지능(AI)의 부각으로 주목받고 있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 삼성전자의 경쟁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AI반도체칩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 신규 AI 칩셋에 삼성전자의 HBM 메모리가 쓰인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면서 삼성전자의 위기설은 증폭되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삼성전자는 조기 사장단 인사를 비롯한 각종 쇄신을 단행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말 사장단 인사를 한 데 이어 올해 역시 조기 인사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변화의 마중물을 인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인식이 큰 만큼 조직개편 및 인물 교체 승부수로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올해 연중 교체를 통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끌고 있는 전영현 삼성전자 DS(디바이스 설루션) 부문장(부회장) 역시 부문별 임원들을 소집해 조직문화 개선과 쇄신을 위한 담금질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부터 삼성SDI, 삼성디스플레이 등 계열사 임원들이 주말 출근을 시작하며 주 6일 근무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임원 출장 시 비즈니스석 대신 이코노미석을 타도록 하는 등 각종 비용절감을 위한 방안 마련에 몰두하고있다.
LG그룹 역시 이러한 비용 절감이 화두다. 출장 예산과 접대비, 회의비 등 주요 비용을 전년 대비 20%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내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가전박람회 ‘CES 2025’ 출장 인원을 예년보다 20~30% 줄이기로 했다. LG전자는 올해 초 시작한 XR(확장현실)사업도 잠정 보류하는 식으로 사업재편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LG전자는 전사적인 비상경영 기조를 내년까지 이어갈 분위기다.
석유화학 계열사인 LG화학은 도레이와 설립한 헝가리 분리막 합작법인(JV) 지분 20% 추가 취득 시점을 오는 12월에서 내년 6월로 미뤘다. 투자 역시 축소하고 있다. 올해 설비투자(CAPEX) 예정 금액은 연초 약 4조원에서 최근 2조원 중반으로 줄였다. 올해 3분기까지 설비투자는 1조3950억원 규모다. 나프타분해시설(NCC) 매각 검토를 비롯해 사업가치 제고를 위한 다양한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LG화학은 수익성이 담보되는 사업을 중심으로 자본을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LG화학은 또한 올해 임원 연봉을 동결했는데, 4월엔 근속 5년 이상 첨단소재사업본부 생산기술직 직원 대상 희망 퇴직 신청을 받았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7일부터 사무직 희망퇴직에 돌입했다. 앞서 6월엔 생산직 대상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전기차 배터리 및 2차전지 제조계열사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주에 짓고 있는 에너지저장장치(ESS) 공장 신설 속도를 조절한다. 기존 배터리 생산라인에서 만들어야 할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을 줄이는 대신 이 곳에서 ESS용 배터리 생산을 늘리는 것. 이처럼 생산 효율화를 통해 신규 투자를 최소화하며 비용 절감의 묘수를 찾아나선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단순히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한 1차원적인 전략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생산 효율성을 높일 다양한 방안들이 재계 전반적으로 검토되고 있다”며 “결국 현재 커지는 우려를 줄이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자 숙제다”라고 밝혔다.
연초부터 강도 높은 리밸런싱(구조조정)을 진행 중인 SK 그룹은 전방위적 인수·합병 및 사업부 매각 승부수를 일찌감치 던졌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1월 1일 SK E&S와 합병을 완료했고, SK이노베이션 자회사 SK온은 이날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을 흡수합병하며 사업 구조를 재편했다. 무엇보다 SK그룹은 실적이 악화된 SK이노베이션과 SK에코플랜트를 중심으로 한 조직 슬림화 작업을 진행중이다. 임원 20~30%가량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팀장급 인력 또한 대규모 축소하는 방향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비용 절감을 위한 희망퇴직도 연쇄적으로 진행 중이다. SK텔레콤과 SK온은 희망퇴직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각 계열사별로 비주력 사업 매각과 운영효율화 방안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SK는 지난해 말 219개였던 계열사를 연말까지 10% 이상 줄이며, 각사별 임원 규모도 20% 이상 감축한다는 방침이다.
재계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은 E&S합병과 자회사 CEO 교체에 따른 조직개편, 임원 인사 등 현안이 많다”며 “여기에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경영진들의 고심이 깊다”고 밝혔다.
좋은 실적으로 상대적으로 선방한 현대차그룹 역시 강도 높은 쇄신을 진행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트랜시스·현대건설에 이어 현대케피코 대표이사도 교체한다. 내부 혁신 기조에 맞춰 계열사 경영진의 교체폭을 넓혀 쇄신에 나서는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차그룹은 주요 경영진들을 교체하며 쇄신 폭을 넓히고 있다. 최근 현대차그룹은 여수동 현대트랜시스 사장을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현대트랜시스 노조의 장기 파업 사태를 적시에 관리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후임에는 백철승 현대트랜시스 사업추진담당 부사장이 이름을 올렸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변동성이 커지고 있는 외부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내부 쇄신에 나서고 있다고 보고 있다. 보편관세와 전기차 보조금 폐지 등을 공약한 트럼프 행정부가 내년 2기에 들어서는 만큼 내실을 다지겠다는 목표다.
현대제철은 실적 악화로 인해 밸류업 정책 시행까지 연기했다. 대신에 수익성 확보를 통한 내실 다지기에 집중할 방침이다. 예를 들어 전방산업인 건설업계 부진으로 어려워진 봉형강 사업은 저가 제품 판매 축소, 수익성 위주 최적 생산 체제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감산 정책을 이어나가고 있다. 현대제철은 내년 상반기까진 이와 같은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기조는 내년 예산을 최대한 긴축해 유동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라며 “각 사업부별로 긴축경영 방안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7월 비상경영에 돌입한 롯데케미칼 임원들은 11월부터 급여 10∼30%를 자진 반납할 예정이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3분기 연결기준 413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롯데지주도 11월부터 급여 20∼30%를 반납한다. 롯데온과 롯데면세점 등은 희망퇴직을 실시 중이다.
이동통신사 KT는 지난 8일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대상은 퇴직 신청자 2800여 명이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은 “트럼프 당선으로 기업들의 경영 불확실성이 지금보다 더 확대될 우려가 크며, 기업들의 ‘비상경영’ 움직임도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구조조정과 희망퇴직 등이 산업계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만큼, 기업 경영이 빠르게 정상화될 수 있도록 금융·세제 지원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한경협이 조사한 사업보고서 제출 대상 제조업체 경영성과 분석 보고서를 보면 국내 내수기업 620곳의 올해 상반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9% 줄었다. 2020년 이후 첫 마이너스 성장이다. 반면 수출이 전체 매출에서 50%가 넘는 수출기업은 같은 기간 매출이 13.6% 상승했다. 전년도 매출액 감소(-7.3%)에 따른 기저효과가 작용한 것이라는 게 한경협 분석이다.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수출기업들의 매출액 증가폭은 5.9%에 그쳤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갚지도 못하는 ‘취약기업’ 숫자도 2020년 팬데믹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체 기업에서 취약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33.8%, 지난해 42.8%, 올해 상반기엔 44.7%에 달했다.
투자도 줄고 있다. 한경협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업 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8.3% 감소했다. 2020년 이후 첫 감소다. 기업 투자는 코로나발 경제위기를 맞은 2020년에도 16.9% 증가한 바 있다.
한경협 관계자는 “내년에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을 비롯해 글로벌 시장에서 불확실성이 대두되는 해가 될 것”이라며 “특히 전 세계 주식시장이나 내수경제나 나쁘지 않은 가운데 유독 한국 시장이 저평가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밝혔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