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는 로봇에 결과물만 제시하면 로봇이 그 과정을 스스로 찾아 수행하는 수준에 이를 것.”
마크 레이버트 보스턴 다이내믹스 창립자 겸 인공지능(AI) 연구소장은 지난 5월 매일경제신문과 만나 로봇의 미래에 대해 이같이 전망했다. 로봇이 물건을 집어 새로운 위치에 내려놓는 수준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상황을 인지·예측하고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로봇의 두뇌 역할을 하는 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로봇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디지털 공간에서 머물렀던 AI 기술을 로봇에 접목해 기계가 사람처럼 인식·행동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챗GPT처럼 자연어 명령만으로 로봇을 조종할 수 있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로봇에 대한 학습 체계를 완전히 바꾸면서 로봇의 활용 범위를 빠르게 넓혀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레이버트 소장이 그리는 미래는 로봇이 인간과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하면서 인간을 돕고, 사람이 하기에 위험하거나 어려운 영역을 담당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로봇이 인간을 보면서 스스로 학습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설명이다. ‘저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워’라고 지시하면 로봇이 인간을 관찰하고 스스로 학습해 모방하는 수준까지 기술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끄는 AI 연구소에서도 이 같은 ‘보고 이해하고 실행하는’ 프로젝트를 포함해 장기적인 로봇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로봇이 고장날 경우 스스로를 치료하는 것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레이버트 소장은 “지금은 인간들이 로봇 데이터를 분석하고 고장날 경우 수리 방법을 찾지만, 훗날에는 로봇들이 스스로 진단하고 고치는 방법을 찾아 수리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현대자동차그룹이 2021년 인수한 미국의 로봇 기업이다. 4족 보행 로봇 ‘스팟’, 물류 로봇 ‘스트레치’, 2족 보행 로봇 ‘아틀라스’ 등을 개발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레이버트 소장은 1992년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창업한 뒤 현재는 현대차가 별도로 설립한 AI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보행 로봇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카네기멜런대 로봇연구소 교수와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를 지냈다. 이후 MIT에서 독립하며 1992년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창업했다.
레이버트 소장은 특히 올해가 휴머노이드 로봇이 대거 쏟아지는 해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많은 생명체가 갑자기 탄생했던 캄브리아기 같은 시대가 로봇 생태계에 찾아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올해 말이면 100개가 넘는 기업에서 휴머노이드로봇을 개발할 것”이라며 “아직 휴머노이드 로봇이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분야에 투자가 몰리고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인간 모습을 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을 둘러싼 투자 열기가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휴머노이드란 머리, 몸통, 팔다리 같은 인간 신체와 유사한 형태를 지닌 로봇을 의미한다. 아직 상용화 단계는 아니지만 인간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어 로봇 사업의 ‘끝판왕’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향후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이 기피하는 ‘위험하고 더럽고 단조로운’ 작업에 우선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골드만삭스는 “자동차 제조, 재난 구조, 원자로 작업과 같은 부문에서 노동 대체율을 5~15%로 가정할 경우, 휴머노이드 로봇에 대한 수요는 10년 내 350만대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휴머노이드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의 뒷단에는 AI가 있다. 투자업계는 물론 테크업계 현장에서도 생성형 AI와 로보틱스(로봇)가 만나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증폭되고 있다. 이에 대해 레이버트 소장은“ 로봇과 AI는 다르지 않다”며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AI와 로봇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넥스트MSC에 따르면 전 세계 AI 로봇 시장 규모는 2021년 956억달러(약 129조원)에서 2027년 1580억달러(약 213조원)를 거쳐 2030년 1848억달러(약 249조원)로 연평균 3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2월 발간한 ‘글로벌 자동화: 휴머노이드 로봇’이라는 보고서에서 “AI 발전으로 휴머노이드 로봇은 전기자동차와 스마트폰 다음으로 일상생활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기술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테크기업들의 기술 선점 경쟁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3월 미국의 로봇 스타트업 ‘피겨AI’는 오픈AI와 협력해 개발한 ‘피겨01’을 선보였다.
공개된 시연 영상에선 로봇이 사람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면서 사과(과일)를 건네고, 쓰레기를 치우는 동시에 접시를 식기건조대에 올리는 장면이 나왔다. 로봇의 행동이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엔 수많은 인지 과정이 담겨 있다. “먹을 것을 줄래”라는 질문을 알아들으려면 자연어 이해 능력이 필요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구분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나아가 사과를 선택해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물리적 동작도 수반한다. 로봇은 업무를 수행한 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꽤 잘한 것 같다”며 마치 사람이 감정 표현을 하듯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2022년 설립된 피겨AI는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아마존, 인텔 등에서 이미 6억7500만달러(약 9100억원)를 투자받았다. 올해 초부터 오픈AI와 협력해 차세대 지능형 로봇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오픈AI와 MS의 AI 기술이 로봇에 접목됐다.
테슬라는 자사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2’를 공개했다. 특히 테슬라는 제조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로봇 기술 내재화에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지난 4월 새로운 휴머노이드 로봇 ‘올 뉴 아틀라스’ 영상을 공개했다. 유압식으로 작동하던 기존 아틀라스와 달리 전기 모터로 구동되며, 360도 회전하는 관절 등 인간보다 자유로운 활동 범위가 특징이다. 아직 출시 일정은 나오지 않았으나, 현대자동차 제조 공정 등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회사들의 휴머노이드 기술력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 최대 검색 엔진 기업 바이두는 최근 중국 로봇 제조사인 유비테크(UBTECH)와 협력해 휴머노이드 개발에 나섰다.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로봇 스타트업 피겨AI와 협력해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휴머노이드를 내놓자 대응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바이두가 자체 개발한 AI 모델 ‘어니봇’을 유비테크의 휴머노이드 ‘워커S’에 내장하는 방식으로 협력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유비테크는 하드웨어 기술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회사다.
어니봇은 지난해 바이두가 공개한 거대언어모델(LLM) ‘어니 4.0’을 기반으로 챗GPT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유비테크가 자체 개발한 ‘워커’는 중국 최초의 상용 2족 보행 휴머노이드다.
워커S의 시연 영상에서 “내일 출장을 가야 하는데 챙길 옷을 정리해줄래”라고 부탁하자 사람 형체의 로봇이 티셔츠를 곱게 접어 주인에게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곧이어 “이 티셔츠가 어떤 색상의 바지와 어울릴까”라고 묻자 로봇은 “상의 색깔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 어두운 계열의 바지가 어울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바이두 창업자인 로빈 리 회장은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바이두의 LLM은 챗GPT와 비교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며 “바이두의 LLM이 결합된 워커S는 휴머노이드 시장에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니트리는 지난달 휴머노이드 개발에 성공했다. 이 회사가 개발한 ‘H1’은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걷고 뛸 수 있는 2족 보행 로봇이다. 유니트리 측이 공개한 시연 영상에 따르면 이 로봇은 복잡한 댄스 동작까지 소화한다. 작은 상자를 들어 올려 운반하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수도 있다. H1 가격은 9만~15만달러로 고급 차량과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됐다. 이미 선주문을 받고 있어 곧 시장에 출시될 예정으로 알려졌다. 또 중국 전기차 회사 니오는 자동차 제조를 위한 휴머노이드 개발에 나섰다. 이 회사는 팀을 구성해 알고리즘, 동적 인식, 대형 모델 등 로봇 기반 기술 연구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휴머노이드를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공업정보화부는 2025년까지 휴머노이드를 대량 생산하고, 2027년에는 세계 최고 수준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중국 로봇망에 따르면 5월 중국의 17개 정부 부처가 공동으로 국가 휴머노이드 로봇 생태계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중국의 핵심 로봇 기업, 대학, 기관 등이 참여한다.
빅테크를 중심으로 ‘로봇 두뇌’ 선점 경쟁도 치열하다. 구글은 올해 초 로봇을 위한 AI 모델인 ‘오토RT’를 공개했다. 프로그래밍이나 별도의 훈련 없이도 스스로 학습해 명령을 이해하는 로봇 특화 AI 모델로, 지난해 7월 공개한 로보틱스 트랜스포머2(RT-2)의 차기 버전이다. 오토RT에는 RT-2에다 영상언어모델(VLM)과 LLM이 적용됐다. 로봇이 카메라로 인식한 영상을 VLM이 분석하고, 로봇이 수행할 임무를 LLM이 생성해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로봇에 ‘종이를 자르고 싶은데 가위가 없다’고 말하면 카메라 센서로 물건을 인식해 주변에 있는 문구용 칼을 건네는 식이다. 구글은 카메라로 수집한 정보를 더욱 효과적으로 처리해 로봇의 판단 속도를 높이는 신경망 아키텍처인 ‘사라-RT’의 업그레이드 작업도 하고 있다.
MS는 최근 캐나다 로봇 기업 ‘생추어리AI’와 손잡고 범용 휴머노이드 로봇을 위한 AI 모델 개발에 착수했다. 생추어리AI가 개발한 로봇 ‘피닉스’는 카본이라는 AI 제어 시스템을 적용해 인간의 행동 데이터를 정교하게 따라 한다. 양 사는 MS 애저 클라우드를 활용해 대규모행동모델(LBM)을 연구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및 텍사스대 연구팀과 함께 로봇 훈련을 가속화하는 기술 ‘닥터유레카’를 공개했다. 이 기술은 지난해 엔비디아가 공개한 로봇 훈련 알고리즘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AI 에이전트 ‘유레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닥터유레카는 로봇이 습득하고자 하는 기술을 LLM을 통해 가상 환경에서 훈련시킨 후 실제 환경에 적용하는 일련의 작업을 자동화하는 기술이다. 엔비디아가 닥터유레카를 통해 로봇 개에게 네 발로 걷는 기술을 훈련시킨 결과 기존보다 보행 속도가 34%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AI 로봇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리서치 기관인 로봇리포트에 따르면 올 1분기 로봇 스타트업 투자 유치 규모는 32억달러(4조3000억원)로 1년 전 17억달러(2조3000억원)와 비교해 2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구글 개발자와 스탠퍼드대 교수들이 설립한 피지컬 인텔리전스는 올해 초 7000만달러(약 945억원)의 투자금을 조달했다. 이 회사는 로봇의 동작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노르웨이에 본사를 둔 로봇 스타트업 ‘1X’도 지난 2월 오픈AI 등으로부터 1억달러(약 1350억원)를 투자받았다.
황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