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기술선두 자리를 두고 한판 기싸움을 벌였다. 두 업체가 한판 붙은 ‘링’은 바로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이번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양 사는 차세대 반도체를 두고 누가 과연 선두인지 저마다 우위를 주장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 제품이다. 인공지능(AI) 시대의 필수재로 꼽힌다.
HBM은 쉽게 말해 D램을 쌓아 만든 제품이다. 이렇게 되면 데이터가 지나다닐 수 있는 차선이 더욱 늘어나는 효과가 생긴다. 고대역폭(High Bandwidth)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이렇게 되면 동시 데이터 처리 속도가 일반 D램보다 훨씬 빨라진다. 기존에는 HBM 하나를 쓰느니 여러 D램을 쓰는 것이 가격 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에 상용화가 더뎠다. 하지만 방대한 데이터 처리를 필요로 하는 챗GPT 등 생성형 AI가 대세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지난해 기준 HBM이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9% 남짓이다. 지금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올해 폭발적 성장이 시작됐다. 올해 전 세계 HBM 수요는 2억9000만GB(기가바이트)로 전년 대비 60%가량 증가하고, 내년에는 30% 더 성장할 전망이다.
HBM이 국내 양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구세주’로 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두 회사는 실적 발표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HBM에 대해 간증을 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는 DDR5와 HBM 중심으로 AI용 수요 강세에 대응, 전분기 예상한 가이던스를 웃돌면서 전분기 대비 실적이 개선됐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HBM 제품을 포함한 그래픽 D램 분야 매출이 지난 4분기부터 빠르게 오르면서 2분기 현재 전체 매출의 20%를 웃도는 수준으로 올라갔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두 회사 모두 HBM이 단순 미래 먹거리로서 차세대 전략 제품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현 불황기 타계에 앞장서고 있는 1등 공신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기업들은 HBM이 하반기 실적 회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양 사는 누가 과연 HBM의 최강자인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포문을 먼저 연 건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26일 HBM 분야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앞으로 시장을 계속 선도해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AI향 제품인 HBM과 DDR5 두 제품의 매출이 지난해 대비해 2배 이상 늘어나 올해 연간 기준 매출 내 비중이 20%를 넘어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장악력이 높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진행된 주요 기관투자가 및 증권사 애널리스트 대상 비공개 기업설명회(IR)에서 내년 HBM 물량을 올해보다 2배 이상 늘릴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자 삼성전자가 다음날 즉각 맞불을 놓으면서 불꽃이 튀었다. 삼성전자는 실적 발표에서 “HBM 시장 선두업체로 HBM2를 주요 고객사에 독점 공급했고, 후속으로 HBM2E 제품 사업을 원활히 진행하고 있다. HBM3도 업계 최고 수준의 성능·용량으로 고객 주문이 들어오는 중”이라며 원조임을 강조했다. 이어 “올해 지난해 대비 2배 수준인 10억GB 중반을 넘어서는 고객 수요를 확보했다”며 “하반기 추가 수주에 대비해 생산성 향상을 통한 공급 확대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전날 하이닉스의 2배 발언을 의식한 듯 “2024년 HBM 캐파는 증설 투자를 통해 올해 대비 최소 2배 이상 확보할 것이며 향후 수요 변화에 따라 추가 대응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에서 현재까지의 중간 평가는 SK하이닉스의 우위를 꼽는 시각이 많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해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 50%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트렌드포스의 점유율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 대표는 사내 소통행사를 통해 “삼성전자의 HBM 제품 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50% 이상이다”라고 밝혔다. 트렌드포스의 조사 결과와는 달리 삼성전자의 점유율이 1위라는 것을 돌려서 밝힌 셈이다.
삼성전자는 설사 하이닉스의 점유율이 높다 하더라도 아직은 초기 시장인 만큼 본격적인 상용화가 된다면 기술력을 바탕으로 역전을 자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첨단 NCF(논컨덕티브필름) 소재를 개발해 현재 양산 중인 HBM3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면서 “두께 제약이 있는 HBM4 16단에서 칩을 직접 접합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지속적인 신기술 확대로 HBM 선도 업체로서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예고했다.
SK하이닉스도 차세대 HBM 경쟁에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는 입장이다. SK하이닉스는 내년 상반기 5세대 HBM3E 양산에 돌입하고, 2026년 6세대 제품인 HBM4를 양산할 계획이다. 박명수 SK하이닉스 D램마케팅담당 부사장은 “HBM 로드맵은 현재 액셀러레이터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그래픽 프로세서 업체들과 협력해 출시 간격을 잘 지켜봐야 한다”며 “HBM은 약 2년 간격으로 제품 수명주기(라이프사이클)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며, 이 부분을 감안하면 2026년경부터는 HBM4로 넘어갈 것으로 보고 있고 SK하이닉스는 거기에 맞춰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래픽처리장치(GPU) 개발사 중 하나인 엔비디아는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컴퓨터 그래픽 콘퍼런스 ‘시그래프 2023’에 참석해 슈퍼 GPU ‘GH200’을 공개했다. 이 제품은 생성형 AI 등 고성능 컴퓨팅 작업에 최적화된 모델로 HBM3E(4세대 제품)를 탑재한 것이 특징이다. 지금 수준에서 엔비디아에 HBM3E를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유일하다. 두 반도체 기업이 기술 경쟁을 펼치는 전장은 HBM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메모리 반도체 한 축인 낸드플래시에서는 ‘초고층’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낸드플래시에서 마의 벽으로 불렸던 ‘300단’ 고지를 세계 최초로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데이터를 저장하는 셀을 더 높은 단수로 쌓으면 웨이퍼 1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전체 용량이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SK하이닉스는 지난 8월 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개막한 ‘플래시 메모리 서밋’에서 321단 낸드플래시 개발 경과를 발표하고 샘플을 공개했다. 이전 세대인 238단 512Gb 대비 생산성이 59% 더 높아졌다. 1개의 칩이 더 높은 단수로 더 큰 용량을 갖춘 덕에 웨이퍼 1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전체 용량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는 321단 낸드 완성도를 높여 2025년 상반기부터 양산할 계획이다.
낸드플래시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저장되는 메모리 반도체인데, 셀을 수직으로 쌓아올려 데이터 용량을 늘리는 적층 기술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이 때문에 메모리 업계에서는 최근 초고층 낸드 쌓기 기술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최정달 SK하이닉스 낸드개발담당(부사장)은 “AI 시대가 요구하는 고성능·고용량 낸드를 주도적으로 선보이며 혁신을 이끌어가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11월 236단(8세대) 낸드 양산을 시작했고, 내년에는 300단 이상 제품을 양산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삼성전자는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며 단을 높여서 2030년엔 1000단 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본적으로 삼성전자는 미세 공정으로 압도적 원가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단순한 적층 경쟁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등이 72단 제품부터 더블스택을 적용한 것과 다르게 128단 제품까지 싱글스택을 적용하고 있다.
스택은 가장 아래에 있는 셀과 맨 위에 있는 셀을 하나의 묶음(구멍 1개)으로 만든 것을 뜻한다. 셀을 묶는 구멍을 적게 뚫을수록 전송 속도가 빠르고 비용도 덜 든다. 삼성전자의 압도적인 원가경쟁력의 비결이다. 삼성전자는 원가경쟁력을 확보한 상태에서 내년까지 9세대(300단 이상) 낸드를 양산하고, 2030년까지 1000단 낸드를 개발하는 게 목표다. SK하이닉스가 이날 2025년 상반기께 321단 제품 양산을 목표로 내세운 만큼 실제 300단 이상 제품의 양산 시점은 삼성전자가 조금 더 빠를 것으로 전망된다. 또 다른 다크호스인 미국 마이크론은 내년 이후 300단 이상 제품을 공개할 것으로 예고한 상태다.
이 같은 기술 경쟁 추이에 따라 시장 점유율은 또다시 요동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1분기 낸드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 34%, 키오시아 21.5%, SK그룹(SK하이닉스+솔리다임) 15.3%, 웨스턴디지털(WD) 15.2%, 마이크론 10.3% 등이다. 키오시아와 WD를 합치면 점유율 36.7%로 삼성전자를 제치고 새로운 1위가 될 수 있다. 최근 블룸버그는 키오시아와 WD가 이달 말까지 합병 계약을 맺는 걸 목표로 한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를 필두로 한 중국 기업들의 추격도 만만찮다. 5년의 기술격차를 둔 D램과 달리 낸드의 경우 한국과의 격차는 2년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YMTC는 계획했던 192단 낸드 양산을 중단하고 곧바로 232단 낸드 양산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공격적 감산과 더불어 부가가치가 높은 고사양 제품 개발에 집중하면서 불황 속 후발주자들의 추격을 물리친다는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생성형 AI 등에 필요한 고성능·고용량 메모리 수요 확대에 맞춰 300단대 낸드 제품 수요도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오찬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