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그룹의 뒤에는 늘 ‘범삼성가(家)’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범삼성가인 한솔그룹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장녀인 고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아들들이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솔그룹은 지주사 한솔홀딩스를 비롯해 한솔제지, 한솔페이퍼텍, 한솔테크닉스, 한솔로지스틱스, 한솔홈데코, 한솔PNS, 한솔인티큐브, 한솔케미칼 등의 계열사를 둔 범삼성가 기업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새한제지를 인수하면서 설립한 전주제지가 전신.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해 이후 한솔제지로 사명을 바꾸면서 지금의 한솔그룹이 탄생했다. 한때 재계 순위 11위에 올랐었던 대기업이었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친 후 과도한 차입금에 따른 유동성 위기로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기업순위가 하락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인휴대통신(PCS)과 오크밸리 리조트 사업이다. 1996년 한솔그룹은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한솔PCS를 설립했으나 이듬해 시작된 외환위기로 사업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1조원에 가까운 투자자금을 쏟은 PCS 사업은 한솔그룹의 부담을 키웠다. 결국 한솔그룹은 KT에 한솔PSC 주식을 매각하며 사업에서 손을 뗐다. 이 과정에서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은 편법으로 양도소득세를 줄여 현재까지 고액체납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한솔그룹의 오크밸리 사업도 부진을 겪으면서 2019년 HDC현대산업개발에 넘어갔다. 그 결과, 2018년에는 공시기업집단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올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집단(77위)에 다시 올라오면서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8년 이후 5년 만의 대기업집단 복귀다.
대기업집단 재진입의 배경은 매출채권과 재고 자산이다. 한솔제지, 한솔케미칼, 한솔테크닉스 등 핵심 사업사 3곳의 지난해 말 기준 자산 총액만 4조5000억원대다. 여기에 한솔아이원스(옛 아이원스) 인수 역시 영향을 미쳤다. 한솔그룹은 지난해 초 한솔테크닉스를 통해 반도체 장비부품업체인 아이원스를 인수하며 반도체 관련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삼성전자와 미국 반도체 장비업체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등을 주요 고객사로 두고 있다.
한솔그룹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장녀인 고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아들들이 경영하고 있다. 이 고문 장남인 조동혁 회장이 한솔케미칼, 삼남인 조동길 회장이 지주회사 한솔홀딩스를 이끌고 있다. 조동길 회장은 2002년 어머니 이인희 한솔 고문의 뒤를 이어 한솔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후 한동안 제지산업 중심으로 내실을 다졌으며 순환출자구조이던 한솔그룹의 지배구조를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존 한솔제지 법인을 투자사업 부문인 한솔홀딩스(존속법인)와 제지사업 부문인 한솔제지(신설 법인)로 인적분할하는 등 그룹을 지주회사 중심으로 변모시켰다. 이후 계열사인 한솔로지스틱스, 한솔라이팅, 한솔PNS의 투자 부문을 분리해 한솔홀딩스에 합병시켰다.
현재 한솔그룹의 경영은 ‘한 지붕 두 가족’ 형태다. 앞서 조동혁 회장이 한솔케미칼, 삼남인 조동길 회장이 지주회사 한솔홀딩스를 이끌고 있다. 한솔홀딩스 계열에는 한솔제지를 비롯 한솔테크닉스, 한솔로지스틱스, 한솔홈데코, 한솔인티큐브, 한솔페이퍼텍, 한솔PNS 등이 자리잡고 있다. 한솔케미칼 계열사로는 테이팩스, 솔머티리얼즈, HS머티리얼즈, 바이옥스 등이 있다. 하나의 그룹으로 묶여 있지만, 조동혁 회장과 조동길 회장이 각각 회사를 운영하는 이원화 체제인 셈이다. 한솔그룹 지배구조를 살펴보면 그룹 내 영향력이 큰 것은 삼남 조동길 회장이다. 조동길 회장이 최대주주(17.2%)로 있는 한솔홀딩스가 그룹 내 핵심 회사를 지배했다. 한솔홀딩스가 보유한 핵심 회사 지분은 ▲한솔제지(30.5%) ▲한솔홈데코(23.3%) ▲한솔테크닉스(20.3%) ▲한솔로지스틱스(21.4%) ▲한솔PNS(46.1%) 등이다.
조동혁 회장은 한솔케미칼 지분 11.7%를 보유해 2대 주주에 올라 있다. 한솔케미칼의 최대주주는 국민연금(12%)이며 블랙록 펀드 어드바이저(6.1%) 등이 주요 주주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원화된 구조라고는 하지만 사업영역이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돼 있어 큰 문제는 없다”면서 “후계 구도 역시 둘로 나뉘어 있다”고 귀띔했다.
먼저 조동혁 회장 측에선 장녀인 조연주 한솔케미칼 부회장이 주목받고 있다. 조연주 부회장은 보스턴컨설팅그룹과 빅토리아시크릿에서 근무하다, 지난 2014년 한솔케미칼 기획실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2020년 초에는 부회장에 오르면서 후계자로 꼽혀왔다. 조 부회장은 자회사 테이팩스 인수를 주도하는 등 사업 재편과 신성장동력 발굴을 진두지휘해왔다. 지난해 초 조동혁 회장이 보유 중이던 지분 일부를 자녀 3명에게 증여했다. 장녀인 조연주 부회장에게 15만7446주, 차녀 희주 씨와 현준 씨에게 각각 7만8500주씩 물려줬다. 문제는 여전히 조연주 부회장의 회사 지분이 1.4%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를 위해선 지분 확대가 필수적이다. 그룹 안팎에선 조연주 부회장이 주요 사업을 경험하며 명분을 쌓아온 점을 고려하면 조만간 승계작업이 본격화될 것으로 본다.
조동길 회장 쪽에선 오너 3세인 조성민 한솔제지 상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조상무 역시 외국계 기업을 거쳐 2019년 한솔홀딩스, 2021년부터는 한솔제지로 자리를 옮겼다. 조 상무 측이 최근 들어 한솔홀딩스 지분을 적극 인수하면서 경영권 승계가 본격화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원화된 구조에 분란은 없지만 문제도 적지 않다. 당장 주력 사업체인 한솔홀딩스와 한솔제지는 올해 실적 악화가 예상된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에 따르면 한솔제지는 올해 매출 2조5494억원, 영업이익 1005억원을 거둘 전망이다. 전년 대비 영업이익이 22.8% 준다.
실제 한솔홀딩스 영업이익은 11억원으로 전년 동기(48억원)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같은 기간 한솔제지와 한솔케미칼은 영업이익이 각각 69.3%(246억원→78억원), 35.5%(541억원→349억원) 줄었다. 한솔테크닉스 영업이익이 56%(107억원→167억원) 늘었으나 그룹 실적 상승을 이끌긴 역부족이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선 신신성장동력 발굴이 절실하다. 한솔테크닉스를 통한 반도체 사업 진출은 이러한 맥락으로 풀이될 수 있다. 시장에선 한솔그룹이 추가 M&A 등을 진행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한솔케미칼 쪽은 상대적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솔케미칼은 850억원을 들여 전북 익산에 실리콘탄소복합체(SiC) 계열 음극재 공장을 짓고 있다. 연 750톤 생산이 목표다. 음극재는 양극재·전해질·분리막 등과 더불어 배터리 구성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4대 핵심 소재다. 이러한 변화는 조연주 부회장이 진두지휘했다. 한솔케미칼은 지난 2012년 일본 기업이 독점하던 음극바인더 개발에 성공했다. 조 부회장은 2014년 한솔케미칼 기획실장(부사장)으로 입사한 직후부터 이차전지 소재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음극바인더 판매를 강화하고 테이팩스 인수를 주도하기도 했다.
한솔계열사 임원 출신의 한 인사는 “여전히 한솔제지가 핵심 기업인 만큼, 회사에 큰 변화가 없었다. 최근 테크닉스 및 케미칼 등 계열사를 중심으로 신사업에 나서고 있지만 전체에 비하면 아직 규모가 미미하다”면서 “사업은 물론 조직문화에도 혁신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김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