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빙하기’가 본격화되는 가운데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글로벌 1위인 TSMC마저 매출 감소 전망을 내놨다. 메모리 1위 삼성전자는 적자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시장 경색이 심해지면서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2위, 4위인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WD)의 합병 논의까지 수면으로 올라왔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삼성전자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도 높아지고 있다.
웬델 황 TSMC 부사장은 최근 지난해 4분기 실적발표 후 진행한 콘퍼런스콜에서 “올해 자본지출(투자)은 320억달러(약 39조8200억원)에서 360억달러(약 44조8000억원) 사이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TSMC가 지난해 자본지출로 363억달러(약 45조1900억원)를 투입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해는 최대 12%가량 투자를 줄이는 셈이다. 황 부사장은 “자본지출 가운데 70%는 첨단 프로세스 기술에 투자하고 20%는 특화된 기술에, 10%는 첨단 패키징 등의 분야에 투입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TSMC가 투자를 축소하는 것은 올해 반도체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TSMC는 올해 1분기 매출이 167억달러(약 20조7700억원)에서 175억달러(약 21조7700억원) 사이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1분기 TSMC의 매출이 175억7000만달러(약 21조8600억원)임을 고려하면 올해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최대 5%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TSMC는 올해 1분기와 2분기를 합친 상반기 매출이 전년 대비 5~9%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불어 닥친 혹독한 ‘반도체 겨울’은 메모리 반도체 강자 삼성전자도 피해가지 못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라 소비가 줄면서 주력 사업인 반도체를 중심으로 스마트폰, 가전 등 모든 사업 부문 실적이 부진했다. 삼성전자는 연매출 300조원 시대를 열었지만 낮은 영업이익률로 빛이 바랬다.
삼성전자가 발표한 지난해 4분기 잠정 영업이익(연결 기준)은 4조3000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69%나 줄었다. 금융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컨센서스인 6조9254억원을 2조6000억원이나 밑도는 ‘어닝쇼크’였다.
영업이익이 쪼그라든 가장 큰 이유로 반도체 사업 부진이 꼽힌다. 증권업계에선 잠정 실적을 기반으로 반도체를 담당하는 DS부문이 4000억~6000억원 수준의 영업이익을 낸 것으로 추정한다. 지난해 2분기만 해도 약 10조원의 영업이익을 냈던 반도체 부문이다.
특히 주력 제품 중 하나인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은 아예 적자 전환한 것으로 분석된다. 고금리에 인플레이션까지 겹쳐 반도체가 들어가는 데이터센터 서버와 가전제품, 스마트폰 등의 소비가 일제히 줄었기 때문이다.
수요가 줄면서 재고가 쌓이고, 높은 재고량 탓에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는 ‘악순환’도 벌어지고 있다. 예상보다 낮은 영업이익 역시 재고자산 평가 손실이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반도체(재고자산) 시가가 취득원가보다 하락하면 이는 재고자산 평가손실로 영업이익에 반영된다. 김영건 미래에셋증권 선임연구위원은 “반도체에서 예상보다 더 급격하게 매출이 둔화했고, 재고평가 손실이 일부 반영돼 영업이익이 급락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반도체의 부진과 더불어 비반도체 영역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모바일 사업을 담당하는 MX·네트워크 부문은 4분기 영업이익이 1조원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직전 분기(3조2400억원)와 비교하면 큰 폭의 감소다. 세계 경기 침체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스마트폰 출하량이 예상을 밑돈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측은 “MX는 매크로(거시경제) 이슈 지속에 따른 수요 약세로 스마트폰 판매·매출이 감소해 이익이 줄었다”고 밝혔다.
특히 삼성 스마트폰 원가에서 10~20%를 차지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가격 상승이 모바일 사업 부문 실적 악화의 이유로 꼽힌다. 영상디스플레이와 생활가전 사업 부문 역시 수요 부진에 원가 부담이 겹쳐 수익성이 악화했다. 증권업계에선 이들 부문 영업이익을 직전 분기보다 33.9% 줄어든 3700억원 수준으로 예상했다. 고금리에 전 세계적으로 주택 구매가 줄어들고, 소비자들이 지갑 문을 닫은 게 결정적인 이유로 꼽힌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TV 출하량은 전년보다 3.8% 감소한 2억200만 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10년 만에 최저치다. 사업부문 중에서는 그나마 디스플레이(SDC)가 선방한 편이다. SDC는 직전 분기(1조9800억원)와 비슷한 1조7700억원대 영업이익을 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찌감치 중소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집중하면서 구조조정을 해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불황이 적어도 올해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는 점이다. 시장에선 글로벌 반도체 판매가 작년에 비해 4% 넘게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지난해 11월 글로벌 반도체 판매가 전년 대비 9% 넘게 급감한 이후 ‘반도체 빙하기’가 수치상으로도 본격화됐다는 분석이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올해 글로벌 반도체 판매가 5565억달러(약 691조3400억원)로 지난해에 비해 4.1%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최근 밝혔다. SIA는 당초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판매액이 5801억달러(약 720조3100억원)로 2021년 5559억달러(약 690조2600억원)에 비해 4.4%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반도체 판매 위축이 본격화되면서 올해 판매액이 2021년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SIA가 내놓은 지난해 11월 글로벌 반도체 판매 통계를 보면 글로벌 반도체 수요 위축의 골은 더 깊어졌다. SIA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글로벌 반도체 판매는 455억달러(약 56조5600억원)로 1년 전의 500억달러(약 62조1500억원)와 비교해서 9.2% 급감했다. 지난해 10월의 469억달러(약 58조3100억원)에 비해서는 2.9% 감소한 수준이다.
지난해 10월 글로벌 반도체 판매는 전년 대비 4.6%, 전월 대비 0.3% 감소했지만 11월에는 시장 위축이 더 가속화됐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불어닥친 한파가 수치에 본격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존 뉴퍼 SIA 회장은 “지난해 11월 글로벌 반도체 판매가 감소한 것은 시장의 순환적 요인과 함께 거시경제적 영향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반도체 빙하기’가 장기화되면서 시장은 춘추전국 시대가 되고 있다.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2위, 4위 기업인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WD)의 합병 논의가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재편될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과거 반도체 불황기에는 경쟁사 간 ‘치킨게임’이 격화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다른 기업에 흡수되는 일이 잦았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반도체 불황의 골이 깊어지자 낸드 시장에서 경쟁하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생존을 위한 합종연횡에 나서고 있다는 해석이다.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세계 낸드 시장 2위인 키옥시아와 4위인 웨스턴디지털은 합병 논의를 진행 중이다. 현재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은 낸드 기술 개발, 생산시설 운영 등에서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낸드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점유율 31.4%로 1위 자리에 올라 있다.
키옥시아(20.6%), SK하이닉스(18.5%), 웨스턴디지털(12.6%), 마이크론(12.3%)이 2~5위권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이 합병한다면 SK하이닉스는 물론이고 단숨에 삼성전자마저 위협할 수 있는 규모로 커진다.
아직까지 두 회사 간 합병과 관련해 구체적인 논의가 진전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두 회사 간 합병에 반도체업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과거 불황기에 반복됐던 시장 재편의 역사 때문이다. 반도체 시장 재편은 그동안 D램 부문에서 벌어졌다. 대표적인 시장 재편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이어진 ‘반도체 대공황기’에 진행됐다. 당시 PC 시장에서 활황을 경험했던 반도체 기업들은 앞다퉈 대규모 투자에 나섰지만, PC 수요 감소로 D램 가격이 폭락하면서 대규모 손실에 직면했다. 당시 일본 D램 기업들은 NEC가 중심이 되는 엘피다메모리로 통합되거나 D램 사업에서 철수했다.
국내에서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하이닉스반도체로 통합됐다. 이에 따라 1990년대 15개에 달했던 D램 업체는 현재 3개로 재편됐다. 과점 체제로 정리된 D램 시장에 비해 글로벌 낸드 시장은 아직 5개 기업이 경쟁 중이다. 이에 본격화하는 반도체 불황기를 맞아 시장이 재편될 여지가 작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 관측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올 1분기 삼성전자의 반도체 수성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선 올 1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적자로 전환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온다. 위민복 대신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4분기 낸드사업 부문 영업 적자를 시작으로 올해 1분기는 반도체 부문 적자, 2분기에는 D램까지도 영업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만약 반도체 부문 적자가 현실화하면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분기 이후 14년 만이다.
시장 관심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감산 여부다. 메모리 반도체 1위 업체인 삼성전자 측은 “인위적인 감산은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시장 불황이 점유율을 확대하고 다른 회사와 기술력 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계기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어닝쇼크로 삼성전자가 간접적으로 반도체 공급량 조절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인위적인 감산을 안 한다고 했을 뿐 간접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감산을 진행할 수 있다”며 “캐펙스(CAPEX·설비투자)를 축소하고 라인을 점검하는 등 칩 공급량을 줄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올해 하반기쯤에는 반도체 업황이 회복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올해 예정된 D램과 낸드 신규 증설, 공정 전환 계획을 일부 지연시킬 것으로 추정한다”며 “올해 3분기부터 D램, 낸드 수급은 공급 축소와 재고 감소 효과로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마트폰과 가전 등 다른 사업부 실적은 소비심리가 얼마나 되살아나는지에 달렸다. 김영건 연구원은 “1분기에 출시될 플래그십 스마트폰 효과와 모바일 패널 고객사의 회복 등으로 (반도체 사업으로 인한) 이익 감소분을 일부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찬종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