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상점들을 입점시켰습니다. 상당수가 생긴 지 1년 미만의 로컬 브랜드들입니다. 다른 쇼핑몰과 ‘가로골목’의 차별점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최근 오픈한 쇼핑몰 ‘가로골목’을 기획한 디벨로퍼 ‘네오밸류’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신사동 가로수길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자원이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 고유의 로컬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것으로 콘셉트를 잡았다”고 말했다.
라이프스타일 디벨로퍼 네오밸류와 국내 대표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이 사업비 480억원을 들여 신사동 가로수길에 쇼핑몰 ‘가로골목’을 최근 오픈했다. 가로골목은 대지 723㎡(약 219평), 연면적 2346㎡(약 720평)에 지하 2층~지상 5층 규모로 조성됐다.
쇼핑몰의 운영체계(OS)라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특징은 ‘힙스터 문화골목’으로 잡았다. 개성 있고 힘 있는 스몰 브랜드가 자발적으로 모이게 해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가로수길 상권을 ‘힙(hip)’하게 만들어 보자는 취지다. 실제 가로골목 오픈과 함께 5층에선 ‘스페인에서 온 꼬마 아티스트 레오(LEO)’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를 기획한 임지현 J&S 갤러리 대표는 “가로골목 전시 첫날 ‘완판’으로 성황리에 전시가 마감됐다”고 말했다. 쇼핑몰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의 주제가 ‘힙’이라면 하드웨어적으로 가로골목은 상업시설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실험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 외벽을 없애고 복도를 노출시킨 ‘누드 쇼핑몰’은 시각적으로도 파격이다.
가로골목은 골목길을 표방한 이동통로가 쇼핑 공간을 1층부터 최상층까지 나선형으로 감싸고 돌아가는 독특한 구조다. 인사동 ‘쌈지길’이 가운데 중정을 두고 돌아가는 동선이라면 ‘가로골목’은 가운데 상점을 두고 복도가 주위를 구불구불 감싸는 형태다.
리테일 상업시설 개발은 ‘임대면적’ 극대화를 우선시한다.
복도와 계단은 임대면적에서는 빠진다. 돈이 안 된다는 소리다. 상가건물을 개발할 때 계단을 가장 구석진 곳에 몰아넣는 이유다. 하지만 가로골목은 임대면적을 최대화하는 설계를 포기하고 대신 외부로 노출된 나선형 골목길을 만들었다.
어두컴컴한 계단과 달리 외부로 개방된 계단은 2~5층의 접근성을 높여 상층부의 임대료를 높일 수 있다. ‘노출 계단’의 성공사례는 연희동 상권에서 입증된 적이 있다. 쇼핑객들은 외부로 노출된 계단을 오를 때 바깥 경관도 즐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피곤함을 잊는다.
연희동 상권의 개척자인 김종석 쿠움파트너스 대표는 “상가 건물은 통상 1층의 임대료가 높은 반면 2~5층은 공실 위험도 높고 임대료도 낮다”면서 “계단의 주목도를 높여 고층부의 임대수익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이용을 최대한 불편하게 설계했다. 가로골목은 경사면을 타고 1층부터 최상층 루프톱까지 쇼핑객들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확보했다. 쇼핑몰 가로골목을 관리하는 베리&머치의 관계자는 “불편한 엘리베이터는 ‘비효율의 효율성’을 상징한다”고 소개했다.
여기에 더불어 가로골목은 기존 리테일 시설과는 다른 실험 정신이 가득하다. 임대료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1층에 최대한 많은 면적을 확보하려는 다른 상업시설과 달리 가로수길과 그 뒤의 나로수길이 이어질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고 1층에 광장을 만들었다.
가로골목과 같은 상업시설은 임대료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1층의 수익성이 개발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가로골목은 이러한 쇼핑몰 개발의 문법과 고정관념들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것도 금싸라기 상권인 신사동 가로수길 중심부에선 대단한 모험이다.
가로골목은 3.3㎡당 50만원(또는 매출의 20%) 수준에 임대료를 책정했고 현재 지하 1층을 제외한 전 공간의 임대가 완료됐다. 임대기간은 대부분 3개월로 일종의 ‘팝업 스토어’ 형태다. 실내 인테리어 비용을 최소화하고 권리금, 보증금도 없다.
하지만 가로수길의 땅값은 연희동의 6배가 넘는다. 애플스토어가 들어서면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1000만원씩 올라 가장 최근 거래된 가격이 대지기준 3.3㎡당 2억5000만원에 달한다.
가로수길처럼 금싸라기 땅에 위치한 상업시설은 1층에서 전체 임대료의 절반을 뽑는다. 1층에 어떤 임차인을 들이느냐가 전체 개발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가로수길 1층 상가 임대료는 3.3㎡당 100만원이 넘는다.
▶쇼핑몰이 외부와 숨을 쉬기 시작
그런 의미에서 가로골목의 1층은 파격의 극치다. 1층을 아예 비워 놓다시피했다.
임대공간 대신 통로를 만들어 메인 도로인 ‘가로수길’과 소위 ‘나로수길’이라고 하는 이면도로를 이었다. 대신 1층에서는 ‘벼룩시장’과 같은 초단기 매장을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주말에는 약 1만 명이 가로골목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자연스러운 고객 유입을 노리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1층 광장에는 카페를 비롯해 고객을 사로잡을 만한 콘텐츠를 기획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2층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13개 정도의 패션 브랜드로 구성하며 3층은 디자인 굿즈(기획상품) 브랜드, 4~5층은 커피숍을 비롯해 대형 매장으로 구성, 차별화를 둘 계획이다. 특히 옥상은 고객들이 가로수길은 물론 서울 전경을 관람하면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가로수길 내의 유일한 루프톱 휴식 공간으로 기획, 요가·명상 등의 클래스 체험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을 구성해 놓았다.
상업시설 개발의 또 다른 숙제는 주차장 규제를 어떻게 푸느냐다. 가로골목은 2종 주거지역에선 드물게 지하 2층에 기계식 주차시설을 넣었다. 기계주차시설의 1층 출입구조물을 투명유리로 만들어 자동차 ‘쇼룸’으로 활용할 계획도 있다고 한다.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1층에 위치한 기계식 주차 공간을 유리로 제작해 신차 전시 장소로 활용하거나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한 팝업 스토어 및 페스티벌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7년 이지스자산운용이 가로수길 스와치 건물을 매입해 개발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관련 업계에서는 우려의 시각이 있었다. 자산운용사는 보통 ‘캡레이트’라 불리는 운영 수익률을 기초로 상업시설에 투자한다. 가로수길은 땅값이 급등하면서 건물 수익률이 채 2%가 안 나온다. 부지 모양도 개발에 유리하지 않았다. 맹지에 가까운 국자형 땅이었다. 무엇보다 ‘개발 후 어떻게 매각할 것인가’에 대한 출구전략(Exit Plan)이 확보되었는지 의문이 따라다녔다. 다행히 이지스자산운용이 매입한 이후에도 가로수길 땅값은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정동섭 딜로이트코리아 재무자문본부 전무는 “뉴욕 맨해튼 상업시설의 수익률도 1%대이지만 희소가치 때문에 매물이 귀하다”면서 “가로수길도 그러한 희소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가로골목의 대담한 실험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절묘한 파트너십이다. 국내 대표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과 라이프스타일 디벨로퍼 네오밸류가 손을 잡았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지난 2016년 인사동에 위치한 쌈지길을 인수한 후 얻은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상업시설 개발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가로골목은 어찌 보면 인사동 쌈지길과 유사한 콘셉트로 운영 중이다. 이커머스 위주의 리테일 시장에 대응하고,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공간의 대부분을 짧은 임차기간의 소규모 매장으로 구성했다. 인사동 쌈지길은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에 평균 16㎡의 공간을 사용하는 100여 개의 소규모 점포들이 입점해 있다.
권리금이 없고, 인테리어 투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브랜드들의 부담을 줄여왔다. 가로골목 역시 이 같은 방식을 기본으로 운영계획을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매장 규모도 8.264㎡(2.5평)~198.35㎡(60평)로 다양하게 구성,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개성 있고 참신한 소규모 리테일러부터 인지도를 확보한 리테일러 등 다양한 브랜드를 소개할 계획이다.
가로골목 나선형 구조 콘셉트 스케치 (네오밸류 제공)
▶3개월 단기 팝업 스토어 계약
주말 벼룩시장으로 수익률 확보
불편한 엘리베이터는 ‘비효율의 효율성’ 상징
사용기간은 인사동 쌈지길과는 다르게 1일, 1개월 단위도 가능하다. 매장 사용 기간을 다양하게 구성하여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닿을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기존 리테일 시장에서 권리금 및 보증금, 시설 투자로 인하여 참신하고 개성 있는 소규모 리테일러의 접근이 어렵다는 단점을 극복하여, 좋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리테일러들이 부담 없이 영업할 수 있는 공간의 제공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가로골목이 가로수길을 대표하는 콘텐츠들을 위해 열려 있는 커뮤니티 몰로 자리매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동시에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닿을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조성해 건물의 수익을 올리고 참여하는 브랜드들의 인지도를 높여 상생하는 모델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브랜드들의 입점을 통하여 다양한 콘텐츠와 가변성을 고려해 ‘괄호( )’라는 빈 칸을 다채로운 테마와 콘텐츠로 채운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가로골목’으로 정했다. ‘(가로)골목’은 때로는 (패션)골목, 때로는 (애견)골목이 되기도 하며, (LOVE)골목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명칭을 착안했다는 설명이다.
이지스자산운용은 가로골목을 통해 특화된 운영방식과 영업환경 제공 외에도 참신한 리테일러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을 확대할 예정이다.
그 예로 이지스자산운용과 함께 대상그룹 계열의 UTC인베스트먼트 등이 투자한 콘텐츠 펀드를 통하여 트렌드에 맞고 창의적인 콘텐츠를 가진 리테일러들에게 투자 및 가로골목에 입점시켜 상생을 도모할 계획이다. 이지스자산운용은 대규모 온라인 큐레이션 업체보다는 경쟁력 있는 스몰 브랜드와의 직접적인 미팅을 통해 브랜드 상생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개발회사인 네오밸류가 이지스의 파트너로 참여하면서 개발회사 특유의 ‘상상력’이 가미됐다. 라이프스타일 공간에 대한 매력도 더해졌다.
네오밸류는 가로골목을 단기임대를 통해 트렌드 대응력을 높이고 다양한 임차인 풀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힙스터 문화골목을 조성해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인 가로수길 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다. 또한 임대료가 높은 가로수길에서 신생 브랜드도 가로수길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상생공간을 만든다는 취지다.
손지호 네오밸류 대표는 “작지만 개성 있는 브랜드가 집결된 가로골목이 쇠락해가던 가로수길을 매력적인 상권으로 회복시키는 기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가로골목이 상업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품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쇼핑몰의 가장 좋은 자리에 대규모 ‘앵커 테넌트(주요 임차인)’를 장기 임차하는 방식의 ‘기본 틀’을 깨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지스자산운용과 네오밸류의 의미 있는 실험으로 그칠지는 아직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자산운용사의 부동산 투자수익은 시세차익보다는 운용수익에 기반하지만 가로골목은 이지스자산운용이 처음 가로수길 땅을 매입했을 때보다 가격이 크게 오른 상태라 운용수익에 대한 부담이 덜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