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세 회사원 김영호 씨는 최근 출장에서 톰 브라운의 신상품 실크셔츠를 사고 보니 여기에 맞추기 위해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 더비 슈즈까지 장만하게 됐다. 평소에 많이 걸어 다니는 편이라 명품 구두 바닥이 전체 가죽인 것이 걸렸다. 좀 더 오래 신고 싶은 마음에 구두 밑창을 보강할 곳을 찾고 지인들 추천을 받아 신세계백화점 6층 ‘릿슈(RESH)’를 찾아갔다.
6층 구석에 자리 잡은 낯선 브랜드의 이 매장은 다소 협소했지만 평소에 갖고 싶던 슈트리와 가죽크림 등이 한가득 진열돼 있어 지저분한 구둣방이 아니라 피렌체 가죽공방이 연상됐다. 퇴근하고 가니 또래 남성 고객들로 북적거렸다.
‘리페어 슈즈(Repair shoes)’의 약자인 이 브랜드는 구두 전용 솔과 가죽크림 그 이상이 필요할 때, 이른바 ‘슈케어(Shoe care)’를 받는 공간이다. 단순히 구두 구매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잘 유지할지를 고민하는 남성들이 생겨나면서 국내에도 상륙했다. 구두 가죽 손질부터 바닥 전창 갈이, 뒷굽 수선까지 구두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이 매장에는 이미 수선을 맡긴 구두들이 즐비했다.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남성 고객들이 의류뿐 아니라 구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여성 못지않게 섬세하게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릿슈는 로크, 알든 등 유명 브랜드 구두의 국내 공식 지정 리페어 업체로 선정된 일본 슈 케어 전문업체로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웰트화(워크 부츠와 같은 통창 신발)의 전창갈이 서비스 등 모든 구두를 관리해 준다.
신세계 강남점 맨즈 컨템퍼러리 매장
▶남성 명품 구두 시장 성장세 눈길
‘릿슈’ 매장은 국내 2030 남성들의 명품 럭셔리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남성 고객들이 의류뿐만 아니라 팔찌, 반지, 구두까지 관심 영역을 넓혀 여성 고객 못지않은 섬세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쇼핑과 패션의 주체로 남성이 서서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본인만의 스타일을 가꿔 패션과 스타일에 변화를 추구하는 ‘로엘(LOEL: Life of Open-mind Entertainment and Luxury)족’, 아저씨라 불리길 거부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을 추구하는 ‘노무(NOMU: No More Uncle)족’, 가정에서는 자상하고 편안한 아버지로, 사회에서는 멋진 패션 신사로 변신하는 ‘레옹족’ 등 멋쟁이 남성을 뜻하는 어휘가 다양해진 것도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경제력을 갖춘 30~40대 남성들이 만혼 추세에 맞게 자기 자신을 가꾸고 회사 업무 외에도 문화 활동을 누리는 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시계나 가방, 넥타이 등 오래 쓸 수 있는 패션 액세서리 쇼핑도 사치라 여기던 남성들이 이제는 시즌별 패션의류는 물론 피부 관리를 위한 화장품부터 속옷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챙기면서 백화점 럭셔리 매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신세계백화점의 경우 신사복, 골프의류, 스포츠 등 전통적인 남성 강세 상품은 물론 명품 구매비중도 높아지면서 남성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10년 전인 2007년 23.0%에서 2017년 34.1%까지 치솟았다.
백화점 전체 매출의 32% 수준을 30대가 차지하고 럭셔리 매장의 주력 구매층이 됐다. 신세계백화점이 남성전용 럭셔리 브랜드를 갖춘 본점과 강남점 30대 고객을 분석한 결과 남성 전용 럭셔리 매장에서 구매한 남성 고객 수는 지난해 14.1% 증가한 반면 일반 럭셔리 매장의 여성 고객 수는 2% 증가에 그쳤다. 단순 구매자 숫자만 봐도 남성 구매자가 여성보다 1500명가량 많았다는 전언이다.
남성 명품 시장은 캐주얼 브랜드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2015년부터 이정재, 차승원 등 40대 꽃중년들이 호감을 얻으면서 남성복 시장이 틀에 박힌 정장을 벗기 시작했다. 기존 신사복의 상징이었던 울 소재 수트 대신 면 소재 바지와 재킷, 남성의 V존을 장식하던 넥타이 대신 단추 하나를 풀어 입는 캐주얼 셔츠가 자리매김했다.
▶유지관리 브랜드 ‘릿슈’도 문전성시
신세계백화점 본점 남성전문관의 인기 브랜드들을 살펴보면 골든구스디럭스브랜드, 생로랑, 띠어리 등 대중 브랜드와는 차별화된 디자인을 앞세운 캐주얼 브랜드의 강세가 돋보인다.
특히 2012년 브랜드명을 ‘입생로랑’에서 ‘생로랑’으로 바꾸고 제품부터 매장까지 모두 환골탈태한 ‘생로랑’과 구두 브랜드로 유명한 ‘골든구스디럭스’가 약진하고 있다. 역사는 오래됐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었던 생로랑은 2012년 디올 옴므를 이끌었던 에디 슬리먼(現 셀린느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을 영입하며 혁신을 시도했다. 레오파드(표범 무늬) 코트와 라이더 재킷, 댄싱 부츠 등 1960·1970년대 복고풍의 상품을 캐주얼한 디자인으로 선보여 남녀 모두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로 거듭난 것이다.
‘소녀시대 신발’로 유명한 골든구스디럭스브랜드도 기존 골든구스와는 차별화된 디자인을 앞세워 남성 캐주얼의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했고, 이제는 전 연령에 걸쳐 인기를 누리고 있다. 캐주얼한 복장에 맞게 구두 등 액세서리도 다양해졌다. 신세계백화점 해외잡화 담당 임재혁 바이어는 “비즈니스 캐주얼이 보편화되면서 검은 정장에 검은 구두가 남성 패션의 정석이라는 인식이 무너졌다”며 “스웨이드 소재부터 윙팁(구두 옆 면에 ‘날개’와 같은 스티치 장식), 리갈(구두 코에 있는 장식으로 영화 <킹스맨>에서는 브로그로 소개됐다), 스트레이트 팁(구두 코와 끈 사이 일자모양의 스티치 장식) 등 구두의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갖는 고객들이 늘어나며 구두를 관리하는 팁에 대한 문의도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토종 브랜드의 강세도 눈에 띈다. 금강제화의 ‘헤리티지 리갈’, ‘소다 스위트’, 텐디의 ‘블랙라벨’은 남성 시장이 성장하자 이에 발맞춰 프리미엄 브랜드를 내놓기 시작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멘즈럭셔리 담당 김성원 과장은 “한국인의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앞세운 국내 프리미엄급 브랜드의 약진은 넘쳐나는 남성 전문관의 해외 브랜드 중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현대 판교점 릿슈 매장
▶국산 브랜드도 고급 라인 출시
젊은 남성과 달리 장년층은 선호 브랜드가 차별화된다. 남성전문관에서 50~60대가 사랑하는 브랜드로는 은퇴 후 여유를 즐기는 여행 관련 브랜드가 꼽힌다. 리모와, 쌤소나이트, 투미 등은 여행 가방으로 유명한 정통 가방 브랜드다. 특히 여행 시 활용도가 높은 ‘보스턴 백’이 대표적이다.
분더샵 클래식과 페라가모 등은 캐주얼 열풍 속 ‘정통 클래식’을 선호하는 장년층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같은 남성 럭셔리족의 확대에 발맞춰 백화점도 남성 고객들을 위한 공간을 넉넉히 마련하고 있다. 신세계 강남점 남성 전문관은 원스톱 쇼핑을 콘셉트로 구찌, 버버리, 돌체앤가바나, 생로랑, 토즈, 로로피아나 6개 브랜드의 남성 단독 매장을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 것은 물론, 남성 편집 매장, 구두 액세서리 매장, 카페 등이 한 층에 위치해 토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2014년 9월 컨템퍼러리 럭셔리 남성 패션의 완성체로 탄생한 본점 럭셔리 남성전문관에서는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브랜드, 동시대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 차세대 선두주자로 지목된 100여 개의 브랜드를 선보이고 있다. 브리오니, 에르메네질도 제냐, 벨루티, 페라가모, 꼬르넬리아니 등 기존 클래식 감성의 브랜드뿐 아니라 발렌티노, 톰브라운, 몽클레르, 골든구스디럭스브랜드, 분더샵 등 컨템퍼러리 감성의 럭셔리 브랜드가 대거 입점했다.
이탈리아의 ‘발렌티노’와 ‘페이’도 국내 최초의 남성매장이다. ‘몽클레르’와 ‘콜한’도 국내 최초 남성 매장이며, 몽클레르 감므블루, 톰브라운의 클래식 수트, 벨루티 컴포트화, 발렌티노 락스터드 스니커즈 등을 국내 단독으로 소개하며 화려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또 복잡한 오디오 시스템을 하나의 멋진 가구처럼 디자인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스위스의 오디오 ‘제네바’와 프랑스 하이엔드 오디오 ‘포칼’ 등도 선보인다.
지난 2016년 국내 최초로 선보인 강남점 남성전문관을 한 단계 진일보시킨 ‘멘즈 살롱’을 열고 남심(男心) 흔들기에 성공했다. 전문성과 다양성을 겸비한 남성패션 아이템은 물론, 오피스라이프와 취미, 여행 등 일상생활 아이템까지 결합해 남성들만의 라이프스타일 갤러리로 만들었다.
▶문구, 여행가방까지 라이프스타일 전 시장으로 확대
박제욱 신세계백화점 남성팀장은 “소비 문화가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장된 ‘휴미락(休美樂)’을 내세운 체험형 전문관들이 일본, 유럽 등 유통 선진국을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다”며 “남성 럭셔리 브랜드를 품은 남성전문관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오피스, 여행, 취미 등 남성들의 일상 아이템들을 더해 한 공간에서 다양한 남성 관련 상품과 문화적 체험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남성복합문화공간을 선보이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신세계 강남점 ‘멘즈 살롱’은 가치 지향 소비의 정점에 있는 ‘2030 포미남’들을 겨냥했다. 포미(FOR ME)란 건강(For health), 싱글족(One), 여가(Recreation), 편의(More convenient), 고가(Expensive)의 알파벳 앞 글자를 따 만든 신조어로 자신이 가치를 두는 상품은 과감하게 구매하는 소비 성향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의 꼴레뜨나 일본 이세탄백화점 멘즈관, 일본 대표 서점 츠타야에서나 볼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멘즈 라이브러리를 선보였다. 서재와 오피스를 테마로 일상과 밀접한 상품들을 선보여 남성들의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한다. 그라폰 파버카스텔, 라미, 파카, 타스크 비블리오텍 등 업계 최초의 필기구·문구 전문숍인 스테이셔너리 코너를 꾸려 펜·만년필은 물론, 바인더, 메모패드, 연필, 데스크패드, 아트·디자인북, 여행 서적, 매거진 등 남성들을 유혹하는 제품들이 가득하다. 액세서리 코너 멘즈퍼니싱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크롬하츠, 까르띠에, 모스콧, 톰브라운, 린드버그 등 안경브랜드와 발렉스트라, 에스티듀퐁, 타테오시안, 솔리드옴므, 하트만 등에서 선보이는 서류가방(브리프케이스), 지갑, 여행가방(러기지), 화장품(코스메틱), 쉐이빙용품 등 남성의 취향을 전문적이고 다각적으로 담았다.
또 남자의 여행을 테마로 여행과 출장에 필요한 가방, 액세서리, IT 기기까지 다양하게 구성한 여행 편집숍 ‘맨투고’, 실내 가드닝, 선인장 등 식물과 생활용품을 선보이는 ‘TI포맨 X 가든 스튜디오’, 자전거, 전동 보드, 피규어, 디자인 소품 등을 경험할 수 있는 ‘게이즈샵’ 등 취미와 일상을 담은 라이프스타일 매장들이 대거 들어왔다.
신세계 강남점 ‘멘즈 살롱’은 루이비통, 벨루티, 펜디, 라르디니 등 세계 최고급 브랜드도 추가되면서 남성 럭셔리 브랜드를 완성했다. 이 밖에도 남성 럭셔리 컨템퍼러리 브랜드 중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톰브라운, 이탈리아 대표 명품 브랜드 프라다, 1000만원을 호가하는 하이엔드 슈즈 브랜드 벨루티 등을 새로 선보이며 남성 멋쟁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