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원해 주지 않으면 철수하겠다.”
제너럴모터스(GM)가 한국지엠 군산공장을 폐쇄키로 하면서 GM의 한국 철수설이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 2월 13일 한국지엠 측은 “올 5월 말까지 군산공장의 차량 생산을 중단하고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며 “군산공장은 최근 3년간 가동률이 약 20%에 불과한 데다 가동률이 계속 하락해 지속적인 공장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최근까지 심각한 손실을 기록한 경영실적이 이번 결정의 원인이란 것이다.
카허 카젬 한국지엠 사장은 “이번 조치는 한국에서의 사업 구조를 조정하기 위한,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한 우리 노력의 첫걸음”이라며 “최근 지속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국지엠 임직원, 군산 및 전북 지역사회와 정부 관계자의 헌신과 지원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리 엥글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 사장은 “한국지엠과 주요 이해관계자는 한국에서의 사업성과를 개선하기 위해 긴급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GM은 글로벌 신차 배정을 위한 중요한 갈림길에 있고, 한국지엠의 경영 정상화와 관련해 GM이 다음 단계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2월 말까지, 이해 관계자와의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뤄 내야만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창원과 부평공장도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시한까지 못 박은 셈이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GM과 노조 등의 공방이 지속되며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에도 중대한 화두로 떠올랐다. GM은 높은 임금수준 등 한국지엠의 고비용 구조를 공장 폐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고, 노조와 정치권 일각에선 GM이 한국지엠에 고리대금 장사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한국지엠의 철수설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우선 적자 규모가 철수설에 날개를 달았다. 한국지엠에 따르면 2014~2016년 3년간 누적 당기순손실 규모가 약 2조원, 지난해도 2016년과 비슷한 수준의 적자(약 6000억원)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지엠은 GM의 글로벌수출기지다. 판매량의 85%가 수출물량이다. 하지만 GM이 유럽, 인도,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주요 시장에서 철수하고 계열사 오펠과 복스홀을 푸조시트로엥그룹(PSA)에 매각하면서 수출물량과 공급처가 사라졌다. 지난해 한국지엠이 유럽에 수출한 물량은 16만 대가 넘는다. 대부분 오펠 등을 통해 판매됐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13년 말 쉐보레 브랜드가 유럽 시장에서 철수한 게 결정타였다”며 “그로 인해 2016년 완성차 수출량(41만6890대)이 전년 대비 10%나 줄었고, 지난해 수출량(39만2170대)도 5.9% 줄었다”고 전했다.
반면 임금은 꾸준히 올랐다. GM이 경영난의 원인으로 꼽은 ‘차는 안 팔리는데 임금 등 비용은 갈수록 늘어나는 구조’다. 지난해 기준 임금 수준은 2002년에 비해 2.5배나 뛰었다. 총 인건비도 2010년에 비해 2015년 기준 50% 이상 늘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기본급 인상률은 3.3~5% 수준, 해마다 성과급도 1000만원 이상 지급됐다. 지난해 임금협상도 기본급 5만원 인상, 성과급 1050만원 수준에서 타결됐다. 그럼에도 파업은 반복됐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파업 없이 지나간 해는 4년에 불과하다.
지난 2월 6일 애널리스트를 상대로 콘퍼런스콜에 나선 메리 바라 GM CEO가 “우리는 한국에서 시장 점유율을 늘렸고 쉐보레 브랜드가 성공했다”며 “현재 비용구조가 문제가 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을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카허 카젬
한국지엠 사장
▶GM의 의도적 부실? 먹튀…
한국지엠 측의 결정에 노조와 정치권은 부실한 경영이 원인이라며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GM이 한국지엠을 상대로 고리대금 장사를 했다” “부품, 제품 거래 과정에서 한국지엠이 손해를 감수하고 GM과 해외 계열사에 이익을 몰아줬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2002년 대우차를 인수한 GM은 당시 4억달러(4332억원)를 투입했다. 이후 2009년 유동성 위기 때 유상증자를 통해 4912억원을 추가 투입했다. GM이 한국지엠에 투입한 자금은 약 9200억원 수준이다. 반면 GM이 한국지엠에서 얻은 수익금은 3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의 감사보고서 등에 따르면 한국지엠의 2012~2016년 누적적자 1조9787억원 중 약 1조5000억원이 GM으로 흘러갔다. GM으로부터 빌려 온 약 3조원의 이자비용으로 약 5000억원을 지급했다. 여기에 GM이 유럽, 러시아, 호주에서 철수하며 발생한 비용부담금이 5085억원, 연구개발비·구매비용 분담금 3730억원, 업무지원비 1297억원 등이 GM에 지급됐다. 즉 한국지엠의 부실에 GM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국지엠의 매출원가율(총매출액 중 매출원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점도 지적 대상이다. 매출원가율은 2009년부터 90%대에 진입했다. 2015년 97%, 2016년 94%를 기록했다.
국내완성차업체의 한 관계자는 “수출이 매출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지엠이 거의 원가에 차를 넘긴 셈”이라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전했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산업은행
“도대체 2대 주주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상황을 몰랐다니 말이 되나.”
한국지엠의 2대 주주(지분율 17%)인 산업은행에 쏟아지는 비난이다. 이에 대해 산업은행은 “GM으로부터 회사 운영에 관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군산공장 폐쇄 결정도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꼴이다. 산업은행은 한국지엠이 2대 주주로 대표이사를 제외한 이사 10명 중 3명을 선임할 수 있다. 공장 이전이나 폐쇄 등 16개 주요 경영사항에 대한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무런 정보 없이 공장 폐쇄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나”란 말이 도는 이유다. 산업은행은 2002년 대우차를 GM에 매각하며 주주감사권을 요구했다. 지난해 3월 이를 통해 한국지엠에 매출원가 등 116개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하지만 GM은 6개를 제외하곤 기밀사항이라며 제출을 거부했다. 2016년에도 한국지엠을 중점관리대상 회사로 지정한 뒤 경영진단 컨설팅 실시, 선제적 모니터링 강화, 소수주주권 강화 등 중점관리방안을 수립했지만 GM의 거부로 공염불에 그쳤다. 2대 주주일 뿐 사실상 경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다.
GM이 가진 한국지엠의 지분은 2002년 10월 출범 당시 15년간 처분이 제한됐다. 산업은행은 한국지엠 총자산의 20%를 넘는 자산의 처분, 양도와 관련된 비토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GM의 지분 처분제한 해제 기한이 만료되며 현재 이 비토권은 사라졌다. GM으로선 지난해 10월 이후 한국지엠 지분을 팔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정부가 한국지엠의 실사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일각에선 “과연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일고 있다. GM이 이미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정부와 산업은행을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때에 정치권도 선택할 수 있는 쾌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며 “이미 칼자루는 GM이 쥐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고 전했다.
산업은행은 한국지엠의 재무실사에 앞서 매출원가 및 이전가격 공개, 본사와의 고금리 불공정거래 의혹 해명, 주주감사권 행사 허용 등 3대 선결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조건을 GM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이런 가운데 한국지엠이 GM에서 빌린 차입금 5억8000만달러의 만기가 오는 2월 말인 것으로 알려졌다. GM은 지난 1월 말, 만기가 된 차입금 중 5120억원을 회수해 갔다.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한국지엠은 현재 운영 자금도 고갈된 상태다. 금융권에선 “GM이 상환을 요구한다면 한국지엠을 살리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란 말도 나온다.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요청한 GM이 과연 만기를 연장해 줄지에 관심이 몰리는 이유다.
국내 완성차업계의 임원은 “군산공장 폐쇄는 GM의 호주 철수 수순과 비슷하다”며 “비단 한국지엠 근로자뿐만 아니라 거래하고 있는 중소업체들도 큰 타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부품공장이 브랜드 한 곳에만 제품을 공급하는 게 아니라 복수 거래처”라며 “자칫 국내 완성차 업계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