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차량 자동출입문 전문업체인 ‘소명’은 지난해 3월 특허를 매각해 50억원을 조달했다. 이들 특허는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별도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소명이 특허를 잃을 우려는 전혀 없다. 현대로템의 2차 협력업체이던 이 회사는 1차 업체와의 불공정계약으로 그동안 개발한 기술을 모두 1차 업체에 넘겨야만 했다. 참고 기다리던 소명은 1차 업체와의 계약이 만료된 2011년 그동안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1차 협력업체로 올라섰다. 지하철부터 고속철도에까지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면서 성능이 아주 뛰어난 출입문 잠금장치를 개발해낸 덕분이다. 그런데 자금이 돌지 않았다. 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회사를 팔라는 제의까지 들어왔다. 은행은 매출 규모가 작고 담보가 부족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때 IP펀드가 이 회사의 특허를 보고 자금을 지원했다. IP펀드가 자금을 넣자 안심한 4개 창업투자회사가 추가로 120억원을 투자했다. 안정적인 자금을 확보한 소명의 매출은 급신장했고 24명이던 직원은 2배 정도로 늘었다. 지금 이 회사는 현대로템이나 코레일은 물론이고 알스톰이나 GE, 봄바디어 같은 다국적 기업들과도 거래를 틀 정도로 기반을 다졌다.
지적재산권, IP 새 자금조달 수단으로 급부상
특허나 상표권 같은 지적재산권(IP)이 중소기업의 새로운 자금조달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외형이 작거나 담보가 없더라도 똘똘한 IP만 갖고 있으면 자금을 지원하는 기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술금융에 비해 자금지원 규모도 크기 때문에 성장기에 들어선 중소기업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유일의 IP 기반 펀드를 운용하는 아이디어브릿지자산운용의 자산은 현재 2100억원 규모에 달한다. 이 회사의 펀드는 KDB산업은행이 단독 출자해 기술 중소기업에 필요 자금을 공급하는 IP펀드와 창업한 지 7년 이내인 소기업에만 투자하는 스타트-업(Start-Up) 펀드 등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운용사 측은 2012년 3월 본인가를 받은 뒤 지금까지 12개 기관 29개 프로젝트에 투자했으며 그중 1개사는 이미 재매매를 통해 청산이 끝났다고 밝혔다. IP펀드의 자금을 지원받은 뒤 단기간에 외국 자금을 유치할 만큼 기업 상황이 호전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IP펀드의 자금 유치는 중소기업의 상황을 개선하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3D입체음향 전문회사인 소닉티어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적자를 내는 신생기업이란 이유로 은행은 물론이고 벤처캐피털로부터도 외면을 당했던 회사다. 그러나 아이디어브릿지자산운용에서 20억원을 조달한 뒤 CGV나 롯데시네마 등에 납품하며 빠르게 회사를 키우고 있다.
대기환경 전문업체인 제이텍은 올해 제네바 국제발명전시회에서 하이브리드형 정전여과집진설비로 금상과 스위스 정부 특별상을 함께 받은 업체. 기술력을 인정받아 올해 IP펀드에서 30억원을 유치해 자동화 생산 공장을 준공하는 등 빠르게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성장단계 기업에 단비 같은 자금
IP펀드는 이처럼 세계적 기술을 개발해놓고 본격적 성장을 위한 투자가 필요한 기업에 단비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온 힘을 쏟아 기술을 개발했어도 매출 실적이나 담보가 부족해 은행을 비롯한 다른 금융기관에서 홀대받던 기업들에 새로운 자금조달 루트가 된 것이다.
국내 유일의 IP투자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아이디어브릿지자산운용의 장석환 대표는 “해외에서도 IP투자가 이뤄지고 있지만 대부분 ‘건 바이 건’으로 개별 사안을 심사해 세부 계약서를 작성해 투자하는 방식”이라며 “아이디어브릿지자산운용처럼 IP기반 거래를 블라인드 풀로 투자하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몇 안 된다”고 밝혔다. IP투자 자체가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대안투자가 됐다는 것이다.
고원석 변리사는 “IP펀드가 투자한 기업들은 대부분 일반 금융기관에선 자금을 조달하기 힘든 신용등급 B 미만이거나 아예 신용등급이 없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새로운 자금조달 루트가 열린 셈이다.
IP를 이용한 자금 조달은 담보가 없는 중소기업들이 지분을 내놓지 않고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매력도 있다. 일반적으로 공장 지을 때 자금 빌리는 것보다 운전자금이나 사세확장용 자금을 조달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담보도 없고 매출도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벤처캐피털이 이런 기업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이용됐으나 지분을 넘겨줘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에 비해 IP펀드를 통한 자금조달은 지분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
IP펀드는 기관들의 새 대안투자 상품
최근 한은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저금리 기조는 상당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은 물론이고 보험사와 상호금융 공제회까지 자산운용에 비상이 걸렸다. 국민연금을 필두로 여러 기관이 대안투자 상품을 찾아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IP펀드가 새로운 대안투자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지만 매달 일정액의 배당이 나오는 데다 만기 때 추가로 상당한 규모의 확정수익까지 기대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IP펀드는 매수한 특허를 대여하고 매달 고정 또는 매출액에 연동한 특허사용료를 받게 때문에 정기적으로 이익 분배가 가능하다. 이 점이 창업투자회사나 조합과 다르다. 운용보수를 빼고 연 6%의 수익을 내는 게 목표다. 3년 정도 트랙레코드가 쌓이면 다른 기관들도 들어올 것이다.”
장석환 대표의 설명이다.
IP펀드 시장은 아직도 형성되는 중이다. 그래도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IP를 유동화하는 2차 시장도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정부는 최근 창조경제 육성을 위한 아이디어를 잇달아 쏟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다는 지금 빠르게 정착하고 있는 IP펀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 필요가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편법증여를 막을 목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워런트 발행 규제만 풀어도 IP거래에 CB나 BW까지 섞어서 다양한 구조로 설계할 수 있어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이 훨씬 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IP펀드 자금조달은 3년짜리 회사채 발행과 같은 성격
“특허나 상표권 같은 IP를 맡기고 3년짜리 채권 발행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IP펀드를 통한 자금조달에 대한 운용사의 설명이다.
IP를 이용한 자금조달은 무형자산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자금조달 수단과 큰 차이가 있다. 회계에서만 잡던 무형자산이 이제 일반 자산처럼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운용사는 특허의 가치와 기업의 신용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IP펀드의 자금을 투자한다. 그렇지만 신용도 자체는 거의 무시할 정도이기 때문에 실제는 특허를 비롯한 IP가 심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운용사가 보는 것은 IP 그 자체가 아니라 그 IP로 창출해낼 미래의 캐시플로다. 매출로 연결될 수 있는 IP라야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고원석 변리사는 “우리가 원하는 특허는 따로 있다. 기업은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우리는 특허가 제품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평가한다. 제품을 보고 캐시플로를 예상해 투자를 한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IP펀드의 투자 구조는 중소기업이 IP를 펀드에 매각하고 펀드가 해당 기업에 그 IP를 배타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인정해 리스(전용실시권 부여)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기업 입장에선 IP를 남에게 빼앗길 염려 없이 일시적으로 대규모 자금을 받은 뒤 IP사용 로열티를 고정 또는 매출액 연동 방식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때 로열티를 포함한 총 비용은 일반 이자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펀드 측은 그게 결코 비싼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은행들은 정책자금조차 담보를 잡고 빌려준다. 그 담보마저 소진된 기업들이 이곳으로 온다. 전체 조달비용(All-in Cost)이 높다지만 다른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빌릴 수 없는 곳들이다. 정상적이라면 IRR(내부수익률)이 적어도 12~13%는 돼야 한다. 저축은행에서 12% 이상을 주더라도 자금을 빌리기 어려운 기업들인데 여기선 한 자리 금리로 빌려준다. 그만큼 합리적이다.”
정책자금 받는 것보다는 비용이 더 들지만 기업의 신용도를 감안하면 절대로 높은 수준은 아니란 얘기다.
게다가 일단 투자가 결정되면 약정기간 동안은 상당히 많은 규모의 자금을 중도상환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기술신용보증기금은 대출 한도가 2억~3억원 정도에 불과한 데 비해 IP펀드는 최소 30억원을 기준으로 지원한다. 이 정도 운전자금을 빌리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우리 자금은 갱신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자금의 안정성을 생각하면 사용료가 결코 높지 않다.”
장 대표의 설명이다.
신용도 낮은 중소기업이 3년 만기 채권을 발행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다. 고원석 변리사는 “키코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중소기업은 CEO 리스크도 있다. 펀드를 운용하면서 노하우를 계속 쌓고 있는데 노하우가 축적되면 지금보다는 좋은 조건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IP펀드는 △IP 매수 후 전용 실시권 부여 △기존에 수익이 발생하던 로열티의 유동화 △문화 콘텐츠 수익권의 유동화 등의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아이디어브릿지자산운용의 5호 펀드의 경우 최근 대히트를 친 영화 ‘명량’에도 투자했다. 이름이 알려진 기업이라면 상표권 유동화가 오히려 수월한 자금조달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IP펀드는 의류 브랜드에도 투자를 하고 있다.
IP 매매를 통한 자금조달에는 통상 3개월 정도 걸린다. 기업 입장에선 그 정도 기간을 잡고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IP펀드 자금을 이용하려면 한국발명진흥회에 의뢰해 IP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여기에만 4~5주가 걸리기 때문이다.
펀드 측은 IP 평가를 의뢰하는 기업들의 경우 딜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다만 기업들이 사전에 특허에 대한 홍보 준비를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많은 기업들이 자기 특허조차 제대로 홍보하지 못한다. 기술과 특허가 상이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을 충분히 감안하고 와야 한다.”
고원석 변리사의 설명이다.
투자자들이 현금흐름 창출 능력을 보기 때문에 조달하는 자금을 매출 확장용이나 충원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거래성사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부채상환용이라면 재미없다는 것.
자금지원이 결정돼도 실제 계약을 체결하기까지는 또 시간이 걸린다. 산업이나 기업의 규모, CEO의 성격까지 모두 다르기에 계약서를 아주 꼼꼼히 작성한다.
이 때문에 긴급자금이 필요한 기업이라면 지분투자를 이용하는 게 좋다고 했다. IP투자보다 지분투자가 훨씬 신속하게 결정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