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D램 생산의 절반이, NAND 플래시의 3분의 2가, 태블릿 디스플레이 공급의 70%가 갑자기 시장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것은 재앙이다 ….”
미국 IT 관련 시장조사 전문업체인 IHS의 D램 담당자인 마이크 하워드 이사가 글로벌 전자산업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낸 리포트의 첫 대목이다.
그의 말대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 과거 전성기를 넘어 세계가 주시해야 할 만큼 영향력을 갖게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급을 중단하면 전 세계에서 하루 수백만 대씩 쏟아져 나오는 휴대폰 라인이 당장 멈추게 된다. 컴퓨터에 들어갈 메모리를 절반으로 줄여야 하고, 자칫 자동차 생산마저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세계 전자산업의 공급체인이 일순간 마비될 만큼 두 회사의 위상이 커졌다는 얘기다.
‘한국의 생산 중단은 글로벌 전자산업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쇼킹한 제목의 리포트를 통해 하워드 이사는 “한국은 지금 글로벌 전자산업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iSuppli와 IMS 리서치, 디스플레이 뱅크, 스크린 다이제스트 등을 산하에 두고 IT부문 시장조사와 전망을 하고 있는 IHS가 이런 리포트를 냈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의 선도적 기업들조차 한국 두 회사의 행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두 메모리 거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012년 기준으로 이미 D램 시장의 66%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NAND 플래시 시장의 48%를 점유하고 있다”고 언급한 하워드 이사는 두 회사가 북한과 3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천과 화성에 공장을 두고 있다는 점까지 예로 들었다. 지금도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회사들에 어떤 이유에서든 생산차질이 생긴다면 세계 전자업계가 충격을 받게 될 것이란 설명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메모리 시장서 확실한 1, 2위
IHS가 공개적으로 두 회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만큼 지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전자산업의 핵심 자리를 확고히 구축하고 있다. 미국의 유수 언론들조차 D램을 비롯한 메모리 반도체를 언급할 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먼저 거명한 뒤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를 다룰 정도가 됐다.
실제로 D램만 보면 올해 1분기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37%로 1위이고 그 뒤를 28%인 SK하이닉스가 잇고 있으니 당연한 셈이다. 일본의 엘피다를 인수한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27%의 점유율로 3위를 하고 있는데 당분간 이 구도는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안정적 부품공급을 원하는 글로벌 IT기업들이 특정 업체만 밀어주기보다 세 회사에서 고르게 주문을 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 회사의 점유율이 92%를 넘어 다른 어느 회사도 감히 이 부문에 새로 진출하거나 투자를 늘릴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상태다. IBM조차 최근 뉴욕 칩 공장을 정리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접을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두 회사가 마침내 오랜 치킨게임을 끝내고 승자로 군림하게 됐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도 최근 “(마이크론의) 엘피다 인수로 칩메이커들이 새로운 공장 건설을 제한하게 됐고, 반도체 산업의 생산은 세 회사로 줄어들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그리고 마이크론이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점유율 3위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공격적으로 투자를 늘리지 않을 것이란 점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양강 체제를 굳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D램 투자를 축소하고 NAND 부문 투자를 늘리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한국 반도체산업은 확고한 ‘투톱 체제’로 세계를 선도하게 됐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약 571억달러로 전체 수출품목 중 1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10.2%의 수출 점유율로 대표적 효자산업이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낮아졌던 반도체의 전체 수출액 대비 점유율도 상승하는 추세다. 2009년 8.5%까지 떨어졌던 반도체의 수출비중은 2012년 9.2%를 거쳐 지난해엔 10.2%로 상승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생산 제품의 92%를 해외에 판매하고 있어 국내 대표적인 수출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
D램 시장 당분간 경쟁 적을 것
D램 반도체시장엔 이들 3사 외에도 대만의 난야를 비롯해 윈본드 파워칩 등 9개의 군소업체들이 더 있지만 사실상 경쟁력은 아주 취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난야의 매출액조차 삼성전자의 10분의 1 수준이고 윈본드의 매출액은 그것의 절반도 안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유율 3위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비용구조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IHS의 하워드 이사는 “SK하이닉스의 경우 삼성전자만큼 경쟁력이 있고 공격적인 비용구조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종합할 때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양강으로 선도하는 가운데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나머지 부분을 충당하는 구조가 상당히 오랜 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군소업체 비중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상위 반도체 3사가 과거처럼 생존을 다투는 경쟁을 하려기보다는 시장의 파이를 키우면서 원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정도의 투자를 이어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 5년 정도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이들이 수익성 추구에 주력할 것으로 보는 대목이다. 시장조사업체인 리서치&마켓은 지난 7월 15일 자료를 통해 2019년까지 글로벌 D램 시장이 연평균 4%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업계의 흐름은 한국 반도체 관련업체에도 호재가 될 수 있다.
반도체 장비업계의 한 전문가는 “아직 고가의 장비는 여전히 해외 업체가 주도하고 있으나, 국내 업체들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함께 인프라를 강화시키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SK그룹에 편입 후 투자 강화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선두주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은 SK그룹으로 합류하면서 투자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이닉스가 SK그룹으로 합류될 당시인 2011년은 2000년대 후반부터 이어오던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이 막바지에 달했던 때다. IHS iSuppli에 따르면 2011년 1분기 세계 D램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39.3%로 압도적 1위를 유지했고 이어 하이닉스가 23.0%로 2위, 일본 엘피다가 13.5%로 3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13.0%로 4위였으며 그 뒤로 대만의 난야를 비롯한 군소업체들이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앞서 한때 시장점유율 3위를 차지했던 독일의 키몬다(전 인피니온)는 2009년 초 부도를 내고 2010년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상태에서 2011년 11월 하이닉스 인수계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3월 정식으로 그룹의 일원으로 출범시킨 SK그룹은 유럽 재정위기 여파로 글로벌 경기가 불투명해 대부분 업체들이 투자를 축소하는 상황에서 그해 전년 대비 10% 늘어난 3조8500억원 상당의 시설 투자를 단행했다. 그러자 경쟁력이 떨어지는 엘피다는 더 이상 추격할 의지를 상실하고 마이크론테크놀로지로 회사를 넘겼고 SK하이닉스는 치킨게임의 최후 승자로 2위 자리를 굳혔다.
2011년까지만 해도 마이크론과 엘피다의 매출을 합하면 하이닉스 매출보다 많았다. 그러나 올해 1분기 SK하이닉스는 28%의 점유율로 마이크론테크놀로지를 확실히 눌렀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17일 기준 36조8802억원의 시가총액으로 삼성전자 현대차에 이어 국내 3위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SK그룹 편입 2년 만에 그룹 계열사 중 가장 많은 영업이익을 내는 핵심 기업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위상 강화를 위한 SK하이닉스의 투자는 계속되고 있다. 우선 R&D 역량을 높이기 위해 여러 업체를 인수했다. 2012년 6월 이탈리아 ‘아이디어플래시’를 인수해 유럽 기술센터로 전환했고, 미국의 컨트롤러 업체인 LAMD(현재 SK hynix memory solutions Inc.)를 인수해 낸드 솔루션의 역량 강화에 나섰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낸드부문 치킨게임에 대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들어서도 5월에 미국 바이올린메모리의 PCIe 카드 사업부문을 인수하고, 6월엔 소프텍 벨라루스의 펌웨어 사업부를 인수하는 등 낸드 플래시 솔루션 분야 기술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
더불어 라이선스 계약도 다양하게 체결하고 있다.
2012년 IBM과 차세대 메모리 제품인 PC램(Phase Change Random Access Memory, 상변화 메모리) 공동개발 및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 PC램 시장 주도권 확보에 다가섰고, 지난해 6월엔 미국 램버스와 포괄적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 경영 리스크도 줄였다.
세계 반도체 최대 시장인 중국의 고사양 카메라용 CIS 사업도 강화하고 있다. 회사 측은 지난해 화웨이, ZTE 등 중국지역 고객을 비롯해 칩셋 업체 및 모듈하우스 등 100여 사를 초청해 ‘CIS Showcase 2013’ 행사를 열어 자사의 핵심 CIS기술과 제품을 소개한 바 있다.
리더십도 보강했다. 2013년 회사 내 최고기술자인 박성욱 CTO를 CEO로 선임한 데 이어 오세용 서울대 융합대학원 교수와 이석희 KAIST 교수를 각각 제조/기술부문장과 미래기술연구원장으로 영입한 게 단적인 사례다.
SK하이닉스 올해도 사상 최대 실적 올릴 듯
SK하이닉스는 창립 30주년이던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을 뿐 아니라 세계 반도체 업계 메모리 부문 2위 자리도 굳혔다. 특히 인텔 등 종합반도체제조업체나 팹리스 업체까지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순위에서도 2011년 8위에서 지난해엔 5위로 3단계를 뛰어 올랐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강화된 기술력과 글로벌 위상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종합 반도체 회사로 도약한다는 게 이 회사의 방침이다. 이 회사는 지난 4월 세계 최초로 초당 17GB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128GB DDR4 메모리 모듈을 개발해 IT업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울러 주주가치 향상을 위해 경쟁력 있는 제품믹스와 원가경쟁력을 기반으로 수익성 중심의 경영도 지속해서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회사 측은 특히 모바일 시장 규모가 커지는 것에 맞춰 모바일용 반도체 생산에 집중해 지난해 올렸던 사상 최대실적을 경신할 계획이다. 신규 스마트 기기가 출시되고, 중국의 모바일 시장이 성수기에 진입하면서 모바일 D램 수요가 커졌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특히 LTE 네트워크 확대로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대폭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이에 따라 회사 측은 20나노 중반급 공정기술을 모바일 D램에도 확대 적용해 원가와 기술경쟁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부가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 반도체 생산에 집중해 SSD(Solid State Drive) 등 낸드플래시 솔루션 제품으로 하반기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란 얘기다.
회사 측은 올 하반기엔 기업용 SSD 상업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 제품은 소비자용 SSD보다 부가가치가 높아 수익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더해 TLC(Triple Level Cell)나 3D 낸드플래시 제품을 연내 개발해 샘플 공급을 시작하는 등 기술력을 꾸준히 강화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한편 하반기부터 이천공장 노후 시설을 교체하기 위한 신규 팹(FAB) 건설을 진행할 계획이다. 2015년까지 1조8000억원을 투자하는 신규 팹이 완공되면 SK하이닉스는 새로운 면모를 갖춰 또 한 번의 도약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연구개발비로 1조1440억원을 쏟아부어 연간 기준 최초로 1조원이 넘는 R&D 투자를 했던 SK하이닉스는 올해도 미세공정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3D 낸드플래시와 PC램, Re램, STT-M램 등 차세대 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3D 낸드플래시는 시장성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올해나 2015년에 양산할 계획이다. PC램은 IBM과, Re램은 HP와, STT-M램은 도시바와 각각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고 공동개발을 진행 중이다.
애널리스트들 호평 러시
시장에선 이처럼 탄탄한 실적을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SK하이닉스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김영찬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2013년 D램 업계 통합 이후 과점 3사(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실적 안정성 및 가시성은 매우 높아졌다”면서 “하반기에도 애플 신제품 효과와 중국 LTE 시장 확대에 따른 대당 모바일 D램 탑재량 증가, UHD TV 수요 증가 등으로 D램 수급은 매우 타이트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는 SK하이닉스가 올해 연간 기준으로는 사상 최대인 4조600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했다.
황민성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SK하이닉스의 영업이 호조를 보이면서 재무구조가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회사가) 꾸준한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부채를 갚으며 이자비용을 줄이는 재무구조 개선을 진행 중”이라는 그는 “지속되는 호황으로 인한 재무구조 개선과 비용 절감 등 회사의 전략과 이후 주주환원에 대한 기대감이 주가를 이끌 것”으로 전망했다.
서원석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SK하이닉스의 2Q 실적은 원·달러 환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이전 전망 수준을 유지하고, 하반기 및 2015년 실적은 큰 폭으로 개선될 전망”이라며 특히 올해 들어 D램 시장의 양호한 전망에 따라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주가가 급상승한 점을 감안할 때 SK하이닉스의 상대적 밸류에이션 매력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내년 D램시장 점유율도 SK 하이닉스 29%, 마이크론테크놀로지 26%로 올해보다 SK하이닉스의 비중이 더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