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아침, 산업부 기자들의 시선이 삼성에 쏠린다. 수요일 아침마다 삼성그룹 ‘수요 사장단 회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요일에는 유독 새벽부터 삼성그룹 기자실이 붐빈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기다리는 기자들도 부지기수다.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 관심을 갖는 것이 어찌 기자들뿐이겠는가.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부사장급 이하 모든 삼성의 임직원들도 관심이 많다. 매주 사장단 회의를 하는 그룹이 국내에서는 삼성이 유일하기에 여타 재벌그룹 고위직은 물론 삼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많은 글로벌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연간 회의가 열리는 날은 45일 안팎이다. 1년 52주 중 신년하례회가 있는 1월 첫째 주와 여름 휴가기간, 그리고 휴일과 겹치는 날을 제외한 날짜다. 회의는 아침 8시부터 삼성전자 서초사옥 39층 강당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아침에는 수원 기흥 아산 등 삼성전자를 비롯한 각 계열사 사업장이 있는 각지에서 올라온 검은 에쿠스 차량이 서초사옥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삼성그룹에서 사장 직함을 갖고 있는 인사와 계열사 CEO가 참석 대상이다. 여타 계열사는 사장이 1~2명이지만 삼성전자는 대표이사 뿐 아니라 각 사업부장을 사장이 맡고 있는 경우가 있어 참석 대상이 많다. 그룹 미래전략실 팀장들도 사장이기 때문에 참석한다. 모두 50명이다. 해외 출장 등으로 불가피하게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부사장의 대리참석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은 참석한 사례가 없으며 자녀인 이재용 부회장과 이부진 사장은 2010년 잠시 참석한 적이 있으나 그 이후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올해 사장으로 승진한 이서현 사장도 참석하지 않고 있다.
회의 시간은 1시간이다. 처음 40분은 외부 초청 강사의 강의를 듣는 시간이다. 남은 20분은 질의응답 시간을 갖거나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주재로 일부 사장들이 간단히 현안을 브리핑할 때도 있다. 회의 시작 전에 일찍 도착한 사장들이 간단한 스탠딩 티타임을 가지며 계열사 간에 필요한 협업과 전략을 논의하기도 한다.
강의 주제를 정하고 강사를 섭외하는 일은 미래전략실 전략1팀에서 맡고 있다. 삼성그룹이 직면한 경영 현안은 물론이고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이슈에서부터 역사 문화 예술 건강 에티켓 등 교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주제가 될 수 있다. 초청 강사 역시 교수가 다수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벤처기업 사장, 언론인, 정치인, 작가, 연예인, 스포츠맨 등 분야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매년 12월에는 한 주를 택해 사장단 회의를 마치고 ‘쪽방촌’ 봉사활동에 나선다. 2004년부터 10년간 이어온 전통이다.
이처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는 의사결정기구가 아니다. 그렇다고 경영 현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외부 인사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 대한 교양을 쌓는 것에 무게가 실려 있다.
삼성의 사장들이 매주 수요일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고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부터다. 그러다가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가 불거지자 ‘급한 불’을 끄기도 바쁜데 사장들이 매주 모여야 하느냐는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전통을 지키자는 주장이 더 컸고 이 때문에 공식 명칭을 ‘수요회’로 붙이면서 정례화 했다. 지금과 같은 진행방식은 2000년부터 채택됐다.
그리고 2008년 4월. 특검 조사로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략기획실이 해체됐다. 기존에 공식적인 의사결정 기능을 하며 이른바 9인회로 불렸던 전략기획위원회가 수요회와 통합됐다. 그래서 6년을 이어온 것이 오늘의 ‘수요 사장단 회의’다.
작년 11월 삼성 사장단이 서울역에서 이웃사랑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모습
사장단 회의가 의사 결정이나 경영 현안과 무관하다고는 하지만 현안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삼성이 안고 있는 과제와도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삼성그룹 수요 사장단 회의의 주제를 보면 국내외 현안과 삼성의 전략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다. 삼성그룹은 올해를 가장 큰 위기로 보고 있다. 1등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으며 성장했던 삼성이 이제는 1등으로서 새 길을 찾아야 하는 숙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다시 ‘마하경영’을 이야기하며 모든 것을 다 새롭게 혁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때문에 올해 들어서는 유독 혁신에 관한 강의가 많다.
지난 2월 12일 장세진 카이스트 교수는 ‘다시 전략이다’를 주제로 삼성의 사장단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과감하게 추진하라고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2등에게 추월당할 수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1월 22일에는 김형철 연세대 교수가 ‘변화와 혁신의 리더십’을 주제로 강의하며 이건희 회장이 던진 숙제를 재차 상기시켰다.
지난 3월 5일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창의성과 경제학’을 주제로 창조경제의 맥을 짚었고 지난 2월 19일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불황, 저성장기의 역발상’을 주제로 삼성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1월 15일에는 전원책 자유경제원장이 ‘아날로그와 인간적 감성의 필요성’을 강의했다. 디지털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을 향해 ‘아날로그’를 요구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검토하라는 이건희 회장의 주문과 일맥상통한다. 지난해 불산 유출 사고와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1월 29일에는 백재봉 삼성안전환경소장으로부터 ‘그룹안전환경 추진 전략’에 대해 들었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국제 정세도 무시할 수 없는 현안이다. 지난 1월 8일 올해 첫 사장단 회의 강연은 전재성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맡았다. 주제는 ‘동북아 정세 변화와 한국의 외교 전략’이었다.
이어도를 사이에 놓고 방공식별구역 선정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이 기싸움을 벌일 때였기에 향후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가 국가경제는 물론이고 기업경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다. 2월 5일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이 ‘최근 북한의 정세 변화와 전망’을 강의한 것은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는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접근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이뤄졌다.
3월 12일 박병원 전국은행연합회장의 ‘한국경제의 진로’ 강연은 채용을 많이 하는 기업이 재계 순위의 앞에 서야 한다는 내용으로 최근 불거진 삼성의 채용방식 변경 논란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2월 26일에는 우정아 포스텍 교수가 ‘세상을 바꾼 그림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해에는 1월 9일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2013년 대한민국 어젠다’를 시작으로 12월 18일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의 ‘긍정의 저력’에 이르기까지 총 45번의 사장단 회의 강연이 있었다.
주제는 경영이 11회, 문화 7회, 사회 6회, 국제 5회, 정치 4회, 역사 4회, 환경 3회, 신기술 3회, 건강 2회 등이었다. 그러나 경영 분야라고 해도 정치 사회 역사 문화와 떼어 놓을 수 없는 내용이 많았고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분야라 하더라도 소통 인재발탁 능력개발 국제정세 등 기업경영과 무관하지 않은 것들이어서 굳이 분류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
지난해에는 특히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첫 해여서 박 대통령이 역설한 창조경제와 통섭형 인재와 관련한 강연이 많았다. 재·보궐 선거로 정치권이 요동치던 4월에는 고성국 정치평론가가 ‘한국 정치의 이해’를 주제로 강의했고 경제민주화 입법 논란이 한창이던 7월에는 ‘삼성 저격수’로 불리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초청해 ‘경제민주화와 삼성’을 주제로 쓴소리를 들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했을 때는 김영수 서강대 교수로부터 ‘북한 동향 및 남북 관계 전망’을 들었다. 상반기에는 중국, 하반기에는 일본이 강의 주제로 부상한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의 경우 45회 강의 중 25명의 교수가 사장단회의 강의를 맡았다. 세계적인 석학인 케빈 켈러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도 강연자로 나서 ‘세계적인 수준의 브랜드 만들기’를 주제로 강의했다.
기업인 중에서는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과 이석우 카카오 사장이 있었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도 정기영 사장과 김은환 상무가 강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