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는 하루에 최장 8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9시에 출근한다면 6시 이후 근무는 연장근로가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공짜 야근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야근 때문에 병에 걸렸다 불평한다면 부당해고 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야근시계로 근무시간을 기록해두면 이메일 등에 퇴근시간과 위치, 아이피 주소, 사진 등이 저장되어 법적인 증빙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앱 ‘야근시계’ 설명서 中
한국은 일을 많이 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국가다. 2010년 OECD회원국 가운데 한국의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단연 1위를 기록했다.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사회적 요구로 주5일제를 시행해 2012년에는 2092시간으로 100시간 이상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2317시간), 칠레(2102시간)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반면 임금수준은 낮은 편이다.
2012년 발표된 ‘한국 고용의 현주소: OECD 국가와 주요 고용지표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근로시간은 주요 선진국 가운데 가장 길지만 임금은 중간 수준에 불과하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근 근로자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온 기업들 중 일부가 노동생산성을 이유로 근무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임금수준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얄밉지 않을 수 없다.
GPS·사진·IP정보 통해 야근기록 저장
수면 위로 드러난 수치 외에 업무량 혹은 상명하복식 권위적 문화 등으로 측정되지 않는 자의적(?) 야근시간을 정확히 추산한다면 노동시간은 더욱 늘어난다. 점차 개선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회사들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고 회사별로 야근 시간도 일부만 올릴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야근기록 역시 고용자가 일방적으로 쥐고 있어 근로자 입장에서는 정확한 야근시간을 입증해 연장근로수당을 받기란 쉽지 않다. 부당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동부에 진정을 할 경우 행여나 받을 수 있는 불이익도 각오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많은 사용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는 앱이 등장했다.
2012년 IT산업노조가 개발한 ‘야근시계’는 근로자의 출퇴근 기록과 함께 GPS위치, IP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앱이다. 업무를 마치고 앱의 ‘퇴근’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연장근무시간을 기록하고 퇴근 전 근무지에서 사진을 찍어 저장할 수도 있다. IT산업노조 측은 “노동부 진정절차나 소송을 제기해 회사 측 출퇴근 기록을 제출하면 간단하게 수당을 받을 수 있지만 증거를 가진 회사가 자료를 내줄 확률은 0%에 가깝다”며 “야근시계는 개인이 스스로 출퇴근 기록은 객관적으로 저장해 법적 증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앱을 통해 저장된 연장근무기록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되며 이메일, 페이스북, 트위터 자동전송기능이 있어 조작가능성을 줄였다. 야근시계 앱은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앱 출시 이후에도 과연 기록이 법적 입증 자료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주장이 엇갈렸다. 그러다 최근 야근시계를 통한 기록이 연장근로의 증거자료로 인정할 수 있다는 최초의 판례가 나왔다.
지난 1월 심창섭 서울중앙지법 민사6단독 판사는 근로자 2인이 홈플러스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연장근무수당)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안은 자세히 살펴보면 홈플러스에 근무하는 A씨(34)와 B씨(36)는 한 달에 20일 정도 1~2시간씩 연장근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출퇴근 기록 시스템이 없는 홈플러스 근무자들은 연장근무수당을 받기 위해서 사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A씨와 B씨는 연장근무신청을 포기하는 회사 분위기상 사전 신청이 어렵다고 판단해 야근시계를 통해 연장근무기록을 차곡차곡 저장했다. 이들은 약 5개월간 기록을 바탕으로 3년여 간의 야근수당(1인당 약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취지로 이승한 홈플러스 대표와 회사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홈플러스 측은 “연장근로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사전에 연장근로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들은 하지 않았다”면서 수당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사건을 맡은 심창섭 서울중앙지법 민사6단독 판사는 “사용자가 싫어하기 때문에 연장근로 신청을 포기하는 분위기가 있는 직장이라면, 연장근로에 대한 승인을 얻지 않았거나 연장근로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실제로 연장근로를 한 시간에 대해 그에 상당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퇴근시간이 30분 이내로 늦어졌다면 퇴근준비시간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연장근무로 볼 수 없고 이른 출근의 경우 회사 측의 승인이나 요구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3년치가 아닌 앱으로 기록한 5개월치의 연장근로가 인정된다며 홈플러스 측에 133만원과 92만원을 각각 A씨와 B씨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앱을 통한 연장근무기록이 법적 증빙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사용자가 원치 않더라도 근무환경에 따라 정당한 야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의미 있는 판례라 할 수 있다. 한 IT산업노조 관계자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기업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무임금 부당노동의 야근을 강요하는 관행을 개선하길 바란다”면서 한껏 고무된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홈플러스 측은 항소한 상태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을 맡은 강문대 변호사는 “(홈플러스 측이) 지급해야 하는 액수가 청구금액보다 상당히 적게 인정돼 항소를 포기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선례를 남기기 꺼리는 것으로 보인다”며 “1심 판결이 상급심에서 그대로 인정되면 향후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에 홈플러스 측은 1심 판결과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이 있어 항소하게 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