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C그룹 양재동 통합사옥엔 ‘이노베이션 랩(Innovation Lab)’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부서가 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조직이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K씨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가 무섭게 천연 발효종(천연 이스트를 밀가루와 물에 섞어 빵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발효한 반죽)을 배양하러 달려간다. 그를 비롯해 이 회사 르방(발효종)빵 담당 연구원 모두가 매일같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자칫 배양 관리를 소홀히 했다가 어렵게 발견한 천연 발효종을 잃게 되면 큰일이다.
발효가 제대로 되는지 확인한 연구원들은 이후 자유로운 분위기의 부서 회의를 통해 각자가 낸 제품개발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이 과정을 통해 신제품의 트렌드와 기존 제품의 개선점 등을 확인한다. 회의가 끝나면 배합실로 달려가 각자 개발 중인 제품의 최적 원재료 배합비율을 찾아낸다.
배합은 빵 개발의 초기 단계 작업이지만 빵의 맛이나 향, 색상 등 전반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라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만큼 연구원들은 긴장한 채 생각을 다듬는다.
배합을 끝낸 연구원들은 실험실로 이동해 저마다 머릿속에 그린 제품을 형상화한다. 제품에 들어갈 원재료를 챙기고 ‘가장 이상적인 비율’로 배합한 반죽으로 원하는 모양의 빵을 만든다. 제품에 따라 자연 발효를 시키기도 하고 발효 장비에 넣은 뒤 빵이 원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이때 발효가 덜 돼도 안되지만 너무 진행돼도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당연히 연구원들은 오래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점심시간에도 누군가는 자리를 지키고 빵이 제대로 발효되는지 살핀다. 식사는 잠깐씩 교대로 한다. 오죽했으면 K씨는 “이곳에선 빵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람이 빵을 기다린다”고 했다.
발효가 제대로 됐다고 판단되면 저마다 적합한 오븐을 선택해 빵을 구워낸다. 사무실이 구수한 빵 냄새로 가득 차면 코는 한없는 행복에 젖어든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연구원들에겐 다시 긴장의 시간이 돌아온다. 각자의 작품을 놓고 심사를 받아야 한다. 품평회엔 임원부터 신입사원까지 모두 참석한다. 상품기획이나 프로모션 부서의 담당자들도 온다. 그러나 분위기는 자유롭다. 신입사원이 선배의 작품을 평가하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잘 된 것은 격려하고 개선할 부분을 알려주면서 서로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자리이다.
여기서 호평을 받은 제품은 경영진에게 보고하고 상품화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치면 시험 생산에 들어간다. 그런데 연구소서 만드는 것과 공장 생산라인에서 대규모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 때문에 다양한 부서의 전문가들이 모여 의견을 조율하고 실제 생산에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한다.
이노베이션 랩에선 이런 식으로 한 달에 500개 이상의 신제품을 개발한다. 하지만 이런 단계를 모두 거쳐 실제 상품화돼 파리크라상이나 파리바게뜨 매장으로 나가는 제품은 50여 개 정도에 불과하다. 마지막 과정에서 소비자 모니터링 패널인 ‘쎄앙스(Seance)’의 의견도 반영된다. 그만큼 소비자에겐 엄선된 제품만 전해진다. 이노베이션 랩 연구원들이 빵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키운다’고 하는 것도 그래서다.
K씨는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연구개발해 출시한 제품을 매장에서 만날 때의 감정은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다”고 밝혔다.
혁신적인 빵 속속 출시
지난 4월 SPC그룹의 파리바게뜨 브랜드는 업계 최초로 ‘무설탕 식빵’을 내놨다. 이 제품은 빵 발효에 꼭 필요한 요소로 알려진 설탕은 물론이고 일체의 당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대히트를 쳤다. 출시한 지 한 달 만에 30만 개가 팔려나갔을 정도다. ‘무설탕 식빵’ 개발에 성공한 SPC그룹은 설탕 없이 빵 만드는 ‘무당(無糖) 식빵 제조방법’으로 특허까지 출원했다.
오늘의 SPC그룹은 이런 핵심 제품이 수없이 쌓여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각 계열사별로 나뉘어져 있던 연구개발 조직을 통합해 이뤄진 ‘이노베이션 랩’은 지금 SPC그룹에서 핵심 부서로 대접을 받고 있다. 외부 취재는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할 정도로 보안도 철저하다. 게다가 양재동 신규사옥의 18개 층 가운데 5개 층을 사용할 만큼 위상이 막강하다.
SPC그룹이 이노베이션 랩을 비롯한 연구개발에 올해 투자할 비용은 500억원에 달한다. 매달 500개 정도의 신제품 중 50개 안팎의 빵이 최종적으로 상품화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빵 하나를 개발하는 데 1억원 가까운 자금이 투입되는 셈이다.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핵심 역량이 R&D 투자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에서 7월 말 기준 157개 파리바게뜨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SPC그룹은 2020년까지 세계 제일의 제과제빵 기업이 된다는 야심찬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한편 SPC는 자체 연구개발과는 별도로 외부기관과 공동으로 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와 공동으로 체지방 감량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CLA 함량을 높인 ‘요거트플러스’와 ‘CLA우유식빵’ 등 혁신제품들을 잇달아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SPC는 지난 2011년 자본금 전액을 출자해 서울대와 합작법인 ‘㈜에스앤에스데어리’를 설립한 바 있다.
한편 SPC그룹은 올해 초 서울 신대방동 SPC미래창조연수원에서 사내대학인 SPC식품과학대학의 ‘2013년 신입생 입학식 및 학위수여식’을 올린 바 있다. 올해 처음 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SPC식품과학대학은 지난 2010년 8월 식품분야 최초로 설립돼 제빵분야의 실무역량을 갖춘 핵심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SPC그룹 관계자는 “제빵 본업에 집중하면서 식품의 본질인 맛을 끊임없이 혁신해 글로벌 경쟁력을 키운다는 게 회사의 방침이다”라며 “최근 그룹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상미당 정신’ 캠페인도 품질에 대한 허영인 회장의 확고한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