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풍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크고 작은 갤러리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했다. 곳곳에 자리한 빈티지숍에 들어서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유니크한 패션 아이템이 가득 차 쇼핑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 거리를 거니는 패션 피플들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불과 3년 전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누릴 수 있었던 즐거움들이었지만 이제는 과거형이 됐다. 기존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들어섰던 자리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아기자기했던 편집숍은 대형 SPA브랜드 매장이 대신하고 있다.
가로수길에 들어선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은 투썸플러스, 할리스커피, 코코브루니, 탐앤탐스 등이며 스타벅스는 200m를 사이에 두고 2곳을 운영하고 있다.
대형 SPA매장으로는 스페인 브랜드 ‘자라(ZARA)’와 미국 브랜드 ‘포에버 21’, 자라의 모기업인 인디텍스 그룹이 운영하는 ‘마시모두띠’, 디자이너 30명이 만든 SPA브랜드 ‘스마일마켓’ 이 자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제일모직의 ‘에잇세컨즈(8seconds)’, ‘스파이시칼라’, 스웨덴의 ‘H&M’이 가세했다. 가로수길이 600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임을 감안하면 대형 커피전문점과 SPA브랜드가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정된 점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형국이 되자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가로수길에 자리한 한 부동산 관계자는 “SPA브랜드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1년 전과 비교해 임대료는 평균 40% 이상 올랐다”며 “대형 매장의 경우 권리금도 평균 4억~5억원 정도로 형성돼 있고 건물주들 역시 높은 임대료를 제시하는 대형법인을 선호해 개인사업자들로서는 버티기 힘들어 졌다”고 밝혔다.
가로수길에 자리했던 많은 카페와 로드숍들은 그대로 사라지거나 가로수길과 연결된 ‘세로수길’로 향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쫓겨난 그들이 택한 곳은 메인 거리 뒤편의 세로수길이나 뒤편의 골목길 등이다. 세로수길은 음식점들이 많아 패션상권으로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에 최근에는 세로수길 옆 조그마한 골목길에 매장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그나마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고 가로수길 특유의 분위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가로수길 점포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세로수길이 대형사들의 새로운 타깃이 되고 있다. 골목골목 리모델링을 마친 건물 외벽에는 ‘SPA 입주자 모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세로수길에서 보세의류숍을 운영 중인 김민정 씨(34)는 “이 지역 임대료가 계속 오르고 있다”면서 “계약 만료가 다가오는 몇몇 개인점주들은 일찌감치 다른 지역에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밝혔다.
특색 잃은 가로수길 압구정 로데오 ‘데자뷰’
거리가 유명세를 타고 대형매장이 들어서면서 쇼핑 인파와 관광객이 증가해 가로수길은 특유의 여유로운 정취도 잃었다.
주말이면 거리 중앙의 좁은 2차선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한다. 좁은 인도에 인파가 넘쳐 편하게 걷기 힘들 정도다. 인도에 교묘하게 걸쳐놓은 불법 주차 차량이 있는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한줄로 질서정연하게 통과하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었다.
활기를 띄는 상권에 상인들과 대형 SPA사들은 미소 짓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점차 ‘패셔너블(Fashionable)’함을 잃어가고 있는 가로수길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저마다 화려하게 꾸며진 건물 외관에 비해 SPA매장 내부에는 비슷비슷한 옷들이 들어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SPA브랜드를 접하고자 하는 소비자는 명동을 향하는 편이 낫다. 내 집 앞에도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을 찾기 위해 가로수길을 찾을 리도 만무하다.
거리 전체에 사람들을 끌어들인 고유의 콘텐츠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1세대 편집숍인 플로우를 비롯해 몇몇 상점은 청담동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대료 탓도 있지만 기존의 트렌디하던 고객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졌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나마 예전 정취를 이어가고 있는 세로수길마저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과 SPA브랜드가 들어선다면 특징 없는 평범한 거리로 퇴색될 가능성이 크다. 대형 브랜드 점포들이 들어서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패션과 소비를 이끌었던 압구정 로데오가 몰락한 과거가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