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문대에 다니는 정씨(27)는 요즘 수업과 학원을 병행하느라 눈코 뜰새 없다. 군 복무를 작년 말 마치고 올해 3학년으로 복학한 정씨는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토익과 중국어 점수를 확보하기 위해 올해 초 어학원부터 등록했다. 스펙을 쌓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사회봉사활동이나 인턴십 경험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취업 준비생들이 소위 ‘스펙 쌓기’에 열중하면서 사회진출 시기가 늦어지는 현상이 불거지고 있다. 대기업 입사를 흔히 ‘바늘구멍 뚫기’라고 표현하지만 화려한 스펙을 수년간 쌓아야 들어갈 수 있는 관문은 아니다. 대기업들의 채용 문화와 기조가 달라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스펙 쌓기의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학점과 자격증, 고득점 점수로 치장한 스펙보다는 문제해결 능력과 열정, 본인만의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기업들이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지방대 이공계 여성 인력 늘려
치열한 공채 경쟁을 뚫고 지난해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아연 씨(가명). 지방 소재 C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당당하게 삼성전자 직원이 된 그는 모 사업부의 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이씨와 같은 인력들이 최근 삼성에서 새로운 돌풍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방대 이공계 출신 여성 인력’을 뜻하는 소위 ‘이·지·녀’(理·地·女) 강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것. 삼성전자, 전기, SDI 등 삼성 주력 계열사의 이지녀 채용 규모는 최근 1~2년 새 2배로 껑충 뛰었다. 삼성 대졸 공채 인원이 2011~2012년 9000명씩으로 똑같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지녀의 약진이다.
삼성그룹은 지난해부터 ‘지방대 비중 35% 이상’을 채용 가이드라인으로 정한 이후 지방대 입사자가 최근 부쩍 늘었다. 지난해 하반기 삼성 대졸 공채로 입사한 4500명 중 1600명(약 36%)이 지방대 출신이다. 종전까지 지방대 채용 비중이 25~27%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려 10%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여성 인력 비중도 과거 20%대에서 30% 초반으로 증가했다. 거기다 삼성전자 디스플레이 전기 SDI 등 전자 계열사들의 이공계 비중이 평균 80%에 달한다.
삼성 관계자는 “지난해 삼성전자 공채 관문을 통과한 대졸 사원의 90%가 이공계다. 이 중 지방대 여성 인력이 10%”라고 설명했다.
삼성SDI는 지난해 하반기 실시한 대졸 공채에서 지방대가 약 35%이고 이 중 이공계 출신 여성이 3분의 1가량을 차지했다. 이지녀 비중이 전체 대졸 입사자의 10%에 달한 것이다. 매해 200~300명의 대졸자를 공개 채용하는 삼성전기도 이지녀의 입사 숫자가 최근 1년 새 2배로 증가했다.
이지녀의 급부상은 단순히 삼성그룹의 채용 정책이 달라진 데만 있는 건 아니다. 조직 내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하는 선배 이지녀들이 좋은 평판을 쌓아올리고 있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A차장은 개발팀에 입사했다가 영업과 해외 마케팅을 두루 거친 이지녀의 차세대 주자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한번 주어진 일은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며 “특유의 친화력과 업무 추진력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삼성전기 입사 5년차인 ‘이지녀’ M대리는 남녀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 열혈 영업 엔지니어다. 신입사원 때부터 늘 두꺼운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시장, 고객사, 기술 정보를 꼼꼼히 메모하고 숙지한다. 밤새워 영업 자료를 읽고 점심시간에는 사내 영어회화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부서에서는 오락부장 역할로 분위기를 띄운다.
삼성의 신(新)채용문화는 통섭형 인재 육성을 위한 SCSA(삼성 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 프로그램 도입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문계 전공자를 선발해 자체 기술교육을 실시한 뒤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채용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올해는 삼성전자와 삼성SDS를 중심으로 200명을 선발하고 점차 규모를 넓힐 방침이다. 이들은 SCSA에서 6개월간 960시간의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고, 모든 과정을 수료하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입사하게 된다. 인문계 출신들에게 소프트웨어 전문지식을 접목해 스티브 잡스와 같은 하이브리드 인재로 키우겠다는 의중이 깔려 있다. 이 같은 채용 형태에 대해 지원자들도 적극 호응하고 있다. 삼성SDS에서만 수천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관계자는 “인문학적 소양과 이공계 지식을 함께 갖춘 인재풀을 두루 갖출 때 창의와 혁신 문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은 올해 대졸 신입사원 9000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전체 채용 인원 중 5%를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에서 우선적으로 뽑고 35% 이상을 지방대 출신으로 채울 방침이다.
SK, 스펙보다 끼와 열정
SK도 스펙보다는 일 잘하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채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SK는 기존의 채용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젊은이들의 끼와 열정, 도전 정신만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바이킹 챌린지’ 프로그램을 실시한다고 지난 3월 밝혔다. ‘바이킹 챌린지’ 프로그램은 기존의 채용방식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채용프로그램으로 지원자들의 학력과 외국어 점수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의 6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개인 오디션 형태의 예선을 통과한 지원자들이 별도의 합숙을 통한 미션 수행능력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파격적인 채용 방식이다. SK 관계자는 “자기 분야에서 넘치는 끼와 열정으로 과감하게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인재를 ‘바이킹(Viking)형’ 인재로 정의했다. 이들 바이킹형 인재를 핵심 글로벌사업과 신성장사업을 견인하는 인재로 키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바이킹 챌린지’ 프로그램에 최종 합격한 지원자는 올 상반기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인턴십 결과에 따라 내년에 공채사원들과 함께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조돈현 SK 인재육성위원회 기업문화팀장은 “글로벌 성장시대에서는 다양성과 능력 중심의 인재 확보가 절실하다. 바이킹형 인재들은 SK의 글로벌 성장과 신규 사업 추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며 신입사원의 10~15%를 바이킹형 인재로 선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SK는 이와 함께 지방대 출신 채용을 올 들어 한층 확대하기로 했다. SK는 대졸 신입사원 중 30%를 지방대 출신으로 선발하겠다고 밝혔다. SK텔레콤이 지난 2011년 지방대 출신을 30% 이상 선발하기로 한 적은 있었으나 그룹 차원에서 이 같은 규모를 제시한 것은 처음이다. 열린 고용과 인턴십 채용 기조도 이어나간다. 한때 SK는 명문대 출신들로 북적댄다는 기업 이미지가 강했는데 하이브리드형 조직을 갖추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직원들의 다양성을 높이고 있다.
현대자동차도 단순한 스펙용 이력을 환영하지 않는다. 서류전형 과정에서 학점, 영어점수, 해외연수 등에 크게 방점을 두지 않는 분위기다. 이 보다는 자신의 전문성과 관심 분야, 창의적 마인드를 드러낼 수 있는 자기소개서를 잘 만드는 게 좋다. 아울러 현대차는 지방대 출신 직원들을 현대차 잡페어 행사에 배치하고 지방대 인재들을 서울 행사장에 데려오는 등 인재를 널리 구하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두산은 DBS라고 하는 자체 테스트를 중시하고 있다.
두산이 원하는 인재상에 걸맞는지 체크하는 온라인 시험으로 지원자의 인성과 역량을 두루 묻는다. 인턴십 제도도 적극 활용된다. 인턴십을 통해 실제로 조직에 잘 융합하는지, 적극성과 창의력을 갖췄는지를 살펴본다.
KT, 영어 학점 자격제한 없애
KT는 올해 상반기 신입사원 공채에서 영어, 학과, 학점 등 자격제한을 폐지하고 자기소개서만으로 서류전형 합격자를 가린다고 밝혔다. 또한 서류만으로는 경험과 끼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지원자들을 위해 4월 초 KT 광화문사옥 올레스퀘어에서 현장 면접 형태의 ‘올레 스타 오디션’도 진행했다. 올해 7월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는 KT는 신입사원 150명, 인턴사원 150명 등 모두 300명을 채용할 방침이다.
김상효 KT 인재경영실장은 “학력과 배경에 관계없이 능력을 갖춘 참신한 인재를 채용할 방침이며 실무 현장에 대한 열정과 준비된 자세를 갖춘 인재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최근 137개 기업 인사 담당자에게 채용 기준을 물어본 결과 70.8%가 책임감과 성실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애사심과 입사 의지(12.4%), 커뮤니케이션 능력(5.1%), 팀워크와 협동 능력(5.1%), 창의성(3.7%), 글로벌 역량(2.9%)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책임감과 성실성은 면접 태도를 통해 우선적으로 평가하고 끈기 있게 성취한 결과와 경험(59.1%), 전 직장의 근무 기간(35.8%), 면접 준비 수준(32.8%), 자기소개서(26.3%) 등을 두루 참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의 달라진 채용 풍속도는 해외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진부한 이력서에 고개 돌리던 채용 담당자들이 소셜네트워크에 채용공고를 올리고 인재를 기다리는 새로운 채용 풍속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기업들이 구직자들의 이력서를 140자로 정리하거나 6초짜리 동영상으로 담아 트위터에 게재하는 방식을 요구하는 것. 미국 보스턴에 있는 네트워크 업체인 엔트라시스는 올 2월 트위터를 통해서만 지원자를 받았다. 본인의 트위터 팔로어가 1000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