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규모 약 256조원에 계열사만 81개사.
재계 서열 1위인 삼성그룹의 현주소다. 그러나 삼성의 시작은 미미했다. 지방의 작은 청과물 도매상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후 농산물 무역업을 시작했고, 서서히 덩치를 키워 반세기 만에 대한민국 대표 재벌그룹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을 일궈낸 이는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다. 경남 의령의 작은 마을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청과물 도매상으로 출발해 무역업체인 삼성상회를 통해 부를 쌓았고, 해방 이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을 통해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엄청난 기업을 키워낸 이병철 회장이지만, 가족 혼사에 대해서는 의외로 담백했다. 부인인 고 박두을 여사와의 3남 4녀를 포함해 4남 6녀, 총 10남매를 뒀지만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와 법무장관을 지낸 고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등을 제외하고는 유력 가문과의 사돈을 맺은 경우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문과 통혼만으로도 재벌가는 물론, 정·관계의 유력가문들과 곧바로 연결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소박해 보이지만 속은 꽉 찬 알짜배기 혼사를 치른 셈이다. 재계 최고의 명문가인 삼성가의 혼사를 살펴봤다.
LG·중앙일보와 연결되는 2세 혼맥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경주이씨 문중의 부친 찬우 씨와 안동권씨 문중의 모친 재림 씨 사이에서 1910년 태어났다.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병철 회장은 16세가 되던 1926년 집안 소개로 부인인 순천박씨 문중의 박두을 여사와 결혼했다. 박 여사는 이병철 회장과의 사이에 3남 4녀를 두었다.
이병철 회장의 자녀 중 가장 먼저 결혼한 이는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다. 이인희 고문은 강북삼성제일병원 이사장인 조운해 씨와 결혼했다. 조운해 씨는 경상북도 일대의 대지주였던 조범석 씨의 자제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뒤 일본까지 유학을 다녀왔던 엘리트 출신이다.
장남인 이맹희 전 한국비료 사장은 1958년 손영기 씨의 딸 복남 씨와 결혼했다. 손영기 씨는 경기도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관료 출신으로, 농림부 재직 당시 이병철 회장과 사돈을 맺었다. 이후 1961년 삼성그룹 계열사인 안국화재(현 삼성화재)의 사장을 맡아 일하다 1976년 타계했다.
차남인 고 이창희 씨는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시절에 만난 일본 아이치현 출신의 나카네 히로미 씨와 결혼했다. 이영자 여사는 결혼 23년 만인 1986년 현재의 이름인 ‘이영자’ 씨로 개명했다. 그녀의 부친은 일본 미쓰이물산의 중역이었던 나카네 쇼지 씨다.
창희 씨는 ‘한국비료 사건’으로 그룹을 떠난 뒤 1973년 설립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와 1977년 특수세라믹사를 통합한 새한미디어(새한그룹)를 일으키며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병으로 1991년 별세했다.
이병철 회장의 2녀인 숙희 씨는 결혼 당시부터 재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다. LG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3남 구자학(현 아워홈그룹 회장)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구인회 회장은 형제들과 자녀들을 유력가문으로 출가시켜 재계 혼맥의 본산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3녀인 순희 씨는 1963년 23세의 나이로 김규 씨와 결혼했다. 김규 씨는 전 서강대 교수다. 순희 씨와 김규 씨는 가정불화를 이유로 1986년 이혼했지만, 7년 뒤인 1993년에 재결합했다.
이병철 회장이 가장 애틋하게 여긴 4녀 덕희 씨는 경북 의령 일대 대지주인 이정재 씨의 아들 이종기 씨와 결혼했다. 이종기 씨는 중앙일보, 제일제당 부회장을 거쳐 삼성화재 회장으로 은퇴했으며, 2006년 타계했다.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은 3남 이건희 회장은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인 라희(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씨와 결혼했다. 이병철 회장은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추천으로 홍진기 전 회장을 만났다고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에 합류한 홍진기 전 회장은 1965년에는 라디오서울(동양방송의 전신)을 개국하며 경영을 맡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의 결혼은 홍 여사가 대학을 갓 졸업했던 1967년 4월에 치러졌다.
재계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처가인 홍진기 전 회장 가문을 유력가문으로 꼽는다. 삼성그룹은 물론 범현대가와도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다. 또 며느리들의 집안을 통해 대통령 및 정계 유력인사들과도 이어진다. 특히 홍진기 전 회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과도 각별한 인연을 자랑한다. 홍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18년이란 세월 동안 경영수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홍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헌법-상법-주식회사법-역사-프랑스어-정치-상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들을 물려준 것으로 전해진다.
5녀 명희 씨는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 및 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 씨의 차남 재은 씨와 결혼했다. 재은 씨는 경기고,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로 현재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이병철 회장이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4남 태휘 씨와 6녀 혜자 씨는 모두 일본인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건희 회장은 부인 홍라희 여사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처럼 이건희 현 회장의 혼맥도 소박하다. 차녀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을 동아일보 가문에 시집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돈가문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삼성가 3세 혼맥은 굉장히 화려했다가 평범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1998년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장녀인 세령 씨와 혼인했지만 결혼 11년 만인 2009년 두 사람의 이혼조정 소식이 전해지면서 결국 파경을 맞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유력 가문과 혼사를 했던 오빠와 달리 장녀 부진 씨는 평범한 회사원과의 결혼을 택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당시 봉사활동에서 자주 마주치던 임우재(현 삼성전기 부사장) 씨에게 호감을 느꼈고 열애 끝에 결혼했다. 임우재 부사장은 1999년 결혼 후 미국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수료한 후 삼성전기에 입사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차녀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아버지처럼 언론가로 시집갔다. 고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차남인 재열 씨와 결혼한 것. 재열 씨는 현재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중 한곳인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을 맡고 있다. 이서현 부사장과 김재열 사장의 결혼을 통해 삼성그룹은 대한민국 명문가들과 곧바로 연결된다. 김재열 사장의 형인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는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딸과 결혼했으며, 사촌 간인 삼양사그룹을 통해서도 유력 가문들과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세 경영 시대는 시기상조
삼성그룹은 이제 막 3세 경영의 신호탄을 쐈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재용 씨를 지난 12월 5일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면서 3세 경영을 위한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분을 이미 확보한 상태이다.
일각에서는 3세들의 계열분리 가능성을 점치고 있지만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사령탑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형제간 계열분리였다. 1987년 12월 1일 그룹 사장단의 추대로 회장직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1991년 11월 신세계백화점과 전주제지를 그룹 계열사에서 분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를 통해 전주제지는 이병철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 고문이, 신세계백화점은 5녀인 명희 씨가 지분을 넘겨받아 독자경영의 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