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해가 떠올랐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승승장구한 상사(임원)들의 출근길이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시기다. 하지만 당당함 뒤에 남모를 고민도 똬리를 틀고 있다. 한 HR컨설턴트는 “직장생활의 별을 딴 초보임원에게 현시점은 뻥 뚫린 고속도로와 비포장도로 중 어느 한 길을 가야하는 기로”라며 “어느 곳으로 드라이빙 할지는 사내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했다.
지난해 말 퇴직한 한 중견기업 임원은 “처음엔 상사와의 관계에 공들이기 마련이지만 부하 직원과의 관계가 연임과 승진을 결정짓는다”며 “결국은 리더십에서 승부가 난다”고 충고했다.
상사와 부하 직원과의 관계가 직장생활의 화두가 되는 시기. 결 국은 리더십이다. 특히 올해는 지난 대선 당시 양 후보의 리더십 공방이 회자되며 사내 가십이 늘었다. 이른바 소통과 통합, 경청의 리더십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마음에 안 드는 직장 상사 오지로 보낼까?
사내 구성원들과의 소통 이전에 과연 부하 직원들이 꼽은 어글리 상사는 어떤 유형일까. 지난 연말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 코리아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올해 남은 연차 사용’에 대해 실시한 설문조사를 살펴보면 대략적인 분위기를 짚어볼 수 있다.
직장 상사를 여행 보내버리고 싶을 때는 ‘괜히 트집 잡고 화풀이 할 때’가 25%로 가장 많았다. ‘과다한 업무 및 모호한 지시’(21%) ‘언제나 항상’(14%) ‘잔소리 할 때’(12%) ‘눈치 보여서 못살 때’(10%) 등이 뒤를 이었다. 기타 답변으로는 ‘휴가 중 전화할 때’ ‘결재를 자꾸 반려할 때’ ‘(일이 남았는데)혼자 도망갈 때’ ‘아는 내용을 자꾸 말할 때’ 등이었다.
이처럼 스트레스의 진원지인 상사를 보내버리고 싶은 여행지로는 ‘사막, 북극, 남극 등 먼 오지’라는 응답이 25%, ‘해외’(17%) ‘아프리카’(16%) ‘무인도’(15%) ‘어디든 멀리(10.0%)’ 등 대체로 멀고 험한 곳으로 보내버리고 싶다는 응답이 이어졌다.
직장 상사가 여행을 떠나기를 바라는 기간은 ‘한 달 이상 장기간’이 51%로 가장 높게 나와 상사가 장기간 자리 비우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기업 전무로 근무했던 한 퇴직 임원은 “훌륭한 임원은 성과는 성과대로 내고 CEO,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 부하 직원에게 공정하게 채찍과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며 “정의는 내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완벽한 임원은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만큼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방증이다. 특히 “부하 직원들과의 소통과 운영에 있어 부장 시절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임원은 도태된다”고 덧붙였다.
경영 전문가들은 흔히 부장을 관리자, 임원을 리더로 규정한다. 관리자는 ‘Doing Things Right’ 해야 하고, 리더는 ‘Doing the Right Things’ 해야 한다는 의미다. 관리자는 기획과 예산 내에서 일을 관리하지만 리더는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며 사람을 관리한다. 이렇듯 분명한 역할 구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단명할 수밖에 없다.
Coaching 1. 난 주인공 넌 병풍
2년 전 대기업 부장으로 근무하다 중소기업 CEO로 자리를 옮긴 A대표는 부임 후 한 달간의 기억만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붉어진다. 대학졸업 후 공채로 대기업에 입사한 A대표는 단 한 번의 이직 없이 부장까지 올라섰다. 사내에서 주목받는 임원 후보군이었지만 집안일로 급하게 목돈이 들게 되자 퇴직금을 생각할 만큼 마음이 급해졌다. 때마침 사정을 들은 하청업체 오너가 그에게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CEO 자리를 제의했다. 첫 출근 날, A대표는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앞으로의 미래와 비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첫날 돈독했던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문제는 3주 후에 감지됐다. 딴에는 비즈니스를 위해 옛 직장 상사와 후배들을 만나 점심식사와 저녁 회식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이사와 부장, 차장급 직원들을 대동했다. 점심식사는 늘 두어 시간을 넘겼고 회식 자리는 밤 12시가 돼야 끝났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퇴직 직전까지 사내 네트워크가 확실하던 A대표는 하청업체 CEO로 자리를 옮겼지만 갑을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A대표는 화장실에서 듣게 된 부하 직원들의 대화에 머리가 섰다.
“회사에 갑을 모시고 또 갑을 만나러 가는 것 같아.”
“어제도 혹시 형님 동생이었나. 대화에 끼질 못하니까 내내 좌불안석이야.”
“그러게 굳이 없어도 될 자리에 낀 병풍이지 뭐.”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늘 갑의 입장이던 A대표는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비즈니스 미팅에는 늘 직원을 앞세웠다. A대표는 그 이후 늘 ‘가족 다음엔 내 회사 직원’이란 말을 되뇌며 출근한다.
Coaching 2. 아니, 그게 아니라~
중견기업에서 마케팅 담당 상무로 근무 중인 B상무는 직원들 사이에서 ‘아니라 백작’으로 불린다. 눈코 뜰 새 없이 기획안이 이어지는 마케팅 부서에 B상무가 부임했을 때만 해도 훤칠한 외모에 깔끔한 패션이 늘 부서 내 관심거리였다.
이른바 사내 인기남으로 통했던 B상무의 호감도는 그러나 석 달 만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중소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서너 번의 이직 경력을 갖고 있는 B상무는 때마다 깔끔한 일 처리와 세심한 동료애에 후한 점수를 받았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땐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고, 일이 굼뜬 직원들의 일까지 자신이 직접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당연히 사내 신망이 높았다. 이직 시 평판조회에서도 이러한 신망이 반영됐다. B상무의 깔끔함과 세심함은 임원이 돼서도 여전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발생했다.
부임 후 직원들의 기안을 꼼꼼히 살펴보던 B상무는 일일이 고쳐야 할 부분을 체크하고 직원들을 불러들였다. 상무의 호출이 ‘두 번은 기본 세 번은 애교’란 말이 돌자 부서 분위기가 다운됐다. 별명은 회의시간에 그의 말버릇에서 비롯됐다. 마라톤 회의에 직원들의 프레젠테이션을 뚝뚝 끊는 “아니, 그게 아니라~”란 코멘트가 이어지자 자연스럽게 아수라 백작이 아닌 ‘아니라 백작’이 등장했다. 아니라 백작은 마케팅 부서 회식 때도 간혹 등장한다. 이번엔 직원들이 툭 던지는 회식 농담에서다. B상무는 아직도 회식 때 “~아니라”란 말에 왜들 직원들이 웃어대는지 이유를 모른다.
Coaching 3. 넌 내 걱정, 난 네 걱정
지난해 초 IT기업 이사로 재직하던 C이사는 당시 선배의 충고만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40대 중반의 기술개발 이사였던 그는 직급이 오르자 개발보다 비즈니스와 사내정치에 발을 들이게 됐다. 대기업이 아닌 이상 퇴직 후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되도록 오랫동안 남아 있겠다는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마케팅 팀을 도와 비즈니스 미팅을 다녔고 임원과 CEO가 있는 자리라면 휴일도 마다않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앞서가는 IT기술이 문제였다. 기술개발 이사가 말이 안 통한다는 소문은 발 없이도 만리를 갔다. 오랜만에 업계 선배를 만났을 땐 분위기는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게 그렇게 빠릿하던 친구가 멍해졌다는 소문이 도는 거야. 어딜 쫓아 다니길래 업무가 뒷전이야? 어떻게 아냐고. 이 좁은 업계에서 입 한번 뻥긋하면 쫙 퍼지는 거 몰라서 그러나. 당신 부서 직원 중 절반이 우리 회사 직원들과 동기동창이란 거 몰라? 걔네들이 오랜만에 한잔하면서 당신 걱정을 했다더구만. C이사 저렇게 쏘다니다 앞날 콱 막힌다고. 애들 교육비에 아파트 대출에 막을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연구실 대신 사장 꽁무니만 졸졸 따라 다닌다고. 우리가 처음 임원 되고서 부하 직원들 술안주 삼아 했던 얘기 기억나나.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일안 하고 머리 굴린다고 걱정했잖아. 그 반대 상황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야지. 그들 눈에는 자네나 내 앞날이 걱정일 수도 있잖아. 직원들 눈에 임원 앞날이 보이면 끝인 거 모르겠나?”
C이사는 현재 1년 째 헤드헌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Coaching 4.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대기업에 재직 중인 D부장은 지난 연말 인사 시즌에서 제대로 미끄러졌다. 마침 임원 승진 케이스여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기가 먼저 치고 올라섰다.
아쉬움도 잠시, D부장은 학교 선배 E이사와 만난 자리에서 인사 이유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된 게 직원들이 하나 같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건가.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다니길래 성공한 프로젝트도 D부장 때문에 실패할 뻔했다는 투서가 올라오냐고. 당신 이번에 승진이 아니라 지방으로 발령 날 걸 그동안 기여도를 생각해서 일단 묶어놨어. 제대로 해!”
D부장은 지난여름 진행했던 계약 건이 떠올랐다. 직접 프레젠테이션에 나섰다가 수치 계산을 잘못해 팀원이 급히 바통을 이어받았던 일, 직원들이 올린 기획안을 꼼꼼히 챙긴다며 미팅 막판에 가서야 오케이 사인을 냈던 일 등등 자신이 했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머리에 펼쳐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E이사의 충고가 이어졌다.
“임원이 되는 건 별 따는 거라지 않나. 생각해 보게 별 따기가 쉬운가. 임원이 되겠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동료, 부하 직원과 관계부터 제대로 세우겠다고 생각해야지. 잘못이 있으면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게. 나 때문에 수많은 팀원이 시간과 역량을 소비했다면 마땅히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과하면 권위가 떨어진다? 자네 생각엔 임원이 종신직 같은가?”
Coaching 5. 네 점수는 50점? 난 100점!
F상무는 중견기업 오너의 먼 친척이다. 서울 명문대를 졸업하고 공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집안 행사에 나갔다가 친척 어르신의 프러포즈를 받고 적을 옮겼다. 공사 동료들은 왜 철밥통을 발로 걷어차느냐며 만류했지만 F상무는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단 생각에 주저 없이 사표를 던졌다.
상무로 부임한 그는 그동안 공사에서 했던 업무에 직원 관리를 더해 영역을 넓혔다. 비즈니스 현장은 늘 전쟁터라더니 공사와는 다른 분위기가 처음엔 놀라웠지만 적응이 어렵진 않았다. 게다가 임원이 되고 보니 자신을 대하는 부하 직원들의 태도부터 달라져 있었다.
늘 깍듯한 G, H부장은 언제 어디서건 극진했다. 6개월 후 연말 인사평가 시즌에서 F상무는 붉어진 얼굴을 들 수 없었다.
6개월 동안 왼팔과 오른팔이 된 G, H부장에게 후한 인사고가를 준 후 오너에게 불려갔던 것. I사장은 여타 임원들의 인사평가를 공개하며 그에게 충고했다.
“F상무가 100점이라던 두 사람을 다른 임원들은 50점 밖에 안줬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매번 그들과 함께 다닌 자네가 그들의 장단점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임원은 객관적인 기준을 세워 직원들을 연초부터 평가해야 하네. 학연, 지연 이런 거 필요 없어. 자네가 혈연이라고 내가 마냥 두고 볼 것 같은가. 임원의 자의적인 인사평가는 조직의 운명을 바꾸는 범죄행위라는 걸 명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