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표적인 호남재벌로 불린다. 고 박인천 창업주가 지난 1946년 포드 택시 2대로 전남 광주에서 택시회사를 세운 후, 지금까지 66년 동안 호남 최고 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다. 그러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혼맥은 ‘전국구’ 스타일이다. 영남권 명문가와의 혼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박 창업주가 최고의 며느리를 찾기 위해 영남의 명문가를 일일이 찾아다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혼맥은 영남권과 이어져 있다. 여기에 아버지인 박 창업주와 함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초석을 마련했던 장남 고 박성용 명예회장은 재계에서는 보기 드문 국제결혼을 해 눈길을 끈다.
그래서일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호사가들 사이에서 ‘재계 혼맥의 허브’로 불릴 정도다. 2·3세들을 통해 LG그룹과 대림그룹, 대상그룹, 동국제강그룹 등과 직접 사돈을 맺고 있으며, 한 다리만 건너면 일진그룹, 태광그룹, 두산그룹과도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택시 2대로 가업을 일으켜 호남 최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 자녀들의 혼사에 각별하게 신경 썼던 박인천 회장의 사돈들을 살펴봤다.
며느릿감 직접 찾아나서
박인천 창업주는 1901년 전남 나주군 죽포면 동산부락 신기마을에서 태어났다. 빈농에서 태어났던 박 회장은 15세가 돼서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7세에 나주공립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많은 나이에 학교에 간 탓일까. 이내 보통학교를 그만 둔 박 창업주는 19세부터 장사에 나섰다. 하지만 손대는 사업마다 손해만 입어 극심한 실의에 빠졌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오사카의 산업시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뒤 곧바로 국내로 귀국, 일본 순사시험에 합격했고 1929년에는 보통문관시험(지금의 행정고시)에도 통과했다. 박 창업주와 평생을 함께 했고, 지금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있기까지 헌신적인 내조를 해왔던 고 이순정 여사와도 이 무렵 만났다.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곧바로 전남 영광 출신의 이 여사와 결혼했다. 이후 박 창업주와 이 여사는 평생을 함께 하며 광주택시를 창업한 것은 물론, 5남3녀의 자녀들을 반듯하게 키워냈다.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2세대 오너들이 바로 그들이다. 박 창업주는 생전에 자녀들의 혼사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돈될 집을 직접 방문해 혼사를 제의할 정도였다. 직접 며느릿감을 보고 사돈될 집을 찾아간 셈이다. 그래서인지 금호아시아나그룹 2세들의 혼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관료는 물론 금융권과 재계의 명망가들이 박 창업주와 사돈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창업주의 장남인 박성용 명예회장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국제결혼을 했다. 성용 씨는 미국 예일대 유학시절에 만난 마거릿 클라크 여사와 연애 결혼했다. 이 때문에 박 창업주는 장남인 성용 씨를 한동안 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차녀인 박강자 금호미술관장의 결혼식 때 미국을 방문했다가 장손녀를 안고 있는 클라크 여사를 보고 맏며느리로 받아들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화려한 혼맥은 박 창업주의 맏딸인 박경애 씨부터 시작된다.
경애 씨는 경상도 출신 제헌의원인 배태성 씨의 장남 영환 씨에게 시집갔다. 배영환 씨는 현재 삼화고속 회장으로 경영활동 중이다. 경제학자 출신의 신중한 CEO로 불렸던 형 성용 씨와 달리 ‘불도저’란 별명을 가졌던 고 박정구 회장은 경상북도 안동 국회의원을 지낸 김익기 전 국회의원의 딸인 김형일 씨와 결혼했다. 김익기 전 의원은 해태그룹 창업주인 고 박병규 씨의 아들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을 사위로 맞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해태그룹이 김익기 전 의원을 통해 동서 관계로 이어진 셈이다. 금호미술관장인 박 창업주의 차녀 강자 씨는 광주 출신 박사인 강대균 대한전자재료 회장과 결혼했다.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이끌고 있는 3남 박삼구 회장은 한국은행과 산업은행, 재무부장관을 지낸 부산 출신 이정환 씨의 차녀 이경열 씨와 혼인했다. 삼구 씨의 장인인 이정환 전 장관은 금호석유화학 회장을 지내며 금호아시아나그룹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결혼은 이정환 전 장관이 산업은행 총재로 근무할 당시 박 창업주가 직접 제의해 이뤄졌다. 4남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경남 마산 출신인 위창남 전 광주투자금융 사장의 차녀인 진영 씨를 배필로 맞았다. 박 창업주의 3녀인 박현주 상암커뮤니케이션 부회장은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전남을 대표하는 금호아시아나그룹과 함께 조미료 재벌로 불리던 전북의 대상그룹(당시 미원그룹)이 사돈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창업주는 막내아들인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의 혼사에는 관여하지 못했다. 종구 씨의 결혼 전에 타계했기 때문이다. 종구 씨는 평안북도 용천 출신의 이명선 전 삼흥복장 사장의 장녀인 계옥 씨와 결혼했다.
3세들 혼맥도 화려해
혼맥의 허브로 불리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세대를 넘어 3세대에 와서 화려함을 더욱 꽃피운다. 재계 최고의 혼맥으로 불리는 LG그룹과 사돈을 맺은 것은 물론 일진그룹과 동국제강그룹, 구 대우그룹 등과도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서다.
먼저 박성용 명예회장의 장남인 재영 씨는 구자훈 LIG그룹 전 회장의 3녀인 문정 씨와 결혼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LG그룹이 혼사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눈에 띄는 점은 재영 씨의 장인인 구자훈 회장이 박성용 회장처럼 국제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구 회장은 화교 출신인 임방인 여사와 결혼했으며, 슬하의 세 딸 중 문정 씨 외에 두 딸 모두 외국인과 결혼했다.
차남인 정구 씨는 슬하의 세 딸을 모두 재벌가문으로 시집보냈다. 외아들인 철완 씨는 아직 미혼이다. 정구 씨의 장녀인 은형 씨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차남 김선협 포천 아도니스CC 대표와 결혼했다. 차녀인 은경 씨는 동국제강 가문의 방계인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의 둘째 며느리가 됐다. 은경 씨의 남편은 장세홍 한국철강 대표다. 3녀인 은혜 씨는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차남 허재명 일진머티리얼 대표와 결혼했다.
3남 박삼구 회장의 사돈들은 의외로 소박하다. 장남인 세창 씨(금호타이어 부사장)는 2003년 평범한 김현정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장녀인 세진 씨는 최성욱 변호사(김앤장법률사무소)에게 시집갔다.
4남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역시 1남1녀를 뒀는데 아직 둘 다 미혼이다. 장남인 박준경 씨는 금호석유화학 상무보로 일하고 있으며, 딸 박주형 씨는 공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호남 재벌가끼리의 통혼으로 관심을 모았던 임창욱-박현주 씨 부부는 슬하에 딸만 둘이다. 이 중 맏딸인 임세령 대상HS 대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씨(삼성전자 사장)와 1998년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2010년 합의 이혼했다. 현주 씨의 차녀인 임상민 씨는 아직 미혼이며, 최근 유학을 마친 뒤 대상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경영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5남 종구씨는 고위 관료 지낸 출신의 학자다. 그는 아주대 교수로 지내다 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기획재정부 정부개혁실 공공관리단 단장을 맡으며 관료생활을 시작한 후 고 노무현 대통령 집권 때는 2003년에는 국무조정실 경제조정관과 정책차장을 지냈다. 이후 현정부에서는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을 역임한 후 2009년 아주대에 복귀했다가 현재는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부인인 이계옥 여사와의 사이에 건호, 도윤 씨 등 1남1녀를 두고 있다. 한편 금호아시아나그룹 설립 초기 활약을 했던 박 창업주의 동생인 고 박동복 금호전기 회장은 LG그룹과의 관계가 눈에 띈다. 동복 씨는 강세원 전 희성금속 대표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강세원 씨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인이었다는 점이다. 강세원 씨는 딸 영혜 씨를 구본능 회장에게 시집보냈는데, 199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떴다. 고 강영혜씨는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양자로 입적돼 LG그룹 장손이 된 구광모 LG전자 차장의 어머니다.
65세룰 형제경영 승계와 금호의 분리
화려한 혼맥 외에도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재계에서는 보기 드문 ‘형제경영’으로 주목받았다. 형제경영의 큰 틀은 고 박인천 창업주가 세웠다. 재계에서는 박 창업주가 굳이 후계구도 원칙을 세운 것에 대해 자신이 겪었던 형제들과의 경영권 분쟁이 자녀대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박 창업주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설립 초기였던 광주여객 시절, 동생인 박동복 씨와 장조카인 박상구 부산저축은행 창업주와 함께 회사를 일으켰지만, 1979년 동복 씨와 상구 씨가 삼양타이어를 놓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3년간 경영권 분쟁을 겪은 바 있다.
박 창업주가 세웠던 후계구도 원칙은 △여러 사람이 관여하면 분란이 생기기 쉬우므로 남자에게만 상속하고 △당시 학생이었던 막내인 종구씨를 제외한 4형제 합의 경영 형태로 회장을 선임하고 △주요 사안에 대해 4자 합의가 우선이지만 합의가 안 되면 다수결에 따르고 △다수결도 안 되면 손윗사람이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에 1984년 금호아시아나그룹 총수에 취임한 고 박성용 명예회장은 제2민항 선정 등 그룹의 규모를 키운 뒤 1996년에 손아래 동생인 정구 씨에게 경영권을 물려줬다. 정구 씨는 2002년 폐암으로 급작스레 세상을 뜨면서 3남인 박삼구 현 회장이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전 두 회장이 65세에 회장직을 물려주게 돼 ‘65세 룰’이란 전통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재계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불렸던 ‘65세 룰’은 지난 2009년 ‘형제의 난’으로 불리는 금호석유화학 지분 매입 경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깨졌다.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 등 무리한 M&A에 나섰던 박삼구 회장에 반발한 동생 찬구 씨가 금호석유화학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형제 간 분쟁이 일어난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형제의 갈등은 결국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분리를 가져왔다. 박찬구 회장이 금호석유화학의 경영권을 갖고 독립했다. 최근에는 금호석유화학이 아예 금호사옥에서 나오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