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주부 A씨(33)는 아침식사 준비 등 분주한 아침시간을 보낸 후 일일아침드라마를 시청한다. 극에 집중하던 A씨는 여주인공이 마시던 다이어트 음료에 주목했다. 극중 홈쇼핑 모델인 여주인공이 헬스클럽에서 “요새 살이 쪄서 마시는 것 하나까지 신경 쓰고 있어”라는 대사와 함께 음료를 마신다. 마침 운동을 시작한 A씨인지라 효과가 좋을까 싶어 바로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다. 오전 11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향한다. 장소는 얼마 전에 종영된 주말드라마에 등장했던 프랜차이즈 업체. 입구부터 드라마 장면과 함께 ‘장동건과 김하늘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장소’라는 문구가 적힌 입간판이 맞이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헬스클럽을 찾은 A씨는 러닝머신 위에서 TV를 시청한다. 일일드라마에서 모녀지간이 대화를 하던 와중 딸이 약을 꺼내 어머니에 권한다. “갱년기 여성에 상당히 좋은 약이래요. 드셔보세요”라는 친절한 약효 설명이 끝나자 약상자가 클로즈업 된다. 제품을 확인한 A씨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나 운동이 끝난 후 바로 약국으로 향한다.
‘갑툭튀’ 들어 보셨나요
PPL이 안방극장을 점령해나가고 있다. 드라마 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와 옷은 기본이고 마시는 음료, 거실에 놓여진 가방, 직업, 이름까지 PPL에 활용되고 있다. 방송광고에 비해 훨씬 저렴한 PPL이 효과는 ‘짭짤’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기업들은 너나할 것 없이 PPL에 뛰어들고 있다. 시장이 커지는 만큼 방송사와 제작사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지만 시청자들의 불쾌지수 역시 높아지고 있다.
특히 흐름과 상관없이 노출되는 PPL은 공해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이러한 PPL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광고’, 일명 ‘갑툭튀’로 불리며 비판받고 있다.
‘갑툭튀’의 사례는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발견되고 점차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다. 긴장감이 더해지는 장면 사이에 갑자기 특정제품이 맥락 없이 클로즈업 되는 것은 물론이고 진지한 장면에서 주인공이 특정 가전제품의 기능을 설명하며 칭찬하는 등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을 넘어 혐오감을 주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유령>에서 수사대원 유강미(이연희 분)가 동료 변상우(임지규 분)로부터 화장품 선물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더 아름다워 지세요”라는 대사와 함께 이연희가 모델로 활동 중인 SK-Ⅱ 화장품이 포장지와 함께 노출된다. ‘더 아름다워 지세요’는 SK-Ⅱ의 광고 카피기도 하다. 이외에도 드라마는 수차례 뜬금없이 SK-Ⅱ 화장품이 방바닥에 뒹굴거나 화장대 위에 놓인 SK-Ⅱ용기를 클로즈업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던킨도너츠가 협찬한 MBC 드라마 <더킹 투하츠>에서는 주인공인 이재하(이승기 분)가 시도 때도 없이 도너츠를 먹는 장면과 상표가 노출됐다. 던킨도너츠 역시 이승기가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이에 더해 <더킹 투하츠>의 제목부터 던킨도너츠와 유사해 의도적으로 비슷한 발음을 제목으로 정해 PPL로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결국 <더킹 투하츠>는 과다한 상표 노출로 방통심의위원회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현재 방영 중인 KBS 드라마 <착한남자>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PPL이 발견된다. 주인공인 강마루(송준기 분)는 극중 여주인공과 바닷가를 찾아간다. 그곳에 도착한 강마루는 8연속 휴대폰 사진촬영을 시작한다. 슬프고 애절한 장면에 갑자기 연속으로 들려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촬영 후 사진을 저장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그려내는 이 장면은 휴대전화 PPL이다. 한편 이 작품은 협찬사인 치킨마루 상호를 주인공 이름으로 사용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급기야 한 시청자는 KBS를 상대로 명칭사용금지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양성화된 PPL, 그러나 아직 판치는 검은 거래
드라마에 PPL이 등장한 것은 사실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PPL이 공식적으로 금지됐던 시절에도 음성적으로 제작사와 기업 간에 계약은 존재해왔다. 그러던 중 2010년 1월 개정된 방송법 시행령을 기점으로 PPL은 양지로 들어왔다. 보도 프로그램과 어린이를 주 시청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제외한 오락과 교양 분야의 PPL을 전면 허용했다. 브랜드 노출 장면이 방송 프로그램 시간의 5%, 전체 화면 크기의 4분의 1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규정만 지키면 브랜드 이름을 가리지 않은 채 PPL이 가능해졌다.
합법화 명분은 방송 제작 여건의 개선이었다. 음성적으로 PPL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점과 방송사에 비해 어려운 여건을 가진 외주제작사의 수입원을 확보해준다는 형평성 차원의 배려에서 힘을 얻은 것이다.
숨을 필요가 없어진 광고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었고 제작자들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며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PPL은 거대산업으로 성장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이재영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달 14일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방송 3사의 PPL 매출은 총 174억원으로, PPL이 합법화가 된 지난 2010년보다 6.6배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사별로 보면 MBC가 106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SBS 53억원, KBS 15억원 순이었다. 이와 함께 올 8월 말까지의 PPL 추이를 보면 총 8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거둬들인 PPL 수입은 방송사와 제작사가 5대 5로 가져간다. 즉 방송사가 벌어들인 금액은 제작사들에게도 프로그램별로 각각 나누어 배분된다.
단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양성화된 시장 이면에 ‘마이너리그’의 규모는 더욱 크다. 실정법상 아직까지 단독으로 PPL을 진행할 수 없는 제작사와 광고주가 방송사 몰래 ‘은밀한 계약’을 통해 진행하는 음성적인 PPL시장은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 한 PPL광고 대행사 대표는 “광고주 입장에서는 제작사와 계약하는 편이 비용측면에서 훨씬 저렴하다”며 “PPL이 법망에 들어와 감시가 느슨해진 마당에 굳이 방송사에까지 돈을 지불해 가며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광고대행사 대표는 “합법화된 PPL시장에 유입되는 광고주들이 꾸준히 늘어났지만 전체 시장의 50% 미만일 것”이라며 “방송사나 정부당국도 알고 있지만 영세한 제작사들의 상황을 고려해 모른 척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상 PPL이 합법화 된 이후 규제가 어려워진 측면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브랜드 로고 노출이 가능해지다보니 PPL인지 아닌지를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해 졌다. 고급스러운 거실 한 구석에 놓여진 골프가방이 ‘은밀하게’ 맺어진 PPL인지 단순한 미장센에 불과한지 구분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를 위한 드라마?
최근 지상파 드라마의 경우 한 편당 20~30개의 PPL이 노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야는 다양하고 시세는 천차만별이다. 한 드라마 제작사 대표는 “사안과 방식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PPL의 평균단가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시청률, 주연배우, 연출, 이전 PPL금액 등에 따라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같은 제품이라도 노출 방법에 따라 단가가 달라진다”라 밝혔다.
계약내용은 ‘주인공 A가 B음료를 3회에 걸쳐 섭취한다’ ‘여주인공 C가 D제품을 들고 OO기능을 설명한다’ 등과 같이 세밀하게 작성된다. 한 PPL대행사 대표는 “최근에 가장 비싸게 팔리는 PPL은 주인공의 직업과 영업장을 동시에 노출시키는 것”이라며 “신사의 품격에서 조연이었지만 이종혁이 사장이었던 망고식스 PPL은 5억을 넘게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업계에 따르면 지상파 드라마 한편이 PPL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최소 8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스케일이 큰 드라마나 톱스타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경우 20억원이 넘는 케이스도 등장했다. 전체 드라마 제작비를 기준으로 보면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PPL 의존도는 높아졌다.
조민수 이노션 월드와이드 BPL팀 부장은 “PPL 문제는 결국 부족한 제작비로 귀속된다”라며 “매체가 증가하며 방송사들의 광고수입이 줄어 외주 제작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어지고 외주제작사 입장에서는 반대로 주연배우 출연료 증가 등으로 제작비용이 늘어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할 방안이 PPL 외에 딱히 없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한 외주제작사 대표 역시 “PPL로 시청자들의 불만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는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외주제작사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전파의 주인인 시청자의 권리를 제한해 채워 넣는 것을 용인해달라는 논리는 영 설득력이 부족하다. 방송사와 외주제작사에 대한 형평성 측면에서 허용된 PPL이 정작 국민들의 시청권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피하기 힘들다.
스토리 좌지우지 작가 창작성 파괴하는 폭군
PPL산업이 더욱 활성화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측은 PPL이 이미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을 논리로 든다. 미국을 포함한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PPL이 자리 잡아 산업적으로 성장추세에 있다. 그러나 이를 국내 드라마 제작환경과 직접적으로 대입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해외의 경우와 달리 생방송에 가깝다는 ‘쪽 대본’ 제작환경을 가진 국내 실정으로는 PPL을 포함해 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영화에서는 규제가 없어 더욱 노골적인 PPL이 등장하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스토리에 잘 녹아들어가 거부감이 적은 것과 같다.
한 PPL광고대행사 대표는 “현실적으로 주연배우와 편성이 확정되기 전까지 PPL을 받기란 쉽지 않다”며 “촬영에 들어간 이후에 일련의 계약들이 이뤄져 스토리에 녹여내려다 보니 아무래도 흐름상 거슬리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영세한 제작사 입장에서는 광고주가 상전일 수밖에 없다. 제작사 대표가 무리하게 광고주의 요구를 들어주다보니 스토리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작가와의 마찰이 생기는 사례도 종종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지상파 방송사 PD는 “16부작 드라마가 반응이 좋자 13회에 PPL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며 “엔딩을 앞둔 드라마의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갑자기 PPL을 끼워 넣어 상품 노출이나 홍보멘트를 요구하면 어느 작가와 연출자가 좋아하겠나”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그렇지 않아도 완성도를 높이기 힘든 환경에서 PPL이라는 계륵이 드라마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PPL이 드라마 기획단계에 개입됐을 때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광고주들의 경우 자사의 브랜드가 서민이나 소외계층 보다 부유층에 노출되는 것을 선호한다.
자동차, 프랜차이즈, 휴대폰 등 현재 활발하게 PPL에 뛰어들고 있는 기업들 대부분이 그렇다. 드라마에서 재벌이 빠지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PPL이다. 점차 드라마 제작에 있어 PPL 의존도가 높아지면 서민이나 소외계층을 주 소재로 한 작품이 기획부터 고사될 수 있다. 서민을 대변하는 창으로 여겨지던 드라마가 산업구조에 영향을 받아 ‘서민없는 드라마’만 등장하는 순간이 올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