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간은 신이 등장하면서 멍청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신을 믿기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
인터넷과 스마트폰 없이 오프라인으로 40일을 지내면서 그 경험을 서술한 '아날로그로 살아보기'(크리스토프 코흐 지음, 율리시즈 펴냄, 2011)란 책에 나온 구절이다. 위의 ‘신(神)’을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나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기술에 의한 도구로 바꾸어도 충분히 의미가 통한다. 우리는 그런 도구를 만들어내면서,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고 평가절하를 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신의 지위에 우리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도구와 환경을 밀어 올리고 있다.
부분 결핍을 파고든 지난 세기의 프로젝트들
태국의 세제 Vanish 광고. 새옷을 입는 것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가장 크게 변화시킨 제품 중의 하나로 휴대폰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USA TODAY' 신문은 2007년 창간 2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킨 지난 25년간의 발명품 중에서 휴대폰을 1위로 선정했다. 휴대폰 초창기와 지금 우리가 휴대폰을 사용하는 양상이 얼마나 바뀌었는가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그런 비즈니스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직접 관여했던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발신전용의 ‘시티폰’을 기억하는가? 삐삐로 호출을 받아서 사람들이 줄을 늘어선 공중전화기 옆에서 느긋하게 전화를 걸었던 광고를 내보냈던 바로 그 시티폰이다. 시티폰은 2000년에 서비스가 중단됐다. 발신전용과 통화 가능지역이 협소하다는 한계가 기본적인 문제였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일반 휴대폰 서비스 대비 저렴하다는 장점만을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일수도 있다.
한 번 더 기억력 테스트를 해보자. ‘골드뱅크’란 기업을 기억하시는가? 회원 가입을 하고, 골드뱅크의 홈페이지에서 광고를 일정 횟수 이상 보면 돈을 주는 곳으로 지난 세기말 벤처 열풍 주역 중 하나였다. 비슷한 제안을 무선통신업체에 한 적이 있었다.
휴대폰 통화를 하기 전에 광고를 들으면 통화료를 할인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IMF 금융위기를 겪으며, 무선통화요금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민하던 업체로서는 귀가 솔깃했다. 그 프로그램에 광고를 실을 광고주를 우리가 대기로 했고, 무선통신업체는 시설과 돈을 투자하기로 얘기가 진행됐다. 그러다가 우리도 일정 액수를 투자하라고 하면서 서로 얘기가 엇나가기 시작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 받았던 위의 프로그램이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시티폰, 골드뱅크, 광고 청취 후 통화료 감면 등의 세 가지 모두 인터넷이나 무선통신의 기본 기능 중의 일부분을 희생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비즈니스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티폰은 수신 기능을 없앴다. 뒤의 두 가지는 즉시성이라는 기본 혜택을 유보시켰다.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광고를 클릭해 보거나 들어야 하는 상황이 강제된 것이다. 결국에는 금전 수익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시간 투자’라는 표현을 썼으나 인터넷이나 무선통신과 같은 새로운 제품의 가장 큰 혜택을 없앤 것이다.
‘XX가 없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배가 고프면 당신 몸이 당신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스니커즈 광고.
때로는 이런 ‘결핍’이 마케팅의 주요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인위적인 ‘결핍’ 상태를 강요해 소비자에게 새롭게 제품이나 브랜드의 가치를 느끼도록 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얘기한 루마니아의 초코바 롬(ROM)같은 경우가 근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루마니아의 소비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격하시켰던 롬 안의 ‘루마니아’라는 가치를 아예 그와 대척점에 있는 성조기로 표현되는 ‘미국’으로 바꾸어 소비자들이 사라져 버린 루마니아를 연호하고 찾게 만들었다. 루마니아에서 롬의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던 미국 초코바가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스니커즈(Snickers)였다.
초코바가 혜택으로 제공할 요소는 맛, 심심풀이, 요깃거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롬과 같이 일반적인 요소가 아닌 ‘애국심’과 같은 감성으로 소비자를 유인할 수도 있다.
스니커즈는 근래 에너지를 공급하는 가벼운 먹거리로 자리매김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광고를 보면 미식축구를 즐기는 청년들 사이에 제대로 걷기조차 벅차 보이는 할머니가 굼뜨게 우왕좌왕하다가 수비수에게 태클을 당해 넘어진다. 1922년생으로 한국 나이로 90세인 배우 베티 화이트(Betty White)가 그야말로 몸을 던지며 열연했다. 같은 팀의 동료들이 묻는다. “마이크, 어떻게 된 일이야? 넌 꼭 베티 화이트(할머니 여배우) 같이 움직이고 있어.” 그 순간 여자 친구가 스니커즈를 건넨다. 그것을 먹자 할머니에서 젊은 청년으로 바뀌면서 활발히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당신 몸이 당신이 아니다(You’re not you when you’re hungry)”라는 자막이 뜨며 “스니커즈가 채워 드립니다(Snickers satisfies you)”란 슬로건으로 끝을 맺는다.
스바루(Subaru) 자동차는 규모나 성능 면에서 최상급의 브랜드는 아니다. 품질 대비 저렴한 가격이란 요소 외에 굳이 장점을 들자면 디자인에서 독특한 측면이 있다는 정도의 평가를 받는다. 스바루는 독특한 디자인을 자신의 강점으로 내세우기로 했고, 그것을 극적인 방법으로 부각시켰다. 자신이 내세우려는 디자인의 독특한 부문을 완전히 없애버린 자동차를 만든 것이다. 회사까지도 새롭게 만들었다. ‘Mediocrity’, 바로 ‘평범’을 기업명으로 내세웠다. 혹시라도 차량의 외형을 돋보이게 할지도 모르는 모든 디자인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격해 평범한 차를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음을 힘주어 얘기했다. 광고 문구 중 하나가 그들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우리는 비범(非凡)하지 않습니다. 특별할 정도로 평범한 겁니다(We’re not extraordinary. We’re extra-ordinary).” 그들의 홈페이지(www.subaru.com/content/static/fightmediocrity)에 가면 각종 차종과 그들의 평범을 지향하는 철학 등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다.
물론 홈페이지 주소에서 볼 수 있듯이 스바루가 실제로 그런 기업을 지향하고, 자동차를 생산해 시장에 내놓은 것은 아니다. 농담처럼 유머를 곁들인 화제 유발 프로젝트로 기획한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이 결핍된 것이 심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바루의 디자인이 돋보인다고 하는 원래 의도된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제품이나 특정한 속성의 인위적인 결핍 상태를 조성해 브랜드 자체의 가치를 환기시키고, 제고하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패스트푸드 체인인 버거킹의 ‘와퍼가 없어졌어요(Whopper Freakout)’ 캠페인을 들 수 있다. 버거킹 매장에 고객이 들어와 직원에게 주문을 한다. 뭐 별다른 메뉴가 있겠냐는 듯이 습관적으로 건성으로 와퍼를 시킨다. 전혀 뜻밖으로 직원은 이제 더 이상 와퍼를 취급하지 않는다며 와퍼가 빠진 메뉴를 보여준다.
어리둥절한 고객이 말한다. “아니 어떻게 와퍼를 없애 버릴 수가 있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햄버거인 와퍼를!” 놀랬다가 분노를 표시하고 이어 와퍼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고객에게 직원은 웃으면서 와퍼를 내어준다. 이 일련의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찍어, 고객의 동의하에 반응들을 편집해 TV 광고로 만들어 방영했다. 유튜브에는 긴 시간의 동영상을 올렸다. 당연히 엄청난 입소문을 불러 일으켰고 2008년 최고의 캠페인으로 꼽혔다. 한국에서도 결핍 상태를 가정한 광고는 꽤 많이 나왔다. 대부분은 대상 제품이나 서비스가 없을 경우에 벌어질 상황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보험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요즘은 몇몇 상조회사에서 비슷한 유형의 광고를 방영하고 있다.
주방세제 등의 청소용품에서 비교 광고 형식으로 제대로 세척이 안 된 더러운 부분을 보여주는 경우도 꽤 많다.이 또한 같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전반적으로 대단히 심각하게 논리적으로 결핍 상태와 그 여파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심각하게 결핍 상태를 생각할 때는 따로 있다.
근본적인 ‘결핍’을 상상하라
버거킹의 ‘와퍼가 없어졌어요’ 캠페인.
파괴되고 사라진 역사 속의 도시들을 생각하며 ‘결핍’ 상황을 가정한 상상은 저자의 말대로 위기 대비 이상으로 필요하다. 불교의 선(禪)의 한 방법으로 눈앞에 보이는 물체를 마음의 눈으로 없애고 다시 살리면, 물체와 마음이 모두 새롭게 이면까지 보이듯이 도시 자체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김진애 선생의 <도시 읽는 CEO>란 책이 있다. 그 책에서 2천 년 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묻혀버린 폼페이와 2005년 카트리나 태풍으로 역시 도시가 마비되어 버린 뉴올리언스를 예로 들면서, 요즘 유행하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위해서는 그 도시 자체를 지워버리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구절에 주목해 쓴 구절이다. 마케팅 활동을 위해 제품을 연구하는데도 제품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던 과거를 상정한 후, 새로운 기능이나 쓰임새와 모습을 보일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이 현재의 제품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경우가 많다. 또 본질에 더욱 가까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된다.
마티 뉴마이어(Marty Neumeier)라는 브랜드 저술가는 자신의 저서인 <브랜드 반란을 꿈꾸다(Zag: The #1 Strategy of High-Performance Brands)>에서 기업의 브랜드를 확고히 하는 방법의 출발점으로 다음과 같이 기업의 부고 기사, 곧 영어로 ‘오비추어리(Obituary)’를 써보라고 했다. 앞으로 25년 뒤 여러분이 운영하는 회사의 문을 닫는다고 가정해 보자. 자리에 앉아 자신의 부고 기사를 쓰듯이 기업의 부고 기사를 써보라. 후대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이에 대해 답을 하다보면 곧 자신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질문에 대해 답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아침에 나를 깨우는가?
마티 뉴마이어는 ‘테이스팅’이라고 이름을 붙인 그가 교보재로 사용한 가상 와인전문점의 부고 기사를 실례로 작성해 보여준다. 그 기사에서 그는 테이스팅이 왜 태어났는가를 얘기한다.
“테이스팅의 창업자들은 와인을 통해 세계를 더 가깝게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이 대화할 수 있고,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고,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국제적 카페모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와인을 음미하는 법을 서로 가르쳐주고 배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런 부고 기사에 ‘세계적으로 와인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포도 작황이 안정적이 되면서 수익도 높아지기에 우리는 와인전문 체인점 XX를 시작했습니다’라고 쓸 수밖에 없는 기업의 브랜드가 제대로 설 수 있을까? 그 기업이 과연 수십 년 후까지 존속할 수 있을까? 부고 기사는 다른 사람이 쓰는 객관적인 묘비명과 같다.
사회적인 명분과 그에 합당한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좋은 부고 기사가 나오기는 힘들다. 바로 심각한 결핍 상태의 상정은 이런 자신의 근본을 찾는 작업을 할 때 필요하다. 제대로 된 브랜드는 그렇게 결핍된 극한상황이란 다른 차원으로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새롭게 자신 브랜드의 꽃을 피우는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진행이 된다.
본질의 결핍에 대한 고민 없이 부분적인 결핍 상태의 제품을 내놓는 것은 앞서 얘기한 시티폰, 골드뱅크처럼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이 되기 힘들다. 또한 결핍 상태 자체가 괴로운 상황이라 그것을 심각하게 포장해서 내놓으면 소비자는 피하게 된다. 본질에 대한 고민은 심각하게, 소비자에 대한 실행은 가볍게 유머를 곁들여 펼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