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욕실용품을 만드는 로얄앤컴퍼니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욕실 시스템을 내놨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단순히 새로운 제품이 아니고 욕실문화를 바꿀 정도의 획기적 제품이란 이야기에 끌려 인터뷰를 요청했다.
갤러리와 전시장을 겸한 이 회사의 서울 논현동 사옥은 검정색 하층부와 흰색 상층부가 대비돼 외양부터 주변 건물들과 달리 예술적 분위기를 풍겼다. 워낙 디자인을 살린 제품을 많이 만드는 회사라서 그랬을까.
1층으로 들어서니 먼저 북카페 겸 와인바가 눈에 들어온다. 점심을 앞두고 한창 테이블 세팅을 하는 모습부터 여느 건물의 1층과는 다르다. 이 건물 2층부터 6층까지는 갤러리고 그 위는 사무실, 지하 1층엔 ‘목간(沐間)’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욕실용품 전시장이 있다.
인터뷰에 앞서 먼저 목간으로 향했다. 지하라고는 하지만 1층과 열린 공간으로 연결됐고 층고가 높아 그 자체로 시원한 쇼룸이자 갤러리였다. 게다가 적당히 자연광도 들어오도록 설계가 돼 있어 어느 가정집 거실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거기에 전시된 제품들은 눈을 즐겁게 했다. 그저 세면기나 욕조, 변기에 수도꼭지 등으로 가득찼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조각 작품 전시장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각양각색의 욕실용품은 물론이고 디자인 감각을 살린 의자며 샤워기 수도꼭지에 이름도 모를 소품, 부스 배치 등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재미없는 데서 탈출하려 신제품 개발
로얄 갤러리에선 연 10회 전시회를 열고 있다.
디지털 욕실 시스템을 보려는데 박종욱 사장이 내려왔다. 그에게 새로운 제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고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요? 재미로만은 이 일 못하죠. 산고를 겪어야 해요. 제품 만드는 게 종이에 그림 그리듯 그려서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팀이 붙어서 머리를 짜내고 시행착오를 거쳐야 해요. 당연히 수없이 회의도 해야 하고…. 우리는 매번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내도 소비자는 감동을 받지 않아요.”
그렇다면 신제품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을까.
박 사장은 지겨울 정도로 재미가 없어서 전혀 차원이 다른 제품을 만들게 됐다고 소개했다. 다만 배경엔 또 다른 사연도 숨어 있었다.
로얄앤컴퍼니의 옛 이름은 로얄토토다. 일본 토토와 제휴해 욕실용품 회사로선 아주 빠르게 인지도를 높였고 고급제품 생산회사로서 이미지도 굳혔다. 그랬던 토토와 결별하고 홀로서기를 하면서 바꾼 이름이 로얄앤컴퍼니다.
“2004년부터 토토와 결별을 준비했고 2009년 1월1일부로 완전히 떼어냈지요.
로얄이 대한민국 최고의 브랜드가 되는 데는 토토의 덕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홀로서기를 하면서 그 동안 과도하게 포장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연히 새로운 싸움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기존 제품으론 아무리 잘 만들어도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알릴 수가 없었어요. 소비자들에게 (욕실제품에 대한)그 많은 정보를 알아달라고 하기도 쉽지 않았고, 게다가 이 시장이 B2C가 아닌 B2B라서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 가치를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가 없었어요. 의사결정 주체가 소비자가 아닌 거죠.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 소비자는 ‘메이드 인 차이나’ 등 싸구려 제품밖에 쓸 수 없다, 기존 제품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죠. 어떻게든 차별화를 해야 했어요.”
여기서 박 사장은 제품이 아닌 공간으로 접근하는 생각을 해냈다.
“늘 (욕실)공간을 생각했기에 결별을 전후해 컴바스를 개발하라고 지시했어요. 공간 솔루션으로 차원이 다른 게임을 시도하려는 것이었죠. 이게 상품화가 가능할까 모두가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는데 우리 연구소와 마케팅팀이 결국 구현해냈어요. 품질이나 기능, 안정성 모두 뛰어납니다.”
박 사장은 욕실 시스템 개발로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욕실 부문에서 대한민국 최고를 넘어 세계 최고가 되는 것까지 그려보고 있다.
“이 제품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특허도 냈어요. 세계 최초의 컨셉트로 깔끔한 욕실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의미도 꽤 있어요. 발전의 여지도 많고요.”
제품 경쟁 대신 공간을 바꾼 발상의 전환
로얄앤컴퍼니를 비롯해 기존 욕실용품 업체들은 모두 욕실 안에 들어가는 도기나 수전금구로 경쟁했다. 당연히 디자인이나 성능이 뛰어난 제품은 넘치고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은 그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게 박 사장의 설명이다.
“예전엔 욕실이 주거 공간에서 부엌 다음이었는데 지금은 욕실이 먼저예요. 휴식 공간으로 멋을 내는 분들도 많지요. 그런데 실상을 그렇질 못해요. 예전엔 비누 하나로 온 가족이 씻었는데 지금은 모두 각각입니다. 우리 집만 해도 부부와 아이 둘하고 넷이 사는데 샴푸만도 열 개가 넘어요. 남녀 세제가 틀리고 샴푸와 린스가 제각각이며 얼굴은 폼클렌징으로 씻고 발 씻는 것은 또 달라요. 그러다보니 욕실이 깨끗한 집이 없어요. 그래서 늘 습기 차고 지저분한 것을 당연하게 여겨요. 그러나 내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아요.”
이것이 기업가인 그가 일반 소비자나 직원들과 다른 면이다. “나는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바꿔야 한다고 해요. 흔히들 소비자의 니즈를 따라야 한다는데 그래가지곤 수요를 만들어 낼 수 없어요. 소비자들은 너무 단순해요. 우리가 소비자들의 니즈를 이끌어내야 해요.”
여기서 그는 새로운 욕실 시스템을 만들어낸 과정을 설명했다.
“우선 기존 욕실부터 분석했어요. 기존 욕실은 심플하고 쾌적하게 쓰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수납이 안돼요. 둘째로 수전금구나 욕실 도기를 우리는 애써서 만들어 내도 소비자 입장에선 자주 보는 게 아니기에 차이를 느끼지 못해요. 셋째로 욕실용품을 많이 만들어 내도 복잡해 보이기만 하고 오히려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박 사장은 여기서 소비자 스스로 자기 욕실을 쾌적하게 만들 수 있도록 공간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했다.
“사용하기 편리하고 가장 깔끔하며, 어디에나 있지 않은 나만의 욕실을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우리의 전제였습니다. 세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었어요. 소비자들은 지저분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며 그에 대한 솔루션을 만들기로 했어요.”
“제품 개발의 출발점은 욕실 내 모든 기기가 튀어나와 지저분하다는 것을 인식한 데서였어요. 그걸 바꾸려면 벽을 매립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죠. 벽 두께가 얇아서 매립하는데 한계도 있고, 일단 매립하면 고치기가 쉽지 않아요. 사소한 것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모두 뜯어야 합니다. 타일을 깨고 벽을 깨야 해요. 그래서 욕실에 어느 것이 고장 났는데도 뜯을 자신이 없어서 버려두고 다른 욕실을 쓰는 집이 한둘이 아니에요.”
로얄앤컴퍼니는 모듈화로 그 해답을 찾았다.
“매립의 한계를 극복한 게 이 모듈입니다. 모듈로 처리하니 우선 외관이 깔끔해 보여요. 이 모듈에다 세면기고 변기고 레고 조각을 맞추듯 원하는 것을 사다가 맞추면 돼요. 벽을 뜯을 필요도 없으니 누구나 할 수 있죠. 제품을 바꾸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카테고리죠. 여기에다 수납공간을 만들어 붙였어요. 그 공간도 새로운 게 아니라 세면기 좌우 등 비어있던 공간의 활용성을 높인 것이죠. 이런 게 이 제품의 주요 컨셉트입니다.”
이렇게 그는 복잡하고 너저분하던 욕실을 단순하고 쾌적한 공간으로 바꿨다. 욕실은 현관처럼 깨끗해졌고 샤워부스마저 엘리베이터처럼 심플해 보였다.
욕실에 IT를 접목하다
박 사장은 욕실 공간을 바꾸는 데 머무르지 않고 IT기술을 접목해 전혀 차원이 다른 욕실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리모컨을 누르자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고 수도꼭지에서도 물이 나온다. 물 온도도 저절로 맞춰진단다.
“욕실엔 항상 물이 흐르기 때문에 전기제품이 들어가기 어려워요.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물과 전기를 연구했어요. 전자샤워기며 비데 등 모두 물에서 작동하는 것이죠. 그 노하우로 우리는 욕실에 전기를 들여와 IT와 접목함으로써 가장 편리한 욕실을 만들어냈어요. 소비자에게 편리한 욕실을 제공하는 것이죠. 추운 겨울엔 누구나 손에 물 묻히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그래서 물을 틀어놓고 온도가 맞는지 만져보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제는 물을 만져볼 필요 없이 리모컨으로 물 온도를 맞춘 뒤 들어가면 돼요. 퇴근하며 스마트폰으로 욕조에 물을 받아 놓을 수도 있죠.”
그는 이 시스템을 헬스케어와 연결할 구상을 하고 있다.
“지금은 소변으로 혈당을 체크하는 게 가능합니다. 소변을 보면 데이터를 병원으로 전송해 자신의 건강상태가 어떤지 핸드폰으로 받아볼 수도 있게 됩니다. 욕실 솔루션에 사회적 편리를 추구하는 기능까지 붙여 세계 최초의 가장 편리한 욕실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죠.”
박 사장은 제품을 출시하기 전 이미 분당차병원 VIP실에 60대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당연히 상류층 소비자들을 위한 제품 같은데 그렇지만은 않다고 했다.
“개발비 등 원가가 많이 들어 지금은 다소 비싸지만 종전과 다른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소비자들도 기꺼이 그 정도는 지불할 것으로 봅니다. 지금은 하이엔드 유저 중심으로 판매하겠지만 결국은 대중화할 것입니다. 보다시피 이 모듈은 화려하고 큰 욕실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좁은 공간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죠.”
니즈를 만들어내는 경영자
박 사장은 “소비자의 니즈는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물과 사람의 행복한 만남’을 모토로 하는 회사의 수장기에 그럴까.
“소비자가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니즈를 파악할 수 없죠. 그런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주는 게 우리의 책임입니다. 니즈를 만들어내려면 소비자를 리드해야 해요. 우리가 먼저 제안해 소비자들이 쓰게 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생존비결이죠.” 그는 “물에서 만큼은 한국 소비자는 차원이 다른 서비스를 받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사장은 이런 맥락에서 2년 전 RIM(로얄 인테리어 멤버스)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전국 인테리어 업체들을 네트워킹해 욕실 관련 문제가 생겼을 때 즉시 달려가서 해결하도록 한 것.
“한밤중에 욕실이 터졌다고 해봐요. 비용보다 소비자의 다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가 아니겠어요?”
이것이 ‘물과 사람과의 솔루션’을 만드는 그의 생각이다.
박 사장은 하루는 청담동 사무실 또 하루는 본사와 공장이 있는 부평을 오가며 일하고 있다. 그 생활이 보통 바쁜 게 아닐 터.
“나는 보따리장수예요. 그래서 모든 일을 그날그날 끝내야 해요.”
새로운 성장을 꿈꾸는 회사
로열앤컴퍼니는 금융기관 차입을 별로 하지 않을 만큼 재무구조가 좋다. 은행들이 서로 낮은 금리를 제시하며 돈을 써 달라고 할 정도라고 했다.
회사가 이처럼 건실한 것은 내실을 중시하는 그의 경영원칙과도 무관하지 않다. 박 사장은 2세지만 평사원, 그것도 생산직부터 출발했다. 입사 직후 일본 토토에 생산직으로 파견돼 1년간 현장에서 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2000년 부친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회사를 맡아 한눈 팔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끄는 원천이 됐다.
최근 이 회사는 화성에 새로운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박 사장은 화성 프로젝트에 1000억원 정도를 투입할 것이라고 있다. 기존 매출만 유지되면 유동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더라도 재무안전성을 보강하기 위해 기업공개를 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상장은 계획이 없어요. 상장하면 CEO가 쓸데없는 곳에 생각을 많이 투자해야 해요. CEO로서 그것이 안 됩니다. 지금 하는 일만 하기에도 벅차니까요. 생산성 있는 일이 아닌 곳에 생각을 투자해야 하고, 재무제표 화장까지 해야 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할 수도 있지만 그는 낙관적이다.
“당분간은 감당할 수 있어요. 경기침체가 이어지면 또 건설비가 낮아질 것 아닙니까.”
예술로 소비자와 만나는 공간, 로얄갤러리
로얄갤러리에 진열된 설치 작품.
로얄앤컴퍼니 사옥엔 곳곳에 예술 작품들이 놓여 있다. 박 사장의 방엔 달항아리도 보인다. 그의 예술적 취향이 궁금했다.
“예술에 깊은 관심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저희 갤러리에서 연 10회 정도 전시회를 여니 자연스레 유명 작가들과 왕래를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작품들이 제법 모이게 됐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는 현재 설계 중인 화성공장에도 그곳 직원들 위해 갤러리를 설치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여유가 된다면 스튜디오를 갖춰 화가들에게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어요. 재능은 있는데 작업실이 없는 작가들도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