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바오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비스카야주(州) 주도(州都)로 19세기 제철업이 시작되어 조선·철강산업이 발달한 공업도시이며 무역도시다. 활력이 넘치던 공업도시는 조선산업의 쇠퇴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 빌바오시 당국은 당시 뉴욕 맨해튼의 구겐하임 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된 소장품과 새 전시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찾고 있던 구겐하임 미술관 재단 측과 접촉해 새로운 미술관을 유치함으로써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 프로젝트는 시작된다.
미술관 관장이던 토마스 크렌스의 요청에 의해 프랭크 게리는 미술관 부지를 둘러보게 된다. 하지만 프랭크 게리는 빌바오시가 미술관 부지로 내놓았던 창고 부지가 적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네르비온 강변의 부지를 선택하게 된다. 이 지역은 크레인과 창고의 경관이 지배했던 빌바오시의 전형적인 산업지역으로 새로운 미술관의 건립과 함께 성공적인 지역 재개발의 상징으로 소개되고 게리의 빌바오 뮤지엄은 완공되자마자 건축 비평가들의 환호와 함께 빌바오시의 상징적 건물이 되었다. 개관 이후 건축물에 관심을 갖는 전 세계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들여 새로운 관광산업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1997년 미술관이 개관된 후 매년 약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여 빌바오시를 새로운 스페인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빌바오 효과는 도시의 상징 건축물이 문화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사례다.
건축과 예술의 환상적 만남
구겐하임 미술관장이던 토마스 크렌스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현대적인 작품 전시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다양한 설치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요구했다. 프랭크 게리는 이러한 구겐하임 재단의 요구에 대해 약 2만8000㎡의 연면적에 영구소장품과 기획전시품을 전시할 수 있는 19개의 전시실과 중앙의 거대한 아트리움 그리고 공공공간과 미술관 사무실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해석해 기존의 전통적인 미술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와 공간을 창조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외부의 자유로운 형태와는 달리 내부공간은 회화작품의 전시에 적합한 벽체를 제공하고 있으며 20세기 현대 설치미술 작품을 위한 자유곡선 형태의 갤러리는 관람객을 지루하지 않게 배려하고 있다.
이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면 구겐하임 소장품이 전시된 전시장보다 우선 기묘한 형상의 건물 외관을 보기 위해 건물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마치 꽃의 형상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네르비온 강변에서 보면 배의 모습 같기도 한 독특한 외관은 바람이 일면 강을 따라 흘러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정형화된 그리드 디자인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대칭도, 비례도, 균형도 무시된 듯한 생소한 형태의 건물 앞에서 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아름다움을 먼저 떠올린다.
게리는 그리드를 강박관념으로 정의하고 그리드에 의해 건축가 스스로 자유로운 예술적 사고를 제한한다고 보았다. 만약 그리드 없이 공간과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사고의 폭이 확대되어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형태의 건물을 설계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으며 대형 프로젝트로서는 처음으로 빌바오에서 실현했다.
구겐하임 미술관 외벽은, 직선부분은 스페인산 석회암으로, 곡선 부분은 3mm의 얇은 티타늄 판넬로 감싸져 있다. 티타늄 판넬은 가까이서 보면 모두 찌그러져 있는데 이는 의도된 모습이다. 금속 판넬보다 적은 두께의 티타늄 판넬을 사용해 내구성을 확보하면서 멀리서 보면 물고기 비늘 같은 모양의 외피는 이 거대한 구조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2중 곡선과 찌그러진 티타늄 판넬은 빛을 받아 서로 다른 각도로 빛을 반사하여 마치 꿈틀거리는 듯하다.
어느 장소에서나 달라지는 외관의 모습에 빠져 한동안 건물 주변을 걷다 보면 현대미술의 거장인 제프 쿤스의 Puppy(강아지)와 루이 부르주와의 MAMAN이라는 거미 형상의 설치 미술을 만나게 된다. 꽃으로 풍요롭게 장식되어 귀엽게까지 느껴지는 Puppy와 그로테스크한 철로 된 조형물인 MAMAN은 각각 미술관 전면 광장과 강변의 오픈 공간에 설치되어 미술관 외부 공간에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빌바오 구겐하임 주 출입구는 기존 대지의 경사를 이용해 전면의 광장에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주 출입구 계단에서 급격하게 달라지는 이러한 레벨 차이로 인해 관람객은 마치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실제로 구겐하임 미술관 관장이었던 크렌스가 그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주 출입구를 거쳐 아트리움으로 진입하는 경험을 “메인 아트리움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당신의 모자를 공중에 집어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묘사했다. 주 출입구에 이어진 50m 높이의 거대한 아트리움은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1.5배의 높이를 갖고 있으며 상부의 천창과 아트리움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의 유리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아트리움을 밝고 경쾌하게 장식하고 있다.
아트리움은 3개 층에 걸쳐 마련된 19개의 전시실의 시각적·공간적 중심공간이기도 하다. 아트리움과 바로 연결되는 약 130여 미터 길이의 전시실은 벽체와 천정까지 비대칭 곡면으로 되어있다. 기획전시실인 이 전시실은 현대 전위예술의 다양한 설치미술 작품을 수용하기에 적합하다. 게리는 이 전시실에 대해 “리차드 세라의 150피트짜리 금속성 뱀에게조차도 이 갤러리는 힘이 넘쳐난다”고 말했다.
모든 전시실은 천창을 통해 자연광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내부 공간은 미술작품의 전시공간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뿐만 아니라 관람객이 건축과 예술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독특한 사고와 자유를 작품에 옮긴 건축가 프랭크 게리
1929년생. 우리 나이로 83세인 프랭크 게리는 캐나다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1954년 USC에서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도시계획 석사를 취득한 후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실을 설립한다. 초기 그의 사무실은 저예산의 프로젝트를 주로 수행했다. 건축마감재도 비교적 저렴한 골 판넬, 메탈, 합판, 메쉬 울타리와 같은 자재에 관심을 가졌다. 오늘날 그의 작품에서 흔히 채용되는 이러한 재료는 경제적인 건축물을 만들려는 초기 작품의 노력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디즈니 컨서트홀, 빌바오 뮤지엄 이외에도 세계 각지의 그의 건축물은 항상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9년 프리츠커상을 비롯하여 각종 수상경력은 그가 미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건축가임을 알 수 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은 기존의 질서와 양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스러움을 담고 있다. 사물을 관습적으로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여 새로운 형태를 찾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미국 대중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게리의 건축은 개인주의의 표현이며 미국 사회의 특징인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그는 설계과정에서 미리 아이디어를 만들어 놓고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가기보다는 자유스러운 형태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진화해 가는 방법을 취한다. 건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과거의 형태나 선입견을 갖지 않고 그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프랭크 게리는 천재화가 피카소와 비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게리는 공간을 분할하거나 해체해 재구성했다. 마치 입체파의 피카소가 그의 그림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고 분해해 나름대로 재해석한 것과 비슷하다. 피카소의 입체파 운동을 계기로 근대미술을 종식시키고 현대미술이 시작되었다면 게리의 해체주의는 건축을 포스트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되어 보다 더 자유로운 창작활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실제로 게리는 그가 해체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평이 극과 극이다. 객관적이고 정형화된 틀에서 그의 작품을 평가하면 예측할 수 없는, 심하게 왜곡되고 무질서한 형태가 도시의 맥락을 무시하고 주변의 건축물과 소통하길 거부하는 오만함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항상 건축주의 프로그램에 충실한 건축가였다. 프로그램이 주어지면 그것을 분할하고 해체해 각각의 프로그램 용도에 맞는 형태를 만들고 이를 조합해 전체 건물을 완성한다. 그는 또한 건축을 진정한 예술로 이해하려 했으며 작품 활동을 위해 전통적인 2차원의 평면이나 단면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기보다는 모형을 제작하고 모형을 다시 3차원으로 스캔해 컴퓨터 모델을 만들고 이를 시공도로 생산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러한 방법은 복잡한 그의 건물을 실제로 시공과 재료에 대해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며 그가 건축의 예술성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실용성을 중시했음을 말해준다.
디즈니 콘서트홀 / 치애트 데이 광고회사 / 내셔날 네덜란덴 건물
디즈니 콘서트홀 / LA
디즈니 콘서트홀은 LA 도심부 그랜드 애비뉴(Grand Avenue) 1번가에 자리잡고 있다. 약 2300석의 콘서트홀을 가진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본거지다. 1987년 시작된 디즈니 콘서트홀 프로젝트는 게리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03년 완공됐다. 지하 주차장 공사 후 예산 문제로 한동안 중단됐고, 1994년 발생한 노드리지(Northridge) 지진으로 야기된 내진설계 강화기준에 의해 설계변경을 거쳐야 했다. 어려움 속에 탄생한 디즈니 콘서트홀은 LA의 주요 관광코스에 포함되어 항상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LA 시민에게 훌륭한 공연공간을 제공해 문화적 욕구를 해소하는 장소가 되었다.
치애트 데이 광고회사 / 베니스, 캘리포니아
약 7500㎡의 이 광고회사 건물은 게리를 소개하는 책자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게리의 다른 작품에 비해 게리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건물 정면의 쌍안경은 사뭇 대범하다. 건물 정면 디자인에 쌍안경을 도입하게 된 계기도 전체 구조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디자인 작업을 하던 게리가 중앙부 디자인을 제외하곤 디자인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주 출입구 및 로비의 중앙부 디자인 완성에 고심하던 중 사무실 데스크 한편에 있던 쌍안경을 보고 디자인했다고 한다. 건축물 디자인 시 공간 및 형태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고 넘치는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표현한 그의 건축세계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내셔날 네덜란덴 건물 /체코 프라하
프라하의 내셔날 네덜란덴 건물은 댄싱하우스 또는 프레드와 진저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유명한 할리우드의 뮤지컬 배우인 프레드 아스테어와 그와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었던 댄싱 파트너인 진저 로저스의 이름을 따왔다. 건물을 보면 다소 투박한 스터코 외벽으로 이루어진 호리호리한 원통형의 타워와 중간부분을 잘록하게 해 마치 치마를 입은 여인처럼 보이는 세련된 유리타워가 어울린다. 1940년대 연미복을 입은 프레드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진저의 멋진 듀엣을 보는 듯하다.
이 건물의 위치는 블타바 강변의 19세기에 완공된 5층의 건물들과 이웃하고 있다. 개발업자는 게리에게 최대한 연면적을 확보해 줄 것을 주문했다. 새 건물의 높이를 이웃한 기존 건물보다 높일 수 없었던 게리는 건물의 층고를 줄여 7층으로 계획하고, 네오 르네상스 풍으로 지어진 인근의 건물과 어울리기 위해 창을 위아래로 불규칙하게 배치시켜 5층과 7층의 차이를 없앴다. 여기에 가로 줄무늬를 물결모양으로 장식해 질감을 더해 주변의 고전적인 건물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새로운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