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이 탄소중립 정책을 쏟아내면서 주요 기업들이 폐기물에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있다. 그동안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골칫덩이 취급받던 폐플라스틱과 비닐 등을 미래 자원으로 재활용하면서 새로운 수익원 발굴은 물론 기후변화 위기 대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다. 주요 기업들이 지속가능한 순환 경제 구축을 목표로 발 빠르게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에 뛰어들면서 우리 생활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버려진 페트병을 활용해 기름을 추출하거나 수소를 생산하고, 실을 뽑아 옷으로 재활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폐플라스틱이 또 하나의 자원으로 변화하면서 시장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국내 열분해 전문기업 에코크레이션의 인천공장(뉴에코원)에서 엔지니어가 열분해유 생산 설비를 시험 가동하고 있다. 사진 제공 SK지오센트릭.
▶썩는 데 500년 걸리는 플라스틱, 금맥으로 재탄생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전 세계 플라스틱 재활용 산업 시장은 2021년 455억달러(약 55조원)에서 2026년 650억달러(약 79조원)로 연평균 7.5% 성장할 전망이다. 지난 2018년 폐플라스틱 수입을 전격 금지한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이 환경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만큼 관련 시장 성장은 더욱 빨라진 것으로 예상된다. 땅에 묻으면 썩는 데 최대 500년이 걸리는 플라스틱은 환경오염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하급수적으로 수요가 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00년 2억1000만 톤에서 2020년 4억6000만 톤으로 20년 새 두 배로 늘었다.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회용품 이용이 늘면서 플라스틱 폐기물도 급증하고 있다.
반면 쓰고 버린 플라스틱의 재활용률은 9%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소각되거나 매립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국내서는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이 폐플라스틱을 분쇄·세척·선별·혼합 처리해서 재생 플라스틱을 만드는 ‘기계적 재활용’에 주력했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사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심하게 오염된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고 재활용을 반복할수록 품질이 떨어진다는 문제까지 있다.
이같은 한계 때문에 최근 국내외에서는 폐플라스틱을 화학 반응 등을 통해 재처리하는 ‘화학적 재활용’ 기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폐플라스틱을 열로 분해해 원료를 추출한 뒤 석유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를 뽑아내는 ‘열분해’가 대표적이다. 플라스틱을 구성하는 분자 덩어리의 중합을 해체시켜 원료물질로 환원시키는 ‘해중합’과 고온에서 압력을 가해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고순도의 ‘폴리프로필렌(PP)’을 추출하는 기술 등이 3대 화학적 재활용 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석유화학업계, 핵심 기술 확보 총력
지난해 플라스틱 순환경제 구축 의지를 담아 사명을 교체한 SK지오센트릭은 오는 2025년까지 5조원을 투자해 폐플라스틱에서 기름을 뽑아내는 ‘도시유전’ 사업을 본격화한다. 이를 위해 브라이트마크와 퓨어사이클 테크놀로지 등과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열분해 ▲해중합 ▲폴리프로필렌(PP) 추출 등 3대 화학적 재활용 기술을 확보했다.
또한 지난 3월에는 미국 플라스틱 재활용 업체 퓨어사이클 테크놀로지(이하 퓨어사이클)에 5500만달러(약 680억원) 규모의 지분투자를 단행하며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퓨어사이클은 올해 4분기 미국 오하이오주에 5만 톤 규모의 생산공장 완공을 앞두고 있는데, 최근 조지아주에 30만 톤 규모의 2공장 착공에 돌입했다. SK지오센트릭과 퓨어사이클은 연내 한국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2024년까지 울산에 폐플라스틱 재활용 설비를 구축한다.
LG화학은 원천 기술을 보유한 영국 무라테크놀로지와 협업해 오는 2024년 1분기까지 충남 당진에 연 2만 톤 규모의 초임계 열분해유 공장을 짓는다. 국내 최초로 고온·고압의 초임계 수증기로 폐플라스틱을 분해하고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나프타를 추출해 다시 생산공정에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국내 혁신 스타트업 이너보틀, CJ대한통운과 손잡고 플라스틱 생산, 사용 후 수거, 리사이클까지 망라하는 플라스틱 에코 플랫폼도 구축하고 있다. LG화학이 제공한 플라스틱 소재로 이너보틀이 화장품 용기를 만들고, 쓰고 난 화장품 용기를 CJ대한통운이 회수해 원료 형태로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100% 플라스틱 재사용을 추진한다.
롯데케미칼은 오는 2024년까지 울산공장에 1000억원을 투자해 11만 톤 규모의 화학적 재활용 페트 공장을 신설한다. 이곳에서는 기계적으로 재활용하지 못했던 유색 또는 저품질 폐페트병까지 원료로 쓸 수 있으며, 반복적인 재활용에도 품질 저하가 없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34만 톤 규모의 울산 페트 공장을 전량 화학적 재활용 페트로 전환한다.
최근 김교현 롯데케미칼 부회장은 국내외 주요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CEO IR 데이’를 열고 오는 2030년까지 리사이클 플라스틱을 100만 톤 이상 판매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전 세계 주요 국가의 규제, 정책이 확산되는 가운데 고객과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다. 그린소재와 바이오를 양대 축으로 2025년 매출 4조원을 달성하겠다고 공표한 SK케미칼 역시 플라스틱 폐기물 순환경제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수거업체들과 협력해 플라스틱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국내서 버려지는 페트의 20%가량을 자원하겠다는 구상이다.
현대오일뱅크가 지난 4월 5일 서울 중구 사무소에서 삼성물산과 ‘친환경 화학소재 사업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주영민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오른쪽)와 고정석 삼성물산 대표이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대오일뱅크.
▶폐플라스틱, 수소·전자기기 소재로 재탄생
석유화학업계를 중심으로 플라스틱을 다시 재활용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폐플라스틱을 수소나 전자기기 소재 등으로 바꾸는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지난해 폐플라스틱을 원료로 고순도 청정수소를 생산하는 기술 실증 테스트를 마치고 올해부터 수소 생산 플랜트 건설을 시작해 2024년 본격적인 상업생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4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해 충남 당진에 수소 생산 플랜트를 세우고, 연간 10만 톤의 폐플라스틱 원료를 처리해 고순도 청정수소를 2만2000톤 규모로 생산할 계획이다. 이는 수소차 15만 대가 1년간 운행할 수 있는 규모다.
이 사업에서 핵심은 열분해와 가스화 공정이다. 폐플라스틱을 열분해시킨 후 가스화기에 투입해 일산화탄소와 수소의 혼합물인 합성가스를 만들고 ,이를 다시 촉매반응해 높은 순도의 수소를 생산하는 구조다. 업계서는 해외에서의 암모니아 운송비용 등을 고려하면,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수소 생산이 가격경쟁력은 물론 수소산유국으로서의 입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 역시 폐플라스틱과 폐비닐을 활용한 수소 생산 기술 개발에 나섰는데, 하루 3톤 이상의 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상용화할 방침이다. 열분해 전문기업인 리보테크와 협력해 실증사업을 추진했으며, 수소연료전지와 수소가스터빈 등에 대한 활용 가능성도 살펴보고 있다. 한화솔루션은 폐플라스틱으로 제조한 열분해유로 나프타를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해양 미세플라스틱 오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수 조건에서 분해가 잘되는 플라스틱을 연구하고 있다.
김교현 롯데케미칼 부회장이 지난 3월 31일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진행된 ‘2022 CEO IR Day’에서 오는 2030년까지 리사이클 플라스틱을 100만 톤 이상 판매한다는 계획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롯데케미칼.
또한 자회사인 한화컴파운드를 통해 폐어망을 재활용해 생산한 폴리아미드(PA) 소재를 삼성전자에 갤럭시 시리즈용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한화컴파운드는 해양 폐기물을 재활용한 친환경 소재 연구개발을 전기전자, 전장 부품, 섬유소재 분야로 확대하고, 지속가능한 친환경 플라스틱 솔루션을 제공할 방침이다.
금호석유화학 또한 hy(옛 한국야쿠르트)와 함께 폐플라스틱으로 기능성 재활용 합성수지를 생산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hy의 폐플라스틱 음료 용기를 금호석유화학의 합성수지 제품인 PCRPS의 원료로 활용하는데, 고객이 사용한 용기는 물론 제품 생산단계에서 발생한 불량 용기까지 재활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만든 합성수지는 국내 대형 가전 기업의 에어컨, 냉장고, 청소기, 공기청정기 등 신규 라인업 제품에 사용될 예정이다. 이를 위해 금호석유화학은 최근 고객 가전업체와 제품 테스트를 마쳤다.
▶정유업계, 탄소중립 위해 동참
최근 ‘탄소중립’ 원유 도입이 늘고 있는 정유업계에서도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이 논의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11월 업계 최초로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도입하고 국제 친환경 제품 인증을 받았다. 올해 4월에는 삼성물산과 ‘친환경 화학소재 사업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폐플라스틱을 화학적으로 재활용해 탄소 배출을 줄이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오일뱅크의 정유·석유화학 기술과 운영 노하우, 삼성물산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합해 사업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주영민 현대오일뱅크 사장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역량을 갖춘 두 회사의 협력으로 친환경 저탄소 산업의 생태계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이번 협약을 계기로 현재 진행 중인 친환경 미래 사업을 더욱 가속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GS칼텍스 또한 작년 말 폐플라스틱을 화학적으로 가공해 석유정제공정에 투입하는 열분해유 실증사업을 실시했다. 실증 결과를 바탕으로 우선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약 50톤을 여수공장 고도화 시설에 투입해 폴리프로필렌 등 플라스틱 제품으로 재생산할 계획이다. 그 결과에 따라 오는 2024년 가동을 목표로 연 5만 톤 규모의 열분해유 생산설비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특히 GS칼텍스는 폐플라스틱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데서 더 나아가 다양한 물성의 재료를 혼합해 성능과 품질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업사이클링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2010년부터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친환경 복합수지를 생산해 현재는 전체 복합수지 생산량의 10%까지 확대했다.
친환경 복합수지는 폐플라스틱을 활용해 만든 기능성 플라스틱으로, 기존 복합수지와 동일하게 자동차 내·외장재나 세탁기, 에어컨 등 가전제품의 부품 재료로 쓰인다. GS칼텍스에 따르면 폐플라스틱을 소각하지 않고 친환경 복합수지로 재활용하면 연간 6만1000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데, 이는 소나무 930만 그루를 심은 효과와 같다.
SK케미칼이 화학적 재활용 기술을 활용해 제작한 페트(CR-PET). 사진 제공 SK케미칼.
에쓰오일 역시 플라스틱 재활용 기술을 기반으로 재생사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2021년 4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지난해 말 ‘그린 이니셔티브’를 수립했다. 수소 사업과 바이오연료 사업, 재생 플라스틱 사업 등이 주요 아이템”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사우디에 방문했을 때 아람코와 우리 회사 간 4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이 중 하나가 R&D 분야 협력인데 그중에 플라스틱 폐기물 재활용 기술 협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플라스틱 재활용에 대한 논의는 국가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미중 무역분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등 지정학적 리스크로 국제유가가 널뛰기를 반복하면서 에너지 자원 시장까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탄소중립과 ESG(환경·책임·투명)경영이 강조되면서 석유 중심의 사업구조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며 “최근 법령 개정에 따라 열분해유를 나프타, 경유로 재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이 마련됐는데,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의 수익성도 점차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