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물건은 쓰임새가 있다. 특히 목적이 분명한 가구라면 더더욱. 거실 한가운데 식탁도, 서재 한켠 책꽂이도 그저 물성으로만 여겼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그는 김목이라 불리우는 사내였다. 남자라는 단어보다 사내라는 말이 기막히게 들어 맞는 독특한 분위기의 사람.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그는 좀 멋있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민 스타일이 아니라 그냥 타고 나길 멋지게 타고 난 사람같달까. 새치 머리를 끌어올려 무심하게 턱 묶고, 선 굵은 얼굴이 자칫 쎄보이기도 하는데, 웃는 얼굴은 꼭 짓궂은 애같다. 눈을 번뜩이는데 순수와 날카로움이 벼리어져 있다.
그런 그가 이름을 내건 목가구 개인전을 열었다. 김윤관 목가구展. 평소에 그의 글을 읽고 무릎 친 적 많았다. 우리 나라에서 가구가 갖는 의미, 공예와 예술의 차이, 목공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날카로운 시각이어서 서늘한 느낌마저. 그런데 문맥과 행간이 읽혔다. 그 안의 온기가. 오래 된 나무의 결 같은 따뜻함이 쉼표에 스미고 마침표에 배어났다. 사내는 무뚝뚝해 보여도 뜨거운 가슴일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그러셨지. 저런 사내를 조심하라고.
나는 워낙 공간 미감이 부족하다. 예술 향유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실사구시를 숭앙해 물성이 있는 것들은 대접을 소홀히 했다. 밥 먹는데 식탁 다리 흔들리지만 않음 되지. 좋아하는 책 책꽂이에 잘 꽂혀 있기만 하면 되지. 그래서 전시는 충격이었다. 신사동 이길이구 갤러리 지하 공간에 덩그마니 놓인 가구들. 그들은 기꺼이 물성을 거부했다. 그러자 가구라는 명명을 넘어 작품이 됐다. 지극히 아름다운 예술이 됐다. 작품 배치가 기막히게 아름다웠는데 이를 일컬어 절묘라 부를 것이다.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은 삼방 탁자. 그가 말했다.
ㅡ이 작품 때문에 전시하는 거예요.
요리조리 살피고 요모조모 아무리 뜯어 봐도 용도가 없을 것 같은 형상이다.
ㅡ어디에 쓰는 가구인가요?
ㅡ쓰임을 만들어가는 가구죠.
삼방 탁자는 그가 수도원 기행을 갔을 때 영감을 받아 엄청난 스케치와 준비를 통해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거였다. 구상 후 무려 4년만에 완성한 목공 작품이고. 그런 오늘의 주인공에게 감히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물었단 건데 김목은 그저 싱긋 웃었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쓸모 없는, 기능 없는 가구를 만든 것이다. 그의 미소가 염화시중의 그것이었나 마음 하나가 깊고 맑게 와닿았다.
가구는 예술입니다!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보여준거다. 좋은 나무의 결이 어떤지, 목수가 얼마나 힘든지 외연의 것들이 아니라 다만 작품으로 이야기 하겠다는 뚝심이어라. 우리는 왜 거대한 설치 작품이나 조각 등엔 예술 칭호를 내리면서 유독 목공엔 불친절 한걸까. 김윤관 목수. 싱긋 웃던 그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확고해졌다.
ㅡ그게 제가 전시를 계속하는 이유예요. 너무 힘들고 괴로워도 계속 해야죠!
누군가 해야될 일, 사내 혼자 계속 하는구나 싶었다.
아무도 안 알아줄지도 모를 일, 사내 혼자 버티겠구나 싶었다. 사내의 등보다 아름다운 삼방 탁자를 오래 들여다 보았다. 거기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를 가만히 음미했다. 영성이 스미듯 마음이 투명해졌다. 이제 알겠다. 가구는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