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Walking] 무더위 날려버릴 시원한 바람~ 한국의 알프스, 평창 청옥산 육백마지기
안재형 기자
입력 : 2020.07.31 16:14:13
“아빠, 난 코로나가 젤 싫어. 그것 때문에 수영장도 못 가고 친구들이랑 키즈카페도 못 가잖아.”
앞서 걷던 부녀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제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딸의 푸념이 심상치 않다.
“아마도 이곳은 높은 산이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코로나가 살기 힘들 거야. 그래도 마스크는 꼭 쓰고 다녀야해.”
“그게 싫다니까. 안에서도 마스크, 밖에서도 마스크, 써야 하는 건 알겠는데 친구들 얼굴을 제대로 못 보잖아.”
“그래도 가끔 이렇게 밖에 나오면 나무나 꽃들이 얼마나 예쁘고 고마운지 알 수 있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코로나가 없으면 그걸 더 잘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좀만 기다려봐. 의사 선생님들이 치료약 만들고 있대. 올해 안에 나올 수도 있다니까. 기다려보자.”
“아빠, 난 그 약이 주사로 나오는 것도 싫어. 그거 아프잖아. 젤리처럼 먹는 걸로 나오면 안 되는 건가. 코로나도 눈에 좀 보였으면 좋겠어. 그럼 눈앞에 코로나를 잡아서 버릴 수 있잖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디가 좋은 곳이고 어디가 위험한 곳인지 몰라서 그게 젤 답답해….”
여름 무더위가 시작된 평일 오후, 강원도 평창의 산하가 스위스 알프스 부럽지 않다. 여전히 이곳을 찾는 이들의 입엔 하이얀 마스크가 걸쳐져 있고, 앞서가던 아이가 답답해하던 이유와 비슷한 푸념이 여기저기서 이어진다.
전망대에 올라 숨을 고르고 있자니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들과 엄마의 대화가 들려왔다.
“엄마, 마스크 써, 마스크 써. 위험해 위험해.”
“아니야. 이곳은 바람이 세게 불어서 잠시 벗어도 괜찮아.”
“아니야 위험해 위험해 마스크 마스크.”
위험한 지구에서 살짝 마스크 벗고 바람 맞을 곳을 다녀왔다. 해발 1200여m의 산비탈에 핀 데이지 꽃이 한없이 평화로웠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발아래 펼쳐진 태백산맥
코로나19 시대의 첫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유력한 종착지는 강원도와 제주도다. 제주는 바다로 강원은 산으로 피서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럼 이 두 곳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다? 산? 육고기부터 해산물까지 제대로 보양식을 즐길 수 있는 맛집? 그 모든 게 포함되겠지만 요즘 같은 시기엔 역시 ‘바람’이다.
제주의 바람은 예측할 수 없는 질풍노도(疾風怒濤)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기처럼 힘차고 자유분방하다. 아침까지 앞창을 때리다 점심엔 뒤창을 때린다. 그에 반해 강원의 바람은 비교적 점잖다. 어디에서 시작돼 어느 곳으로 갈 거란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선 제주의 그것보다 어른스럽다.
강원도 평창군이라고 쓰인 이정표를 뒤로하고 앞을 바라보니 하늘이 뿌옇게 흐렸다. 간간이 비도 흩날린다. 오후에 갤 거란 일기예보만 믿고 떠난 호기가 잠시 주춤한 순간 먼 산 너머 하늘 위로 살짝 파아란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적지는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에 자리한 ‘청옥산 육백마지기’. 내비게이션 위의 길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잠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첩첩산중이다.
어쩌면 강원도 중남부에 자리한 평창군의 운명과도 같은 이 풍경은 오롯이 태백산맥이 그려낸 녹음(綠陰)이다. 평창군은 해발 700m 이상인 곳이 전체 면적의 약 60%나 된다. 북쪽과 서쪽, 동쪽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경사진 지형이 이어진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북쪽과 서쪽에는 오대산(1563m)에서 갈라져 내려온 차령산맥이 뻗어 계방산(1579m), 흥정산(1277m), 태기산(1261m), 청태산(1200m), 백덕산(1350m)으로 이어진다. 동쪽에는 황병산(1407m), 고루포기산(1232m), 발왕산(14 58m), 박지산(1391m), 백석산(1365m), 청옥산(1256m), 가리왕산(1561.85m) 등 해발 1000m가 넘는 높고 험한 산들이 연봉을 이룬다.
이 수많은 봉우리 중 굳이 청옥산으로 향한 건 순전히 데이지 꽃밭 때문이다. 곤드레나물과 함께 청옥이란 산나물이 많이 나는 청옥산은 능선이 평탄해 트레커들에겐 이미 유명한 곳이다. 자동차를 타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비포장길도 열려있다. 산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육백마지기라 불리는, 경사가 비교적 얕은 평원이 펼쳐지는데 평지가 드문 산골에서 볍씨 육백 말을 뿌릴 수 있는 곳이라고 육백마지기란 지명이 붙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랭지 채소밭이기도 한데, 익히 알려진 대관령 채소밭보다 고도가 400m나 높아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당연히 모기떼가 찾지 않는 청정지역이다.
바로 그 고랭지 채소밭에 여름이면 축구장 3개 면적에 이르는 샤스타데이지 꽃밭이 조성된다. 꽃밭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직접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런 생각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데이지꽃 너머 펼쳐진 태백산맥의 여운은 스위스 알프스보다 깊고 진하다.
▶차로 오르는 청옥산 정상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험하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가다 약 10여 분간 비포장도로를 올라야 한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길, 차를 타고 오르는 길이다. 포장된 도로에서 비포장도로로 들어서면 살짝 전해지는 스릴에 스티어링휠을 잡은 손등에 닭살이 돋는다. 흙먼지가 심한 산길인데, 올라가고 내려오는 차들이 서로 엉키기도 해 차간거리를 여유롭게 갖고 주행해야 한다. 언뜻 SUV나 트럭, 혹은 사륜구동 차량이 많겠거니 짐작하겠지만 웬걸, 4~5명이 자리를 꽉 채운 세단도 오랜만에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한다.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구릉 너머로 10여 기의 풍력발전기가 멋스럽게 자태를 뽐내고 섰다. 삿갓봉, 남병산, 백파령 등 주변 봉우리도 한눈에 들어온다. 멋진 풍경에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일. 평일에도 꽉 찬 정상의 주차장은 주말이면 도로변까지 주차해야 할 만큼 자리가 부족하다. 관리실에 앉아있던 마을 주민의 말을 빌면 “그래서 아침 일찍, 아니면 오후 6시 무렵에 오는 이들이 꽤 된다.”
데이지 꽃밭은… 꼭 한번 경험해봐야 할 장관이다. 이곳에선 남녀노소 그러니까 성별, 연령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꽃밭에서 나름의 포즈를 취한다. 때로 듣도 보도 못한 포즈로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전망대에 오르면 저절로 눈이 맑아진다.아랫동네보다 체감상 10℃는 낮아진 기온에 서늘한 바람까지 불어오니 말 그대로 피서가 따로 없다. 꽃밭 이곳저곳을 돌며 풍경을 감상하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아쉽기도 한데, 그런 이유로 눈에 담은 풍경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