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축적된 우리나라의 역동성과 창의성, 끼들을 감안하면 이제 우리도 100년 된 글로벌 패션회사가 나올 때가 됐습니다. 한국, 서울에 정체성을 둔 회사죠. 많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비바람에도 꿋꿋이 피는 꽃처럼 100년 가는 세계적 패션회사를 일구기 위해 더욱 분발하고자 합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LUXMEN 기업인상’을 수상한 박은관 시몬느 회장의 소감이다. 1987년 창업한 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는 내년이면 30주년이 된다. 1987년 창업 당시 430만달러에 불과했던 수출 실적이 올해 1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몬느가 만드는 핸드백은 마이클 코어스, 랄프 로렌, 코치 등 유명 브랜드 라벨을 달고 전 세계로 팔려나가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명품 핸드백의 10개 중 1개, 미국 명품 핸드백의 3개 중 1개를 시몬느가 만든다. 핸드백 제조분야 세계 1위로 자리매김한 시몬느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자체브랜드 ‘0914’를 론칭하고 글로벌 톱 브랜드로 키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브랜드들의 태동과 성장을 인큐베이팅하는 플랫폼을 구축해 급변하는 시장환경에 대응할 미래 성장동력을 준비 중이다. 박 회장은 “0914를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고 100년 가는 글로벌 패션회사를 만드는 걸 결코 서두르진 않을 겁니다. 긴 여정이 되겠지만 언젠가는 꼭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미국시장 30% 점유율, ODM을 넘어 IDM으로
시몬느의 출발은 박은관 회장이 사회 초년생이던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부친은 인천에서 원양어선을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주위에선 박 회장이 대학 졸업 후 자연스럽게 아버지 회사에서 일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3년만 맨땅에 부딪혀보겠다”며 평범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때라 무역회사를 들어가야 외국 출장을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청산’이라는 핸드백 수출 전문업체에 들어간 것. 첫 출장지로 이탈리아 피렌체를 가게 된 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박 회장은 “피렌체 거리를 활보하는 이탈리아 남자들 옷차림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죠. 백화점에서 파는 남자 티셔츠가 빨강, 분홍, 노랑 등 색상이 정말 다양한 거예요. ‘남자들도 이런 옷을 입을 수 있구나’ 놀랐고, 패션 쪽 일이 재밌어서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후 박 회장은 핸드백 제조업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기로 하고, 한눈 팔지 않고 정진한 결과 오늘날에 이르렀다. 지난해 시몬느가 올린 매출은 1조 264억원이며, 영업이익은 2001억원이다.
시몬느의 경쟁력은 핸드백을 단순 제조 수출하는 OEM 방식(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을 벗어났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단순 제조에서 나아가 소재 개발하고, 제품 디자인까지 담당하는 ODM(Original Design Manufacturing) 방식으로 운영의 틀을 바꾼 것. 이를 통해 영업이익률이 20%에 달하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내게 되었다. 또한 현재는 ODM조차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인 IDM(Innovative Design Manufacturing)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하며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그는 “IDM은 ‘혁신’을 개발하거나 디자인하는 제조사라는 뜻입니다. 글로벌 패션업계에서 IDM으로 평가받는 제조사는 극히 드문 경우죠”라고 말했다.
‘0914’ 도산매장 내부
‘0914’ 건물 외관
▶명품 핸드백 산업의 히든 챔피언
박은관 회장은 시몬느를 처음 시작했을 때 신생회사라고 무작정 허드렛일부터 찾으려 하지 않았다. “한 단계씩 올라가느니 힘들어도 맨 위부터 시작하자”고 결심한 그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미국 톱디자이너 브랜드 도나카란을 첫 거래처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문턱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그는 “그때만 해도 지금 돈으로 1000달러 이상 고급 핸드백은 메이드 인 프랑스나 이탈리아 아니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한 번만 일을 맡겨 달라고 열 번, 스무 번 찾아다닌 끝에 일을 맡게 됐고, 시몬느는 처음으로 럭셔리 브랜드 핸드백을 아시아에서 개발 제조한 첫 회사가 된 것”이라고 전했다.
시몬느는 도나카란 이후 랄프 로렌, 마이클 코어스 등 유명 브랜드들과 거래하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합리적인 가격대의 명품(Affordable Luxury)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시몬느는 외형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2006년 1억7000억달러 수출 실적이 2008년에는 2억2000억달러, 2013년 6억4000억달러, 2015년 8억8000억달러 그리고 올해는 10억달러 고지를 넘게 됐다. 시몬느는 수출 확대에 따라 이미 진출한 중국과 인도네시아, 베트남 공장에 이어 현재 인도네시아에 제2 신공장 건축을 진행하고 있고, 캄보디아 진출을 준비 중이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품질 경영에 대한 열정
박은관 회장은 ‘Back to Basic’이라는 경영 원칙을 갖고 있다. 여기서 베이직(기본)은 바로 품질이다. 한결같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0~500억을 R&D에 투자하고 있다. 실제로 핸드백 제조 기술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핸드백 소재를 다듬을 때 쓰이는 망치 종류도 시몬느는 50여 가지나 된다. 쇠, 플라스틱, 나무 등 소재와 용도, 크기에 따라 제각기 최적화된 망치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 과정에서 30년간 쌓인 시몬느의 지적 재산은 이 회사의 핵심적 역량이자 품질 관리 방식이 되었다. 박 회장은 “회사가 30년간 이어져 오면서 5700년이라는 핸드백 제조에 대한 경험과 지혜가 쌓였고, 그동안 자체 개발된 18만 개의 스타일은 우리 회사의 자산 1호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체 브랜드 0914, 긴 여정의 시작
지난 30년 동안 미국 시장을 이끌어 온 수많은 패션 브랜드들의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해온 시몬느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담은 자체 브랜드 ‘0914’를 지난해 론칭했다. 시몬느의 헤리티지가 고스란히 담긴 ‘0914’는 한국에 정체성을 둔 글로벌 브랜드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0914’라는 브랜드명은 박은관 회장이 지금의 부인과 결혼 전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날이 9월14일이라 짓게 된 이름이다. 박 회장은 “‘0914’가 글로벌 톱 브랜드로 자리 잡기까지 15~20년 이상을 보고 있습니다. 제가 경영하는 동안 꽃이 만개하거나 열매 맺는 것을 보길 원하진 않습니다. 은퇴하기 전에 봉오리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라고 말했다. 시몬느는 자체 브랜드 사업 이외에도 브랜드 인큐베이팅과 해외 브랜드의 M&A를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