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스맨> 인기 이후 비스포크 남성복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다. ‘비스포크(bespoke)’는 ‘맞춤 제작하다’라는 뜻으로, 유럽에서는 주문맞춤복점을 비스포크 테일러라고 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완전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며 이런 방식으로 그 주문복점이 선보이는 라인을 가리킨다. 비스포크는 100% 핸드메이드를 원칙으로 한다. 그야말로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서 만든 수제옷이다. 반맞춤의 ‘MTM(Made to Measure)’과 같은 뜻인 ‘수미주라’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영화 <킹스맨> 배경이 된 영국의 맞춤복 거리 셰빌로우에 위치한 헌츠맨과 헨리풀이 비스포크 양복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헌츠맨은 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결혼식 예복을 만든 곳이기도 한다. 영국과 함께 비스포크 신사복의 정통성을 지켜가고 있는 이탈리아의 경우 루비나치와 카라체니가 양대 비스포크 테일러다. 카라체니는 전 이탈리아 수상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즐겨 입는 정장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오랜 경력의 장인들이 100% 수제 방식으로 비스포크 정장을 만드는 곳은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제대로 된 비스포크 정장을 만들려면 장인 한 사람이 적어도 이틀이나 사흘을 꼬박 시간을 들여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가이기도 하고 만들 수 있는 수량이 한정되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실제 비스포크를 표방하는 양복점 대다수가 반맞춤이나 기성복에 일부분 핸드메이드 처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와중에 한국 비스포크 명소로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테일러가 있다. 서울 강북에 위치한 장미라사와 AQ양복점 그리고 강남 지역에 위치한 세기테일러, 래리치 등이 그곳이다. 양복점 안에 장인들이 직접 옷을 만드는 아틀리에(공방)를 운영하고 있으며, 외국의 대통령과 갑부들이 한국 장인의 손맛을 높이 평가해 찾고 있는 명소들이다. 현존하는 비스포크 공방 중에서 강북을 대표하는 장미라사와 강남의 신생 비스포크 테일러인 래리치를 운영하는 오너들을 만나봤다.
이영원 장미라사 대표
대통령 정장을 만드는 장미라사,이영원 대표
장미라사는 역대 대통령 정장을 만든 양복점으로 유명하다. 국내 대통령은 물론이고 순방 온 외국 정상들을 위한 비스포크 맞춤복도 60여 년 동안 제작해 왔다. 그 이력이 알려져서 최근 장미라사에는 외국 대통령이나 고위직 정치인과 기업인들로부터 맞춤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이영원 장미라사 대표는 “국내에 주재하는 대사관을 통해 자국 대통령의 정장을 주문하는 요청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마스터 테일러와 함께 한 국가를 직접 방문해 대통령을 만나 비스포크 정장을 맞춰주고 그 자리에서 30여 벌의 추가 주문을 받았다”고 귀띔한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라 국가와 이름의 정확한 정보를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추가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 지도자인 그들이 영국과 이탈리아의 기라성 같은 비스포크 테일러를 제치고 한국의 장미라사를 찾는 이유에 대해 이영원 대표는 “장미라사 재직 후 지난 38년간 맞춤복을 만들면서 최고급 원단을 생산하는 영국 맨체스터와 이탈리아 비엘라 등 거래처를 통해 우리 옷에 대한 입소문이 많이 나 있습니다. 원단부터 일체의 부자재까지 맞춤 제작을 하고, 무엇보다 한국의 손기술이 뛰어나 ‘메이드 인 코리아’를 찾는 마니아층이 생긴 거죠. 오랜 세월을 거쳐 헌츠맨처럼 장미라사만의 비스포크 스타일을 갖게 된 것을 인정받은 셈입니다”라고 전한다.
장미라사에서 만드는 비스포크 정장은 100년 된 전통방식의 저속 직기로 짠 원단을 사용한다. 현대식 직기에 비해 원단 제조기간이 훨씬 오래 걸리지만 사람 손으로 일일이 하다 보니 밀도는 비할 데 없이 촘촘하고 딱딱하다. 이러한 원단으로 만든 재킷은 30년이 지나도 형태가 틀어지지 않는다. 대신 워낙 소량으로 제작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1년 전에 원단 주문이 들어가야 한다. <킹스맨>에 나온 정장도 저속 직기 원단을 사용했기 때문에 딱 떨어지는 갑옷 같은 실루엣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비스포크라는 용어는 함부로 붙이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을 위해 숙련된 장인들이 전과정을 공들여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입는 사람의 골격을 이해하고 옷이 몸과 함께 움직이는 정장이 나오는 겁니다. MTM이나 수미주라는 맞춤복이라기보다 기성복의 변형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라고 말한다.
비스포크 정장의 양대 산맥인 영국과 이탈리아는 옷을 만드는 목적과 태도에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일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영국 남자들은 본업에 충실한 옷을 요구한다. 왕은 왕답게, 기업인은 기업인답게, 정치인은 정치인답게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옷을 맞춘다는 것. 반면 이탈리아 남자들은 광장 문화의 전통 때문인지 남에게 잘 보이고 과시하기 위한 스타일을 찾는 편이다. 한때 일본의 비스포크가 세계적으로 유행했는데, 영국식을 받아들인 이 나라 테일러들이 지나치게 장인정신을 고수하고 미적인 측면을 간과해 지금은 예전 명성만 못하다는 게 이 대표 설명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비스포크 문화가 들어와 따라하느라 지나치게 기능적 요소를 강조해 기성복 유행과 함께 명맥을 달리한 양복점들이 많습니다. 70년대 명동 일대 중심가에만 500여 개의 맞춤복들이 성행했지만 지금은 10여 개 정도만 살아남아 운영되고 있습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비스포크 정장이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는 비실용적이고 불편하다는 시각도 있다. 이 대표는 “남성 정장은 똑같은 옷이 200년 넘게 내려오다 보니 제작이나 착장에 여러 가지 원칙과 의미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절대 불편해선 안 됩니다. 슈트는 공적으로 일하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 옷이지만 하루 종일 입어야 하는 근무복 개념이라 편한 착장감은 기본입니다. 일례로 날씨가 좋은 이탈리아에서 남자들이 정장바지를 짧게 입지만 비오는 날이 많은 영국은 발목이 시려서는 안 되고 바지단이 말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바지단을 밖으로 접어 카브라를 넣습니다. 슈트는 편하고 몸에 딱 맞아져 제대로 된 옷이죠”라고 말했다.
내년이면 60주년을 맞이하는 국내 대표적 비스포크 테일러 장미라사 오너에게 올해 유행하는 신사복에 대해 물었다. 그는 “네이비 컬러에 1인치 간격의 초크(분필)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슈트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금융가에 가면 유니폼인가 할 정도로 유행 중이죠. 네이비 초크 스트라이프 슈트는 남성 정장에서 가장 화려한 옷이면서 신뢰감이 가면서 무엇보다 남성스럽게 보이는 게 매력”이라고 조언했다.
장미라사는 오는 8월 중국 상하이에서 맞춤복 전시회 참가를 통해 대륙으로 고객을 넓혀나갈 계획이다.
김대철 래리치 대표
소공동 30년 장인군단이 만드는 래리치, 김대철 대표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비스포크 양복점 래리치는 생긴 지 10년 된 곳이다. 30~40년이 넘은 장미라사나 세기양복점 등과 비교하면 역사가 짧은 양복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지난 2005년 한국의 셰빌로우라 할 수 있는 서울 명동 소공동 일대에서 내로라하는 맞춤정장 장인 15명을 모아 출발해 기술력만큼은 시작부터 인정받은 양복점이다. 당시 비스포크계 장인들로 어벤져스팀을 구성해 최고급 맞춤정장 사업에 뛰어든 김대철 래리치 대표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금속 공예를 전공한 그는 27세부터 사업가 기질이 발동해 출판사를 차리고 웨딩 잡지 ‘르마리아주’를 발간했다. 그때만 해도 고급 웨딩 잡지가 전무하던 시절이라 시장 평가는 좋았지만 워낙 웨딩 잡지 광고시장이 협소해 3년간 고전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새로운 사업 구상을 하던 그는 소공동 최고 양복제작 기술을 갖춘 장인들이 그때 유행했던 30만원대 기성복 같은 맞춤복을 만들며 아까운 재능을 썩히는 걸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재단사, 봉제사 등 최고 기술자들을 수소문해 15명의 장인들을 모아 함께 래리치 맞춤양복점을 만든 것이다.
래리치에서는 장인 한 사람이 하루 12시간씩 꼬박 3일 걸려 정장 1벌을 만든다. 전 공정을 손으로만 하기 때문에 래리치에서 한 달에 만들 수 있는 양복은 40~50벌에 불과하다. 물량을 늘릴 수 없기 때문에 홍보를 할 필요가 없고 찾아오는 손님 응대만으로도 벅차다. 김대철 대표는 “영국 헌츠맨 같은 비스포크 테일러들은 200년 동안 한자리에서 똑같은 양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술자와 그가 소화할 수 있는 수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죠. 나만의 특별한 옷을 만든다는 장인 정신과 자부심이 있어야만 이어갈 수 있는 사업입니다”라고 말한다.
최근 김대철 대표는 래리치 장인 한 사람이 3일에 걸쳐 비스포크 양복을 만드는 전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를 자체적으로 제작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이 영상에는 30년 장인의 숙련된 양복 제조기술의 노하우와 보고도 따라할 수 없는 래리치만의 특급 기술이 소개된다. 한국 비스포크 정장이 얼마나 까다롭고 섬세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그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의도에서다.
래리치에서 일하는 맞춤복 명장들은 30~40년 경력자들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최고의 마스터테일러에게 경력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는 “한 벌을 3일에 걸쳐 완성하려면 체력과 고도의 집중력을 요합니다. 손바느질로 1mm라도 틀어지면 옷 전체가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죠. 마스터 테일러는 40~60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령대이며, 기술은 경력을 넘어 타고난 분들이 계십니다. 고도의 집중력과 한 땀의 차이가 주는 의복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분들입니다”라고 전한다.
10여 명의 장인들이 한 달에 40~50벌만 만들기 때문에 비스포크 양복은 고가일 수밖에 없다. 래리치의 경우 정장 1벌 가격이 평균 350만~400만원대다. 키톤, 브리오니, 스테파노리치, 에르메스 등 유명 브랜드와 맞먹는 가격에 의아해하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국내 유명백화점을 비롯해 전 세계 유통망을 갖고 있는 키톤 등 유명 브랜드들은 우리처럼 100% 비스포크 방식으로는 물량을 댈 수가 없습니다. 기계 공정과 손 공정을 섞는 겁니다. 저희처럼 공방에서 만드는 옷들은 그들과 차별화를 위해 1~2mm까지 대단히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있고 그 차이를 아는 고객들이 찾는 거죠”라고 답했다.
얼마 전 래리치에 싱가포르의 갑부 기업인이 찾아왔다. 비스포크 양복 마니아를 자처한 그는 전 세계 좋다는 양복은 전부 맞춰 봤는데, 래리치 양복이 그것들과 다른 차이가 있다면 주문을 하겠다는 얘기였다. 김 대표는 그에게 마지막 한 땀까지 손바느질로 만들어 일본 등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보다 정교한 양복이 있으면 환불하겠다고 했고, 옷을 맞춰 간 그는 만족해하며 단골이 됐다고 한다. 김 대표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 눈이 기성복에 익숙해져 있어서 핸드메이드한 옷을 보면 어딘지 부드러운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고 그 옷을 입은 사람에게 남다른 느낌을 갖게 됩니다. 재봉틀로 박아 프레스로 꾹 누른 재킷 칼라와 안감을 융으로 대고 바늘로 찍어 칼라 끝을 살짝 올린 옷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은근한 풍미가 다르죠”라고 한다.
래리치를 운영하면서 김 대표는 지난 10년간 비스포크 정장에 대한 공부를 파고들었다. 외국 브랜드가 나온 잡지를 보며 그들의 선을 연구했고, 장인과 섬유예술가, 디자이너들을 섭외해 다년간 하루 10시간 이상 디자인, 소재, 패턴 등 연관 분야를 배우고 터득했다.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까다로운 손님을 직접 응대하며 상담을 한다. 그는 “손님이 어떤 분위기의 슈트를 갖고 싶어 하는지를 듣고 그 옷에 도달하려면 사용해야 하는 원단과 부자재, 패턴, 디자인을 제안해 줍니다. 고객 1명에 상담은 한 번만 가능하고 가격을 깎아주지 않고 연예인이나 유명인 협찬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래리치는 청담동 인근에 자체 건물을 사들여 장소를 이전할 계획이다. 새로운 아틀리에에는 8년 전부터 시작해온 주얼리 브랜드 ‘벡케’의 공방과 쇼룸도 마련된다. 순수 국내 브랜드인 벡케는 래리치 고객들과 분더숍과 코르소코모를 통해 판매해왔다. 김 대표는 “래리치와 벡케를 통해 단순하고 담백하지만 작고 섬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본질적인 디자인 제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