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상도덕도 없는 거죠. 드럭스토어라고 그럴듯하게 이름만 지어놓고 화장품에 과자에 여성용품까지 없는 게 없잖아요. 근처 화장품가게며 동네슈퍼며 버텨낼 재간이 없죠.”
숙명여대 인근에서 10년간 화장품소매상을 운영해온 정윤자 씨(45)는 지난 2월 가게를 접었다. 몇 해 전부터 점포 인근에 들이닥친 드럭스토어들의 공세에 못 이겨 그 많던 단골까지 모두 잃었다. 숙명여대 앞에는 국내 대표적인 드럭스토어 체인 CJ올리브영과 GS왓슨스 점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매출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월세내기도 빠듯해 다른 지역에 가게 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곳곳에 거미줄처럼 들어선 드럭스토어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인근 동네슈퍼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숙명여대 지하철역 근방에서 소형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김진주 씨(56)는 “드럭스토어가 들어선 후 등하굣길에 들르던 그 많은 학생들이 발길을 끊어 매출이 반 이상 날아갔다”며 “1년 동안 근처 두 군데 슈퍼가 문을 닫았다”고 밝혔다.
드럭스토어에 약이 없다?
변종 SSM(기업형 슈퍼마켓)으로 불리는 생활밀착형 점포 드럭스토어는 1999년 CJ올리브영 1호점이 문을 연 이후 유통규제를 피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일찍부터 새로운 유통채널의 하나로 자리 잡은 드럭스토어지만 국내에서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드럭스토어란 일반적으로 의약품이 주가되어 화장품, 건강보조식품, 식품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는 소매업 형태를 일반 슈퍼마켓이나 편의점과 구분하기 위해 등장했다. 의약품보다 건강 및 미용과 관련된 제품들을 판매하는 드럭스토어를 미국에서는 H&B(Health&Beauty)스토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내는 일반의약품 외에는 약국에서 판매하도록 규정한 약사법 규정으로 인해 화장품이나 건강보조식품을 위주로 판매하는 헬스&뷰티스토어 형태로 발전 했다. 약국이 중심이 된 본래적 의미의 드럭스토어는 코오롱웰케어의 W스토어와 농심 메가마트에서 운영하는 판도라 정도다.
이 두 곳은 약사가 상주하며 일반약품은 물론 조제약을 판매한다. 반면 국내 60% 이상의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CJ올리브영은 300개가 넘는 점포 중에 한두 곳만이 약사가 상주하고 20%대를 차지하고 있는 GS왓슨스의 경우 아예 의약품을 취급하지 않는다. 두 회사는 사업목적을 화장품 및 방향제 판매 소매업으로 등록하고 자체적으로 드럭스토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헬스&뷰티스토어로 표현하고 있다.
드럭스토어에서 취급하는 품목을 살펴보면 편의점만큼 다양하다. 화장품과 약은 기본이고 비타민 등 건강과 관련된 영양제는 물론 음료나 과자, 초콜릿 등 건강과 무관한 식품을 한다. 심지어 고추장이나 곡물 등을 파격할인가로 가판에 내놓기도 한다. 세부적인 매출현황을 살펴보면 화장품 등 뷰티케어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의약품 매출은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판매하는 품목이 중구난방이다 보니 업종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동네상권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
먼저 드럭스토어가 늘어나면서 장사가 안 돼 문을 닫는 약국이 크게 늘어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1725개의 약국이 문을 열었고, 동시에 1793곳이 폐점했다. 그러나 지난 2009년 개업 1735곳, 폐업 1553곳에 비해 신규점포개설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나 폐업 약국 수가 15.5%나 급증한 것은 드럭스토어 출점 확대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대다수 드럭스토어가 조제약을 판매할 수 없지만 약국의 부대수입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강기능성 식품판매 파이를 상당 부분 빼앗아갔다”고 전했다.
약국 외 화장품소매점이나 동네슈퍼의 피해도 크다. 지난해 9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 소속 홍일표 새누리당 의원이 중소기업청에서 제출받은 ‘국내 드럭스토어 현황’ 의 출점으로 인근 소매업체 2곳 중 1곳이 드럭스토어로 인해 금전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총 727개 소매점포를 대상으로 드럭스토어로 인한 피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들 중 380개(52.3%)가 ‘금전적인 피해를 봤다’고 응답했다. 특히 드럭스토어 출점 지역으로부터 800m 내의 조사대상 소매점포는 최근 3개월간 점포운영상태를 질문한 결과 85.1%가 ‘적자’ 또는 ‘현상유지’라고 답했다. ‘적자’라고 답한 경우를 업종별로 분류해 보면 슈퍼마켓이 19.8%로 가장 높았고 화장품소매점(14.1%), 약국(12.8%), 편의점(11%) 순이었다.
홍 의원은 이에 대해 “대형마트, SSM과 달리 드럭스토어는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개설 제한, 사전입점예고제, 영업시간 제한, 의무휴무제 등 규제를 적용받지 않지만, 현장에서는 많은 소매업체들이 금전적인 피해를 본다고 느끼고 있다”면서 “정부는 시장 흐름, 피해 대책, 규제 필요성 등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통법 규제피해 확장 또 확장 “과당경쟁 우려”
최근 몇 년간 드럭스토어 수는 급격하게 증가해 최근 3년간 점포수가 2배나 늘었다. 업계에서는 기존 유통업태의 성숙화와 소득증가와 국내 고령화 추세로 건강·미용분야의 수요확대가 드럭스토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대기업들이 유통규제를 피해 새로운 플랫폼 선점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유통업체 규제는 주로 종합소매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드럭스토어는 전문 소매점 형태로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수의 대형유통기업들은 출점제한이나 영업시간 규제가 없는 드럭스토어를 새로운 먹거리로 여기고 몇 년간 점포수 늘리기와 판촉전쟁을 벌여왔다.
과당 경쟁이 심해지며 출혈도 만만치 않다. 먼저 2012년 야심차게 드럭스토어 시장에 진출한 카페베네는 지난해 1월 사업 시작 5개월 만에 시장에서 퇴장했다. 사업진출선언 당시 카페베네 측은 존 드럭스토어와 차별된 개념으로 약국을 배제한 건강과 뷰티를 집중 타깃으로 적극적 해외 소싱을 통해 세계 시장의 최신 트렌드 상품들을 고객들에게 선보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본사 차원에서 반년도 지나지않아 드럭스토어 사업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다.
선두권에 있는 CJ올리브영과 GS왓슨스는 지난해 실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외형은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금융시스템에 따르면 CJ올리브영은 2012년 3075억660만원의 매출액은 지난해 39.48% 늘어난 4578억4462만원까지 상승하며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빨간불이 켜졌다. 2012년 3억8910만원 흑자에서 31억3973만원으로 적자로 돌아섰다.
GS왓슨스 역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매출액은 910억5800만원으로 2012년 854억9404만원에 비해 상승했지만 영업이익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특히 적자폭은 2012년 21억2879만원에서 99억2397만원까지 심화됐다. 특히 GS왓슨스는 2005년 출범 이후 2011년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줄곧 순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왓슨스의 경우 GS리테일과 홍콩A.S 왓슨이 반씩 출자한 합자회사의 성격 탓에 경쟁사에 비해 의사결정 구조가 복잡한 편”이라며 “트렌드 변화에 빨리 따라가지 못해 경쟁사에 밀린 것”이라 말했다.
경쟁업체에 뒤지지 않기 위해 출점을 계속하다보니 투자비용과 판촉비가 증가했으나 시장변화에 빨리 대응하지 못해 경영위기에 내몰렸다는 분석이다.
약국을 중심으로 내세운 코오롱웰케어의 W스토어 역시 2004년 이후 매년 적자를 거듭해 온 것으로 알려졌고 신세계 이마트가 운영하는 드럭스토어 ‘분스’는 지난해 수익성을 이유로 추가출점을 자체적으로 전면 중단한 바 있다.
(위)롯데쇼핑 ‘롭스’ 홍대점, (아래)신세계 ‘분스’ 강남점의 뷰티코너
‘규제 시작될라’ 미리 점포수 늘려놓자
수익성에 빨간 불이 켜진 CJ올리브영과 GS왓슨스는 내실 다지기에 들어섰다. 한 CJ올리브영 관계자는 “올해는 아직까지 추가 출점계획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지난해 외형중심의 투자가 중심이었다면 올해는 수익률 제고를 통한 내실다지기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GS왓슨스도 올해 추가 출점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선두권 업체들이 몸을 낮추고 있지만 경쟁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올해는 후발주자들의 시장진출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W스토어는 적어도 올 한 해 100개의 점포를 새로 열겠다고 공언했다. 지난 1월 1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경용 코오롱웰케어 대표는 “올해 신규출점을 통해 250호점까지 매장을 늘리겠다”며 “자체상표(PB) 상품을 대거 내놓고 수익성 향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 롯데쇼핑이 운영하는 ‘롭스’는 현재 10개인 점포수를 올 한 해 30개까지 늘려 외형성장에 나선다. 이마트가 운영하는 ‘분스’ 역시 지난해 전면 중단한 추가출점 재개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마트 한 관계자는 “(출점재개 여부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아직까지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몇 개의 영업망을 확대해 나갈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또 다른 유통공룡 농협도 사업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농협은 하나로마트가 새로운 판로 개척의 일환으로 드럭스토어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하고 준비 작업을 진행 중으로 알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드럭스토어 출점경쟁이 치열해지고 골목상권 침해가 현실화되면서 올해 국회에서 규제논의가 본격화 될 가능성이 크다”며 “다수 업체들이 신규출점 제한 등을 우려해 사업진출을 서두르는 한편 점포수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