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과 대륙을 잇는 거점 항구로서 ‘블라디(Vladi, 정복하다)+보스토크(Vostok, 동쪽)’라는 이름 그대로 러시아 정부 극동정책의 핵심 거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수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방문해 경제영토를 넓히기 위한 동진(東進)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극동 러시아 개발을 통해 미국-중국-일본을 견제하면서 동북아 패권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생각도 깔려있다. 작년에는 극동개발부를 신설해 각종 개발 프로젝트도 가동하고 있다. 최근 210억달러를 투입해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사회 인프라를 전면 개선했으며, 지난해 9월에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공항·도로·문화시설 등 한꺼번에 탈바꿈
현오석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대한민국 14개 부처 관계자들은 7월 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빅토르 이샤예프 극동개발부 장관 등 러시아 부처 관계자들과 ‘제13차 한-러 경제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개최한 뒤 러시아 극동지역과 북극해 연안 항만 개발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물류와 철도 등 러시아에서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수 있는 협력 기반도 조성했다.
또한 의료서비스, 보건, 의학 등 분야 협력에도 힘쓰기로 했다. 한국-북한-러시아 등을 연결하는 철도망과 전력망 사업 추진방안도 논의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7월 3~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매경 블라디보스토크 포럼에는 대한민국에서만 150명에 달하는 투자사절단이 참여했다. 연해주지사 등 극동 러시아 인사 200여명도 포럼에 참석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일부 중소기업은 포럼에서 수출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하는 등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극동 러시아는 한국과 가스, 물류, 건설, 철도,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철강, 전력, 농수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협력을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도 가깝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인 이주 150년 역사와 항일운동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 한·러 경제협력에 기반한 외교적인 노력은 교착상태인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수도 있다.
6월 말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비행기로 2시간 반 걸려 찾아간 블라디보스토크 신공항. APEC 개최에 맞춰 신설된 곳이라 현대식 시설을 갖췄다. 입국 심사를 거쳐 짐을 찾아 빠져나오기까지 3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서비스 속도가 빨랐다.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역시 최근에 만들어져 왕복 4차선으로 곧게 뻗어있다. 주요 건물 외벽은 새롭게 단장했고 상하수도 보수공사도 진행 중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루스키섬을 연결하기 위해 신설된 ‘블라디보스토크 대교’는 랜드마크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최신식 메디컬센터가 문을 열었고, 5성급 호텔과 대규모 실내체육관이 건설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작년 9월 루스키섬에서 개최한 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고 있다. 공항, 도로, 대교, 호텔, 가스, 상하수도, 문화시설 등이 한꺼번에 탈바꿈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개발부는 △인프라 개발 △에너지 △산업생산 등 3개 분야에 수조원의 사업비를 추가 투입할 계획이다. 이양구 주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글로벌 경기불황에 따른 돌파구로 극동 시베리아 개발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고 전했다.
극동 러시아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다. 석유매장량은 세계 7위, 천연가스는 세계 1위, 석탄은 세계 2위를 자랑한다. 극동 러시아 면적은 러시아 전체의 36.4%를 차지한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인구는 62만명, 이를 포함한 극동 러시아 인구는 700만명에 불과하다. 내수시장이 작아서 자생적으로 도시가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해외기업 투자 유치에 상당히 공들이고 있다. 특히 유럽 경제가 침체된 상황에서 아시아태평양 국가와의 경제협력에서 성장동력을 찾고 있다.
현대중공업·포스코 극동 러시아 진출 활발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APEC에 참가해 “아시아태평양 국가 잠재력이 확대되는데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러시아와 교역이 늘어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바이칼-아무르 철도를 확대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대한민국 기업 중에서는 현대중공업 그룹이 가장 적극적으로 극동 러시아에 진출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시내를 향해 승용차로 달려 5분 만에 만나는 거대한 공장에는 현대중공업이라는 낯익은 브랜드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현대중공업이 러시아 전력기기 분야를 선점하기 위해 만든 교두보이다. 10만㎡ 부지에 연간 350대 고압차단기(GIS, Gas Insulated Switchgear)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지난 1월 준공됐다.
고압차단기는 초고압의 송전 전류를 연결하거나 차단하는 장치로, 전력설비를 구성하는 핵심기기이다. 현대중공업은 시장상황에 따른 단계적인 설비 증설을 통해 이르면 오는 2015년까지 생산규모를 연간 500대 규모로 확대할 예정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를 타고 3시간 정도 가면 지평선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벌판이 나온다. 이곳은 현대중공업이 소유하고 현대자원개발이 운영하는 ‘현대연해주농장’이다. 농장 총면적은 2만3576ha로 대한민국 식량안보를 위한 전초기지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현대호텔은 러시아 최고급 호텔로 평가받는다.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허허벌판이던 블라디보스토크에 1997년 뚝심으로 현대호텔을 건설한 이후 그 유지를 현대중공업이 이어가고 있다.
총 153개의 객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5개의 리셉션룸을 비롯해 다양한 부대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 호텔의 컨퍼런스룸이 APEC 정상회담 등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성호 현대호텔 사장은 “한국의 서울 계동 현대사옥을 빼닮은 건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랜드마크”라며 “반기문 UN 사무총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이 투숙한 적이 있는 등 최고급 호텔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LS그룹 계열사인 LS네트웍스도 ‘CIS 지역 전문 종합상사’라는 목표를 내걸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업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러시아 등은 선진국에 비해 도로와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이 미비하기에 종합상사 업종에 신규 진입한 LS네트웍스로서는 ‘기회의 땅’이다. 건설-토목을 비롯해 각종 개발의 기회가 무궁무진하다.
특히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등 각종 대규모 이벤트들을 앞두고 있어 개발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포스코는 시베리아에서도 혹한지역으로 알려진 극동 러시아 사하공화국에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포스코 설계와 모듈러 전문 계열사인 포스코A&C는 ‘엘가광산 개발 프로젝트’ 파트너로 참여해 극동시베리아 개발에 본격 나서고 있다.
포스코A&C는 엘가탄전 근로자용 숙소, 호텔, 경찰서, 병원 등 주거단지 건설 협약을 러시아 최대 자원회사인 메첼사와 지난 2011년 체결했으며, 2014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5~6개 정도의 추가 주거단지 사업과 배후 신도시 건설 사업 참여도 협의 중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거리
쌍용 액티언·카이런 ‘고장나지 않는 차’로 유명
포스코는 러시아의 풍부한 자원과 인프라 개발에 적극 참여하려고 지난 2011년 패밀리 통합 러시아법인을 설립하고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역점을 두는 사업이 극동개발이다. 포스코는 철강, 건설, 에너지 등 개발에 필요한 다양한 사업군을 보유하고 있어 러시아 정부로부터 개발파트너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스코 계열사인 대우인터내셔널은 러시아에서 트레이딩과 자원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러시아로 포스코산 API후판, 트럭, 버스 등 상용차를 수출하고, 제3국의 철강재와 화학제품을 러시아로 공급하고 있다.
또한 산림자원 확보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작년에 국내 합판 제조기업인 신광산업과 공동으로 시베리아 산림자원 개발에 관한 투자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 3.5배 면적에 해당하는 산림자원을 확보했으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한국 등에 가공제품을 판매할 방침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위치한 극동 최대 자동차조립기업 솔러스(Sollers)는 쌍용차의 조립생산 파트너이다. 쌍용차의 액티언, 카이런, 렉스턴 등이 이곳에서 생산되어 러시아 전역으로 보내진다. 쌍용차는 국내에서 판매부진을 겪어왔지만 러시아에서는 ‘고장나지 않는 차’라는 수식어 덕분에 솔러스를 통해 연간 2만7000대가량 생산되어 판매되는 등 부활하고 있다.
알렉산더 코니척 솔러스 사장은 “월별로는 러시아산 쌍용차의 현지 판매규모가 한국산 쌍용차의 한국 매출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LG상사, 한국전력, GS칼텍스, 삼성전자, LG전자, 오리온, STX그룹 등이 극동 러시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 인천공항-블라디보스토크 노선을 신설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인 이주와 항일 해방운동의 성지인 만큼 역사적인 친밀도가 높다.
약 150년 전, 조선시대 말 한인들이 농지개척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뒤 ‘고려인 개척리’를 만들었고, 이어 러시아 당국 이주정책에 따라 외곽지역에 ‘신한촌’을 세웠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가 피습당하기도 했으며 1937년에는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밀려났다가 해방 후에 일부 돌아왔다.
김한일 코트라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장은 “극동 지역은 역사적으로나 정치·경제·외교적으로 봐도 우리에게 미래의 땅이며 기회의 땅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