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맑았다.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올 때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실타래가 살짝 베일을 벗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면 직접 책장에서 관련 책을 찾아 하나하나 또렷이 읽으며 답했다.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을 만났다.
1970년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장관급이던 초대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이사장까지,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2009년 세계미래포럼을 세우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20여년을 경제부처에서 일한 탓에 ‘경제통’으로 불리던 경제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인생 후반기에 미래를 논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재, 그의 포럼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기업인들이 하나 둘 늘어나자 갸우뚱하던 이들의 고개가 바로 섰다.
“우리 포럼에서 운영하는 CEO 과정에 참여하는 인사들 중엔 잘나가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그런데 현직에 있을 때 갑중의 갑이었던 사람들이 월급쟁이 생활을 끝내고 나면 저 밑에 을로 추락해요. 포럼에서 연락하던 이들과 네트워크도 끊어집니다. 스스로 낙담하고 우울해하죠. 인생설계는 멀리 봐야지. 그럼 그렇지 않을 텐데, 월급쟁이의 약점이 앞만 보는 거예요. 충분히 다시 올라갈 수 있어요. 인생설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왕년에…’로 시작해 ‘그랬던 적이 있다’로 끝나는 자기자랑보다 지겹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미래를 논하다 만들었다는 세계미래포럼은 그의 말처럼 과거지향이나 현실 안주에 빠지려는 사회 분위기를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로 변화시키고, 미래지식시장에 미래경영을 지원하는 게 설립 취지다.
“미래를 모르면 방향감각을 잃고 걷는 것과 마찬가지죠. 걷다보면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다들 똑똑합니다. 그러니 주변의 누구나가 스승이에요. 나이나 직급이 높다고 군림하고 뭘 시키려고만 한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미래가 뻔히 보이는 행동 아니겠어요.(웃음)”
과연 이영탁 이사장이 생각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미래의 당신, 미래의 대한민국은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살짝 묻고 쫑긋 귀를 세웠다.
큰 리더십? 가정에서의 리더십이 우선이다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예전에 블로그를 운영할 때 ‘항심(恒心)’이란 단어를 대문에 걸었다. 항심은 맹자가 임금에게 한 말인데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백성들의 마음이 힘들면 마음도 한결같지 않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여 살리는 게 지도자의 첫 번째 덕목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대비를 해야겠지. 내겐 예비하는 사람이 되자란 의미인데,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 가훈을 묻더라고 그때 예비하는 사람이 되자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살아보니 미리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
그럼 미래는 무엇인가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상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지. 순수 미래학자의 예측과 내가 이야기하는 미래는 다르다. 어떻게 그분들을 따라가겠나.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이런 사회가 온다는데 우리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을까란 생각, 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이끌어가야 하지 않겠나란 생각이 든다.
가훈이 예비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득을 본 일도 있을 법 하다
그런데 한 가지, 내 성격이 좀 급하다.(웃음) 그래서 어떨 때는 생각이 너무 앞서가서 아쉬울 때도 있었지. 미리 준비한다지만 사실 현실에선 맞지 않을 때도 있거든. 반대로 앞장서기는커녕 뒤따라가면서 편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가는 게 좋은 평을 받기도 하지만 왜 그리 혼자 앞서 가냐고 엉뚱하게 불똥이 튈 때도 있다. 그래서 DJ가 이런 말을 했다. ‘한 발짝 앞서지 말고 반발만 앞서라’고. 미래를 살아가는데 생각은 멀리 두고 실제 행동은 차분한 게 더 현실적일 때도 있다.
차분한 행동은 변화가 두려운 것 아닌가
사람들은 꼭 세상의 한 면만 보고 주장한다. 그런 질문도 한 면만 보는 것이지.(웃음) 요즘 몽테뉴의 <수상록>을 보고 있는데, 여기에 참 좋은 글귀가 많다.
그중에서 ‘어리석은 자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기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고 흥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이 먹고 세월이 흐를수록 생각이 깨이고 달라져야지. 공자도 인생 70세에 생각이 70번 바뀐다고 했다. 우리 사회지도층 인사들 중에는 너무 일관성만을 주장해서 유연성이 없어지는 걸 지적받곤 한다. 기본원칙은 바뀔 수 없지만 사물을 보는 시각을 계속 바뀌는 것이다.
현재 미래를 위한 대한민국의 화두는 창조경제다. 의미를 두고 논란이 많은데
경제발전은 단계에 따라 바뀌고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 아닌가. 예전에 성장이 우선이냐 복지가 우선이냐를 놓고 말이 많았지.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소득이 우선일 땐 성장이 우선이고 갈수록 복지가 우선인 게 당연한 것이지. 창조경제도 왜 의미를 갖고 왈가왈부인지. 그동안 우리는 모방경제이지 않았나.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모방경제였다. 어느 정도 시기가 왔으니 창조에 무게를 두자는 설명이 옳다. 나라의 경제, 리더십도 소득수준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게 자연스럽다.
이른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얼마 전에 <팔꿈치 사회>라는 책을 봤는데, 여기에 이런 설명이 있다. 우린 경쟁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건 강자, 가진 자의 논리다. 경쟁을 해서 1, 2, 3등을 가리고 승자와 패자를 가리자는 건데, 그건 이길 자신이 있는 사람들의 논리란 것이지. 생각해보면 아무리 해도 이길 자신이 없는 사람이 경쟁을 강조하겠나. 다분히 승자의 논리다. 그럼 다 같이 이기는 사회를 만들 순 없을까. 이게 책의 핵심이다. 우린 늘 경쟁의 논리에만 귀를 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다른 사람으로 본다. 문제다.
그건 지난해 직접 출간한 소설 <이정구>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렇지. 우리 사회는 1%와 99%,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양극화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는 지적만 하고 해법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 경제민주화란 거창한 화두에 해법이 없는 것이지. 나름 해법을 제시한 게 소설 <이정구>다.
책 얘기 좀 더 해보자. 재벌을 겨냥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1%를 재계의 재족, 관료계의 관족, 정치계의 정족, 교육계의 교족, 노동계의 노족, 예술계의 예족, 의료계의 의족, 법조계의 법족 등 10여개 종족으로 나눠 제시했는데, 이정구는 재족의 대표이자 재벌을 뜻하는 벌족의 상징이다. 그룹 총수 이정구의 미래의 이야기인데, 앞으로 재벌들이 이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소설로 썼다.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돈을 험하게 벌었거든. 원래 큰돈은 개처럼 벌어야 한다지 않나. 대신 인생 후반에 멋있게 써야지. 미국의 카네기나 록펠러가 얼마나 무자비하게 돈을 벌었나. 그런데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쓰고 갔다. 우리가 약하고 부러운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2~3세로 승계되는 과정도 투명하지 않고….
어찌 보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갑을관계가 떠오른다. 선견지명인가
2010년에 아프리카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는데, 수십 년 묵은 정권들이 하루아침에 쓰러졌다. SNS가 위력을 발휘했지. 그럼 SNS가 발달한 선진국에는 재스민 혁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결국 런던가 시위, 월가 시위로 이어졌다. 우린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하지. 더 극심한 폭풍이 불 것 같다. 어쩌면 99%에 더 나쁜 이들이 많을 수도 있지. 하지만 1%가 99%에게 나보다 더 나쁜 사람 아니냐고 반문하는 건 답이 아니다. 가진 게 많은 자가 베풀고 희생해야지. 그래야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물론 현재에도 세간의 부러움을 받는 1%가 분명 있겠지. 사람들이 진정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걸까 아니면 그가 가진 돈을 부러워하는 걸까. 많이 가져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부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기 때문이다. 진정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다. 엄청난 고통과 진통, 고행의 과정을 거쳐야겠지.
<이정구>를 출간하면서 다음 소설 소재는 정치계라고 했었는데
작년 12월 19일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1년 동안 해야 할 일을 미리 소설로 제시하겠다고 했는데, 그건 특정인물을 염두에 둬야 해서 안 되겠더라고.(웃음) 고민하고 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모두 책임지진 못한다공직생활 중에 후배가 잘 따르는 선배로 정평이 났었는데, 나름의 비결이 있다면
혼자 독선적으로 일하기보다 늘 상의했지. 상대부처에도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과연 옳은지 사전에 조율하고 상의했다. 그 점을 강조했던 것 같네. 주도권은 지켜가면서 늘 상의해서 진행했다.
독불장군은 없다?
세계미래포럼을 시작한 지 만 4년이 지났는데, 포럼의 교육생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교육이 끝난 후에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일례인데 그런 모습이 미래를 살아가는 방식이지. 혼자가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고 공유하는 방식. 내가 요즘 강의하는 게 각자가 나름 배울 점이 있다는 건데, 절대 혼자 잘난 척 해선 안된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절대 혼자하려 하지 말라고 한다. 집단지성을 모아야지. 현 시대는 독불장군, 영웅이 없는 시대다. 당신보다 설사 주변사람들이 덜 똑똑해도 그들의 의견을 모으면 훨씬 더 좋은 의견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럼 어떤 리더가 돼야 하나
이 세상은 입 밖으로 낸 말을 모두 책임지지 못한다. 내가 남에게 이렇게 하라고 주문하기 전에 나부터 컨트롤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하지 않을까. 그러질 못하기 때문에 사회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서지 않는다.
한때 사회지도층이 공정사회를 만들자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공정사회는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다. 앞으론 순서를 뛰어넘어 도약하는 일 없이 차곡차곡 순서를 밟으란 말인데, 그런 말을 하려면 자기부터 공정했어야지. 결국 난 이미 이 자리에 올랐으니 앞으로 내 자리 넘보지 말란 말과 뭐가 다르겠나. 자기 자신부터 바르게 만들어놓고 사회지도층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걸 실천하려면 내가 나를 이겨야겠지. 자기경영, 셀프매니지먼트가 그만큼 중요하다.
내가 나를 보는 방법을 제시한다면
한참의 과제다. <워치미>는 내 자신을 볼 때 내 시각이 아니라 영혼의 시각으로 보면 훨씬 더 잘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행복학 강의를 보면, 특히 하버드 대학에 그런 강의가 많던데 그 어떤 경우에도 돈 이야기가 없다. 동양의 오복을 보면 오래살고 돈 많은 걸 이야기하는데, 아무렇게 살아도 돈만 많으면 행복한 걸까. 결국 자아실현이다.
오랜 공직생활을 거쳤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고용률 70%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부정책은 참 힘없는 정책 아닌가. 일례로 헌법을 고쳐서라도 도곡동, 대치동의 아파트값을 잡겠다고 전심전력을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전체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고 고용을 늘리게 하고… 어떤 면에선 능력 밖이다. 한계가 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정부의 역할이 작아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