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직장생활의 필요악, 왜?
“최근 트렌드를 놓쳐 위기를 맞은 굴지의 대기업이 CEO를 바꾸고선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이전, 그 이전 CEO 라인이 모두 인사에서 제외됐어요. 실제로 쫓겨난 분들도 여럿입니다. 나온 분들이 그러더군요. 이쪽이 득세하면 저쪽이 소외당하길 반복했는데 이번엔 아주 배척됐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줄 하나 더 걸치는 건데 아쉽다고 말합디다. 이래서 사내정치가 어렵습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중소기업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한 퇴직 임원이 전한 이야기다. 그는 “신임 임원이 가장 먼저 둘러봐야 하는 것 중 하나가 회사 임원진 중 자기 위치”라고 강조했다. 한 헤드헌팅업체 임원은 “지난 연말 정기인사가 있기 석 달 전에 대기업 부장급 이상 인사들의 문의전화가 많았다”며 “만약 승진에서 미끄러져 옷을 벗게 되면 어디 취업할 곳이 없는지 살펴보려던 것인데 그런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우선 사내정치에 힘쓰시라 충고했다. 아부란 인식 때문에 사내정치의 이미지가 부정적이지만 현실에선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한 중견기업 인사부장은 “이른바 사내정치를 인정하는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며 “업무 성과가 비슷하거나 좋은데 정기인사에서 소외됐거나 지금까지 업무와 전혀 다른 업무를 받았다면 사내정치를 의심해야 한다. 만약 임원이라면 의심이 사실일 때가 더 많다”고 귀띔했다.
흔히 직장생활의 필요악이라 불리는 ‘사내정치(Office Politics)’. 전 세계 어느 기업도 결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리서치에서 “분명 존재한다”고 인정된 비공식 라인이다.
학계의 반응도 마찬가지. 사내정치에 대한 가설이나 주장, 명확한 법칙을 세울 수 없어 금기시되곤 했지만 최근엔 이러한 반응 자체가 사내정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 예나 지금이나 사내정치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변함없다. 일례로 1989년 에이브러햄 잘레즈닉 당시 하버드 경영대학원 심리분석학 교수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 기고문에서 “경영자가 종종 제품이나 소비자보다 사내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식품회사 하인즈의 토니 오라일리 전 대표는 아끼는 직원들을 아일랜드에 있는 자신의 성에 초대했다. 초대장을 받는다는 건 ‘당신은 내 사람’이란 표시였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도 플로리다에 있던 자신의 집 옆에 측근들의 집을 사주곤 했다.
Chapter 2 사내정치의 기본은 성과
사내정치에 대한 직장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지난해 9월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설문(남녀 직장인 361명 대상)을 살펴보면 직장 내 권력에 대한 직장인들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설문 참가자들은 ‘현재 직장에서 권력을 가진 상사가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란 질문에 10명 중 7명이 ‘그렇다’(74%)고 답했다. ‘직장 내 권력을 잡기 위한 조건’을 묻자 성별, 소속부서(담당업무), 업무수행 능력이 40~60%의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반면 사내정치 능력은 60~80%의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응답자가 많았다.
권력을 얻기 위한 기본 조건에 관한 설문에서도 ‘인적 네트워크’(25.8%)가 ‘업무능력 및 전문성’(25.5%), ‘좋은 이미지와 평판’(21.3%), ‘자신감 넘치는 말과 행동’(12.7%), ‘출신학교 및 집안 배경 등 스펙’(14.4%)보다 높았다.
커리어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사내정치에 성공하기 위해선 토양을 다지고 좋은 씨를 뿌려 꽃이 피게 해야 한다”며 “특히 신임 임원이라면 부하직원(토양)들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리더십(씨앗)이 상사나 사장, 회장(꽃)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내정치는 꼭 해야 하는 직장생활일까. 헤드헌팅업체 커리어케어의 박선규 상무는 “사내정치의 기본은 탁월한 업무성과”라고 강조했다. 여느 직장생활의 기본 원칙처럼 탁월한 업무성과에 곁들여진 사내정치가 A를 AA로 만든다는 것이다.
“대기업 임원들의 연령이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사, 상무급들의 연령이 40대 초반이 됐어요. 이 시기엔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생인 경우라면 더하겠죠. 원하든 원치 않든 사내정치에 나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과가 없다면 아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내세울 성과가 있어야 위·아래로 인정받을 수 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사내 최신 정보를 가장 먼저 챙길 수 있습니다. 탁월한 성과를 그 이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요.”
Chapter 3 7대3 황금비율
중견기업의 해외업무를 담당하던 A상무는 지난 인사에서 재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2012년 해외전략을 수정하며 야근하던 시기여서 충격이 더했다. 2011년 업무성과는 2010년에 비해 10% 이상 성장했고 부서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던 터라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통보 이후 사내에서도 A상무에 대한 얘기가 돌았다. 부하직원들을 비롯해 타 부서 직원들도 한결같이 “저런 분 밑에서 배우기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저런 결정을 내리는지 모르겠다”며 수군거렸다. 책상을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하다 하도 답답해 전무에게 넌지시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회사의 결정”이라는 교과서적인 얘기뿐이었다. 퇴사 후 헤드헌팅업체를 찾은 A상무. 답답한 사정을 이야기하자 헤드헌터가 원인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부하직원들과는 열심히 소통하셨는데 그에 비해 윗분들과는 소원하셨네요. 아무리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 회장님을 뵙잖아요. 그때 업무 외 얘기를 나눈 적이 있나요. 하다못해 임원끼리 골프모임도 한 번 갖지 않으셨네요. 부하직원들과의 소통이나 평판이 윗분들에게 전해져야 하는데 그걸 오히려 상무님이 막고 계셨네요. 임원이 되시면 윗분들을 뵐 기회가 많아집니다. 7대3 정도로 부하직원보다 윗분들에게 더 잘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을 쥔 쪽을 신경 써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Chapter 4 경영자의 시각은 기본
2년 전 이사로 진급한 B이사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시쳇말로 ‘짤렸다’. B이사의 퇴진을 놓고 한동안 사내 분위기가 들썩였다. 그 자신에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25년 간 근속하며 이뤄낸 성과의 실패였고 후배들 입장에선 늘 고민을 상담해주던 멘토의 추락이었다. 부장 시절 회사에 이것저것 건의하며 업무처리 속도, 경영, 직원 복지 등의 개선에 앞장서던 선배였기에 후배(부하직원)들 사이에선 “도대체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야 짤리지 않는 거냐”는 푸념이 돌기도 했다.
B이사는 임원으로 승진한 후에도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개선점을 정리해 임원회의 때마다 보고했다. 매주 임원회의 때면 B이사의 건의사항이 이렇게 개선됐다는 보고서가 올라오곤 했다. 부서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사내 임원진 사이에서도 목소리를 찾은 것 같아 나름 뿌듯했다. 더군다나 임원진 중 반 이상이 공채 출신이어서 서로 소통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외부에서 영입된 임원들은 어떻게든 어울려 보려고 본부장(전무)과 약속을 잡곤 했는데 두 기수 아래 후배인 B이사는 ‘볼 것 안 볼 것 다 본 사이’라는 생각에 술자리에서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퇴사 후 집 앞 호프집으로 B이사를 불러낸 본부장이 한참 뒤척이다 그에게 얘기를 꺼냈다.
“B야, 회장님 지시라 어쩔 수가 없었다. 임원회의 자리가 신문고냐고 하시면서 화를 내시더라. 네 건의로 사내의 업무처리 속도도 높아지고 효율도 좋아진 건 나도 인정한다. 그런데 꽃노래도 한 번이 좋은 것이지 자꾸 반복되면 딴죽밖에 더 되겠냐. 회장님 역성 때문인지 부사장도 내게 그러더라. 넌 왜 아직도 직원 마인드로 회의에 참석하냐고. 경영자 입장, 회장 입장에서 회사를 바라보라고 승진시켰더니 아주 더 난리라고. 어떻게 잘 설득해서 넘어가 볼까 했는데 회장님 말씀 나오고 3일 만에 이렇게 됐다. 미안하다.”
Chapter 5 선배(OB)는 교본
중견기업에서 이사로 근무하다 동종업계 상위기업으로 스카우트된 C상무는 첫 출근 당시만 생각하면 얼굴이 벌게진다. 지금 생각해도 속된 말로 뻘쭘했다. 부하직원들과도 서먹했지만 특히 윗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수없이 얼굴을 익힌 선배들이지만 막상 아랫사람으로 한 회사에 근무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의미였다. 부하직원들과는 실수를 인정하며 소통이 시작됐다. 직원들과 얘기할 때마다 “내가 OO에 있을 때는…”이란 말이 버릇처럼 튀어 나오자 직원 중 하나가 “그 회사는 우리보다 하위기업인데 왜 자꾸 빗대시냐”고 항의한 것이다. 바로 사과했다. 그러곤 회식 자리에서 자신의 위치와 고민을 살짝 털어놨다. “상무님도 그런 고충이 있는지 몰랐다”며 직원들이 하나 둘 회사의 이모저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윗사람들과의 소통은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업무 지시로 임원진 OB 모임을 주재하며 속이 뻥 뚫렸다. 사장급 퇴직 임원이 즐비한 모임에서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옛 추억과 함께 현 임원진에 대한 에피소드가 술안주가 됐고, C상무에 대한 충고로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현 사장은 자신의 밑에 있을 때 이러했고 성향이 이렇다”, “당신 바로 위 전무는 내가 입사시험 때 뽑은 인물이다. 골프는 엄청 좋아하는데 타수가 늘지 않는다”, “부사장이 좀 까칠한데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하는 것 같더라” 등등 좀처럼 듣지 못했던 고급 정보가 한 무더기 쏟아졌다. 모임 이후 C상무는 윗사람들과 대화하는 주제가 달라졌다. 업무 외엔 별달리 할 말이 없었는데 이젠 클래식 음악과 골프로 대화를 이어갔다. 자연스럽게 저녁 약속과 주말 약속이 이어지고 회장과의 미팅도 늘었다. C상무는 지금도 OB 모임에 빠지는 법이 없다. 이번 설에는 몇몇 퇴직 임원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Chapter 6 임원은 왕따? 고수는 정중동
D이사가 임원이 된 후 달라진 점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꿈꾸던 방이 생겼다는 것이다. 방문엔 이사실이라고 또박한 글씨체로 명패가 달렸고 문 앞엔 비서가 스케줄을 챙기고 있다. D이사는 회사에 응원군이 많았다. 부하직원들은 그를 존경했고 선배들은 조언을 잊지 않았다. 그와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전무는 “임원이 되면 절친한 동료나 선배가 모두 적이다. 1년 임시직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동료 임원에게 패를 드러내면 어느 순간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패가 될 수도 있다. 그땐 후배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며 충고했다.
D이사는 우선 부하직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도 꿈꾸던 방이 애물단지였다. 고개만 들면 보이던 직원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자신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회의 공간으로 제공했고 때론 음식을 사다가 직원들과 함께 방 안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임원의 위치나 격식보다 선배로 다가섰고 그때마다 “이번 일 마치고 회식은 MT로!”, “부서 격려금은 우리 것!” 등 나름의 구호를 만들어 단기간의 비전을 제시했다.
가장 지양했던 건 말 바꾸기. 절대 “이게 아니라 이건가”,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등의 말 대신 “이렇게 하자”, “이건 아니다” 등 단호한 말투를 지향했다. 특히 어떤 순간이든 비아냥 대는 이는 그 자리에서 꾸짖었다.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사내에서 일어나는 일이 속속 보고 되기 시작했다. 위에 보고할 때면 “직원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더 윗분들은 이런 생각으로 알아보신 것 같습니다” 등의 얘기를 슬쩍 첨가했다.
급기야 사내에서 열린 ‘직원과 CEO의 대화’ 자리에서 부서 직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사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아침이면 빨리 출근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애교 섞인 야유가 이어졌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사장의 시선은 D이사를 향하고 있었다.
Chapter 7 내조의 미학
공기업 국장으로 재직 중인 E국장은 취미가 자연스럽게 등산이 됐다. 5년 전 와이프가 권한 취미생활이다. 당시 와이프는 어떻게 알았는지 “당신네 부서 F국장님 취미가 등산이래요. 이번 주말에 북한산에 가신다는데 같이 갔다 와요. 그쪽엔 내가 말해놨어”라며 주말 스케줄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F국장 사모님과는 또 어떻게 통했는지 작은 일에도 서로 통화하며 안부를 물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자신보다 늦게 귀가한 와이프에게 한 소리 했더니 “F국장 댁 김장한다고 해서 와이프들끼리 도와줄 겸 마실 갔다 왔다”며 겉절이를 식탁에 내놨다. 그렇게 와이프가 F국장 댁 얘기를 꺼낸 다음날엔 꼭 F국장의 호출이 있었다. 이번 주말에 같이 산에 가자며 차 한잔을 내놓든지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5년이 지난 지금 F국장은 실장으로 진급했고 E국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E국장의 와이프는 요즘 부쩍 E국장 후배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횟수가 늘었다. “OO 와이프가 이번 김장은 어떻게 하실거냐고 해서 주말에 같이 보기로 했어요.”, “OO 와이프 친정이 포항이잖아요. 친정에서 과메기를 많이 올려 보내서 우리도 나눠 준다네요.” E국장은 F국장이 왜 자신과 담소를 나누고 얼굴을 기억하려 했는지, 앞에 선 OO의 얼굴을 보곤 와이프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