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 너희 힘 있는 자들아, 나의 업적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그 옆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네. 뭉툭하게 삭아버린/ 그 엄청난 잔해 주위로 끝없이 황량하게/ 외롭고 평탄한 사막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네.”
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소네트 <오지만디아스>(1818)이다. 오지만디아스는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이집트는 리비아, 팔레스타인, 수단 북부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북쪽에서 내려온 히타이트 제국과 맞선 끝에 인류 최초의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를 기념하는 거대한 석상과 신전, 그리고 승전 기념비가 이집트 전역에 세워졌다.
태양신의 아들로 불멸을 누리고자 했던 람세스 2세는 자신을 ‘왕 중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선포했다. ‘세상의 모든 권력자여, 절망하라.’ 온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넘지 못하리라는 오만한 선언이었다. 내가 최고라는 오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법, 그가 남긴 그 무엇도 시간을 이기지 못했다. 왕국은 멸망했고, 신전은 무너졌으며, 기념비는 넘어졌다. “그 옆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네.” 우뚝 솟아 세상을 내려다보던 석상은 “뭉툭하게 삭아” 그 위엄을 잃었다. 남은 건 오직 사막 끝까지 펼쳐진 모래알들뿐.
부서진 람세스 2세의 석상은 오랫동안 황량한 사막에 방치되었다가, 1816년 영국으로 옮겨졌다. 셸리는 석상이 영국에 들어와 박물관에 자리 잡는 걸 지켜보면서 이 시를 썼다. 인생무상, 인간이 이룩한 모든 건 완전하지 않고, 아무것도 지금처럼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존엄도, 아무리 힘센 자도 결국 세월 속에서 스러진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하나로 합쳐진 건 나누어지고, 높이 올라간 건 내려오며, 활기찬 건 결국 굼뜨고 정체된다. 황금의 시대는 진은의 시대로, 진은의 시대는 청동 시대로 변한다. 불운하게도, 문명 쇠락의 시대에 속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맨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러한 삶의 방향 상실을 ‘니힐리즘’으로 불렀다. 니힐리즘에 빠진 이들은 삶을 긍정하지 못한 채 퇴폐에 빠져든다.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우울이 공동체를 잠식하고, 공허와 환멸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파편적 쾌락이나 지엽적 자극에 매몰된다.
현재가 바로 그런 니힐리즘의 시대가 아닐까. <정점의 문명>(책과함께)에서 스웨덴 사상사학자 요한 노르베리는 현재의 문명이 그 절정에서 내려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현재는 “권위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부활해, 이웃한 민주주의 국가를 없애고자 하는 잔혹한 독재자들이 존재하는 시대”이고, “진보에 대한 믿음보다 불가피한 쇠퇴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한 시대”이다.
문명은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평범한 시민의 소박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남의 나라에 특공대를 보내서 대통령을 납치하고, 폭탄을 투하해 국가 지도자를 살해해도 괜찮은 걸까. 약한 나라를 봉쇄해 에너지와 식량 공급을 끊고, 발전소와 다리를 폭파해 문명을 말살하겠다고 위협해도 좋은 걸까. 택시를 탔다가 우연히 기사한테 들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문명은 내리막길을 걸어간다.
노르베리에 따르면, 문명은 선형적으로 발전하기보다 화려한 불꽃이 비연속적으로 분출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문명이 도약하는 짧은 기간에 그 사회는 “문화적 창의성, 과학적 발견, 기술적 성취, 경제적 성장”을 폭발적으로 이룩한다. 고대 아테네, 로마 공화국, 아바스 칼리파국, 중국 송나라, 르네상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현재 영어권 세계는 문명이 정점에 이르렀던 예에 속한다. 이 황금의 꽃들엔 공통점이 있다. 낙관주의와 개방성이다.
나날이 세상이 좋아지고, 또한 좋아지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며, 그 성과를 서로 교환하도록 장려”한다. 이질적 존재가 모여 살고,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곳, 무역과 이주와 여행이 자유로운 곳일수록 이런 탐구는 더욱 활성화한다. 바깥의 성취를 빨리 받아들이고, 비비고 뒤섞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 쉬운 까닭이다. 낯선 아이디어에 대한 관용, 이질적인 문화와 교류, 정통과 권위에 도전하는 탐구정신이 허용된 사회, 즉 개방과 포용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만 문명은 정점에 오를 수 있다.
셸리의 시가 전하듯이, 이런 시대는 영원하지 않다. 현재의 성취를 가장 좋다고 보고, 이를 지키려는 기득권 세력의 오만 탓이다. 가령, 로마 문명의 중추엔 ‘전략적 관용’이 있었다. 로마는 민족 정체성보다 정치적 정체성을 중시했다. 요건만 갖추면, 핏줄과 상관없이 누구나 로마인일 수 있었다. 그 덕에 내부든 외부든 상관없이 늘 더 나은 것이 ‘로마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외국 출신으로 로마인이 되어 황제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있었다. 로마의 몰락을 초래한 건 군사적 과잉 팽창에 따른 전선 확대와 전염병이었다. 위기를 맞은 로마는 기득권을 지키려고 관용을 잃고 정통을 추구했다. 이방인을 억압하고 외부를 배제했다. 편협해진 제국은 그 순간 파멸했다.
낙관과 개방의 결합은 문명을 황금기로 이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누린 세력이 변화를 거부하면, 서서히 공동체의 발목을 잡는다. 진보보다 보수를, 모험 보다 안정을, 개방보다 장벽을 선호하면서 미래의 도래를 억제한다. 혁신은 이단으로 치부되고, 이질성은 오염으로 불린다. 자유가 억압되고 기회는 막히면서 앞날이 어두워진다. 아테네도, 아바스도, 송나라도, 르네상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공화국도 그렇게 힘을 잃었다.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영어권 세계가 이룩한 대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적인 방법론의 확립과 글로벌 분업 체계를 특징으로 하는 이 문명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큰 번영을 가져왔다. 법치와 민주주의가 최대한 확대됐고, 자유와 평화가 퍼졌으며, 창의성과 혁신이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기술이 발달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굶주림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이 이룩한 황금시대도 저무는 중이다. 보호무역주의가 새로운 표준이 되고, 정치적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기술 발전이 낳은 기후 재앙과 대량 실업의 공포가 사람들 마음을 좀먹고 있다. 어느덧 폐쇄가 개방을, 비관이 낙관을 이기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권위주의에 굴복해서 지금 가진 것이라도 지키려고 집착하는 중이다. 문명 몰락의 징후다.
일찍이 니체는 성장이 아닌 유지를 목적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일상에 안주하는 이들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했다. 이러한 퇴폐, 즉 삶의 방향 상실에서 벗어나려면 더 나은 미래를 믿고 낯선 삶을 받아들여 자기를 깨는 고통을 기꺼이 긍정해야 한다.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좋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오만은 쇠락의 징조이고, 그 끝은 파멸이다. 오늘날 세계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미국의 오만으로 인해 미래를 잃어가고 있다. 현재 문명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낙관을 회복하고 개방을 유지하며 미래에 내기를 거는 혁신이 필요하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