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찾는 외국인이 가장 놀라는 것은 자판기다. 대도시의 경우 골목마다 자판기 1~2대는 쉽게 볼 수 있다. 인구 30~40명에 1대꼴이다. 음료 자판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계절마다 품목도 조금씩 바뀐다. 겨울에는 순두부캔도 등장하고, 여름에는 팥빙수캔을 여지없이 찾아 볼 수 있다. 자판기 왕국으로 불리는 일본이지만 최근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20년 560만 대에 달해 정점을 찍었던 전국 자판기 수가 최근에는 390만여 대로 크게 줄어든 것이다. 자판기를 운영하는 회사들도 속속 사업 철수에 나서고 있다. 도대체 일본 자판기 산업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자판기의 50~60%가량을 차지하는 것은 음료 자판기다. 나머지는 식품 자판기와 담배 자판기, 여기에 승차권·식권 등을 판매하는 티켓 자판기도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자판기 감소의 원인으로 우선 가격을 꼽고 있다. 물가 상승에 따라 지난해 가을 주요 음료판매회사가 인기 상품(500~600mL 기준)의 희망 소매 가격을 200엔(세금 별도)으로 인상했다.
이는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음료 가격 인상으로 이어졌는데, 인상 폭이 편의점이나 드럭스토어, 슈퍼 등에 비해 높았다. 자판기에서 음료 구매가 편리하기는 하지만, 고물가로 절약을 지향하는 소비가 강해지고 있는 일본에서 불편하더라도 슈퍼나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기료와 물류비 상승도 부담이다. 또 일본 사회에 만연한 인력 부족의 영향으로 제때제때 자판기에 물건을 채워 넣는 보충 인력도 부족해졌다.
자판기의 경우 트럭으로 하루에 20~30대의 기기를 돌아 다니며 팔린 음료를 보충하고 돈을 회수해야 한다. 물류 업계에서는 운전기사 부족에 더해 개당 10kg이 넘는 무거운 음료 상자를 운반하는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최대 과제다.
이러한 부분을 모두 고려하면 자판기 판매 가격을 올려야 하는데, 가격을 올리면 이용률이 뚝 떨어진다. 결국 자판기 운영회사로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자판기 사업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사업에서 철수하거나의 선택지만 남게 되는 구조다.
우리에게 맥주로 유명한 삿포로홀딩스의 경우 최근 자판기 사업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자회사인 음료 회사 ‘포카삿포로 푸드&비버리지‘는 3월 초 전국 약 4만 대 규모의 자판기 사업을 청량음료 제조업체인 ’라이프 드링크 컴퍼니‘에 매각하기로 했다. 매각 금액은 알려지지 않았고, 10월까지 작업을 완료하는 것이 목표다. 삿포로 측은 “기기 유지비와 상품 보충에 드는 인건비가 급증한 가운데 의약품과 생활용품, 식료품 등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대형 잡화점인 드럭스토어로 고객이 유출되고 있다”며 “채산성 확보가 어렵다는 판단에서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가 광고모델로 나오는 녹차 음료수인 ‘오이오차’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토엔은 자체 운영하던 자판기 사업을 자회사로 이관한다. 이토엔이 직접 운영한 자판기가 7만 5000여 대에 달하는데, 이를 오는 5월에 자회사인 네오 스로 옮기는 것이다. 이토엔 사업에서 자판기 부문의 매출은 6% 수준으로 최근 2년 새 2%포인트 감소했다. 이토엔도 지난해 10월 음료 가격 인상을 통해 ‘200엔대’ 시대를 열며, ‘오이오차’ 600mL 페트병 가격을 216엔으로 올렸다. 이토엔 측은“전 세계적으로 말차 붐이 퍼지면서 찻잎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며 “정가로 판매하는 자판기의 경우 가격 인상으로 사업에 타격이 크다”고 밝혔다.
오이오차를 200엔 안팎의 가격으로 판매하는 자판기와 달리, 드럭스토어 가격은 여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90엔 안팎에 불과하다. 손님을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차 음료 등 페트병 상품을 특가로 판매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음료 판매량에서 자판기 비중은 1995년 절반에 가까운 48%에 달했지만, 2024년은 23%로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반면 슈퍼는 같은 기간 21%포인트 늘어나며 39%를 기록했고, 편의점 또한 8%포인트 증가한 23%로 자판기와 키를 맞췄다. 가격 경쟁력을 지닌 슈퍼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일본에서 자판기 사업으로 유명한 다이도(DyDO)그룹 홀딩스는 2027년 1월까지 매출이 저조한 자판기 1만 5000여 대를 철거하기로 했다. 신규 설치는 최대한 줄이고, 자판기 위치에도 변화를 줄 계획이다.
다이도 측은 “상품 구성도 음료수와 차 종류, 탄산음료의 비중을 높이고 원료 가격이 계속해서 오르는 커피 비중은 줄일 것”이라며 “판매 예측을 정밀하게 할 수 있는 스마트 오퍼레이션 기법도 도입한다”고 밝혔다.
자판기에서 음료 판매가 부진해지면서 새로운 상품을 취급할 수 있는 자판기도 등장하고 있다. 자판기제조업체인 산덴리테일시스템은 냉동식품 등을 취급할 수 있는 자판기인 ‘도히에몬’을 선보였다.
이 자판기는 내부를 마이너스 25도 정도까지 낮출 수 있다. 아이스크림뿐 아니라 만두와 와규(일본산 쇠고기), 케이크까지도 판매가 가능하다. 일본자동판매시스템 기계공업회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으로 식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자판기 대수는 8만 1200여 대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무인판매기를 개발하는 회사인 스마리테는 쇼케이스형 자동판매기도 선보였다.
2024년에는 넥스코(일본고속도로주식회사) 동일본과 함께 공동으로 지바현 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험 판매도 시작했다. 자판기 안에는 현지 특산물이나 빵 등 먹거리가 담겨 있다. 고객은 자판기 이용 때와 똑같이 상품을 선택하고 결제하는 방식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결제는 판매기에 있는 QR코드를 불러와 간편결제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판기에 놓이는 상품 종류와 배치 등은 담당 업체가 자유롭게결정할 수 있다. 포화 상태인 일본 시장을 떠나 상대적으로 자판기에 익숙하지 않은 국가 공략에 나서는 업체도 등장했다. 자판기 설치·운영업체인 FRN은 기존 호주와 베트남 시장 외에 인도 시장 개척에 나섰다.
인도의 경우 음료 시장이 2033년까지 약 21조 엔(약 197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판매는 대부분 노점이나 소매점에서 이뤄진다. FRN은 우선 경제 발전이 빠른 남부의 벵갈루루 등을 중심으로 지난해 9월 500대의 자판기를 설치해 시험 가동을 시작했다. 자판기 제품의 개당 판매가격은 1개에 평균 80엔(약 750원)이다. 일본과 비교해서는 절반 이하지만 현지 소득 수준을 고려할 때 고가로 취급된다. FRN은 사무실이나 대학병원 등에 설치해 안정적인 소득이 회사원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FRN은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자판기 이용 비중도 커질 것으로 본다”며 “벵갈루루 이외의 지역에도 설치를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