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스스로를 소개하는 시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윤태성 교수는 그 현상을 ‘놀라움과 재미, 그리고 두려움’으로 압축한다. 기술과 경영의 경계에서 미래를 읽어온 그는 AI 열풍의 한가운데서 “활용하되, 믿지 말라”는 날카로운 경고를 던지며, 기술의 본질과 기업의 생존 전략을 꿰뚫는 통찰을 제시한다.
윤 교수는 AI 시대의 생존은 기술 군비 경쟁이 아닌, 기업 전략과 인재상, 나아가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재조정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AI라고 하는 기술을 유명하게 만드는 단계지 아직은 AI로 돈을 많이 벌 만한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기술이 시장에 수용되기 까지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의 ‘시간의 갭’이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알파고 쇼크 이후 약 1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기술이 시장을 한참 앞서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초입에 서 있을 뿐이다. 이 ‘기술과 시장의 시제 차이’ 때문에 현재 AI 시장은 ‘수익 창출’이 아닌 ‘명성 구축’의 단계에 있다.
시장이 기술의 가치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는 현 단계에서 성공의 척도는 매출이 아닌 ‘유명세’다. 기술의 명성이 높아지면 최고의 인재와 막대한 자본, 그리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다. 오픈AI가 2028년까지 적자를 공언했음에도 100조원 단위의 투자를 유치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기술을 가진 희망적인 기업’이라는 시그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성’을 앞세운 기업들은 아직 ‘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블록체인이 한때 암호화폐 외 뚜렷한 용도를 찾지 못해 방황했듯, AI 역시 시장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상품과 서비스로 연결되어야 잠재력이 발현된다. 그렇다면 이 기술 과잉과 시장 부재의 과도기를 기업은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많은 기업이 AI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기술 도입 자체를 목표로 삼는 오류에 빠진다. 그러나 윤 교수는 “AI는 유력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AI가 제시하는 트렌드를 맹신하고 ‘남들이 하니까’ 도입하는 것은, 기계가 보는 관점에 비즈니스의 운명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
진정한 전략은 기술이 아닌, 우리 비즈니스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업의 최우선 과제는 ‘우리는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그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매출 증대’와 ‘원가 절감’ 중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할지 정의한 후, AI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검토되어야 한다. 결국 AI 전략의 성패는 기술이 아닌, 그 기술을 비즈니스의 본질에 맞게 휘두를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AI시대 조직의 생존은 어떤 인재를 확보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재상을 새롭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윤태성 교수는 그 해답의 가설로 ‘파이(π)형 인재’ 모델을 제시한다. 파이(π)의 가로축이 넓은 AI 활용 범위를 의미한다면, 두 개의 세로축은 각각 자신의 고유한 전문 분야와 그에 버금가는 깊이의 AI 기술 전문성을 뜻한다. 한 분야의 전문가(T자형 인재)를 넘어, 자신의 전공과 AI라는 두 개의 강력한 기둥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의대 쏠림’ 현상에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윤 교수는 이 현상이 ‘의대 갈까, 공대 갈까?’라는 한국 사회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진짜 문제는 인재의 유입이 아니라, 의사 면허 취득 후 진로가 제한적인 ‘출구 전략의 부재’다. 만약 의사들이 의료 지식과 AI를 결합해 신약을 개발하고 노화를 방지하는 등 다양한 커리어 경로가 열린다면, 의대 쏠림은 오히려 국가적 기회가 될 수 있다.
글로벌 AI 인재 전쟁에서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과 자본력만으로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윤 교수는 “한국이 인재 버스의 종점이 될 필요는 없다. 매력적인 정거장이 되면 된다”는 독창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중국이 인재를 배출하는 ‘출발점’, 미국이 그들을 최종 흡수하는 ‘종점’이라면, 한국은 최고 인재들이 최종 목적지로 가기 전 “그래도 한국에 가서 1년은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반드시 거쳐 가고 싶은 ‘매력적인 정거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의 핵심 타깃은 ‘재미를 추구하는 20대 싱글 AI 인재’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1년 살아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커리어 자산이 될 수 있다.
K-팝, K-컬처 등 한국의 강력한 문화적 자산을 AI 기술과 결합하는 접근법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인재 유치가 아닌, 국가적 차원의 ‘매력 자본’ 설계다. 낮에는 삼성전자와 네이버의 R&D 허브에서 세상을 바꿀 코드를 짜고, 밤에는 홍대에서 인디 밴드의 라이브를 즐기며, 주말에는 DMZ 투어로 분단의 역사를 체험하는 삶. 실리콘밸리의 차고와는 전혀 다른, 오직 한국만이 제공할 수 있는 이 경험의 총체가 바로 인재를 끌어들이는 강력한 중력장이 될 것이다.
윤태성 교수의 통찰은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AI 시대의 진정한 성공은 기술 도입을 넘어선다. AI와 함께 일할 인재를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우리 곁으로 오게 할 것인지에 대한 창의적이고 다층적인 접근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기술의 파도를 넘을 열쇠는 결국 ‘사람’에게 있다.
[박수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4호 (2026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