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가을, 대신증권 사옥 분위기는 무거웠다. 창업 2세이자 상징이었던 고(故) 양회문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시장도, 조직도 흔들리던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오랫동안 가사에 전념해온 ‘평범한 주부’였던 이어룡 대신파이낸셜그룹 회장이었다.
1953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상명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가정에 전념해온 그는 남편의 투병이 시작되자 3년여간 비공식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남편의 갑작스러운 별세 후 이사회에서 후임 회장으로 선임됐다.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증권업계에서 보기 드문 ‘유일한 여성 오너경영자’의 등장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대신증권은 단순한 브로커리지 증권사를 넘어 금융·부동산을 아우르는 종합 자산·부동산 관리 그룹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상징처럼, 이어룡 회장은 최근 제13회 매경 LUXMEN 기업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취임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일은 숫자 점검도, 전략 보고서도 아니었다. 사람을 보는 일이었다. 전국 100곳이 넘는 영업점을 한 달 만에 모두 돌며 직원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눈을 맞춘 일명 ‘악수 경영’이 그 출발점이다.
“그때 제일 중요한 건 ‘우리가 버려지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직원들이 느끼게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찾아가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얘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했죠.”
이 과정에서 대신의 조직 문화 키워드가 정리됐다. ‘엄마품처럼 편안한 회사’ ‘느낌표가 있는 경영’ 전통적인 남성적 경쟁의 언어 대신, 감성·인화(人和)를 중시하는 색깔을 분명히 한 것이다. 모성적이지만 단호한 리더십은, 잔뜩 긴장해 있던 조직에 서서히 온기를 불어 넣었다.
취임 당시 대신증권은 위탁매매 의존도가 높은 전형적인 중개 증권사였다. 이어룡 회장이 본 판은 달랐다.
“증권만 하는 회사에서, 증권도 하는 회사로 바뀌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 기조 아래 대신증권은 저축은행 인수, 자산운용 강화, 부실채권(NPL) 투자·관리회사 및 부동산 전문 계열사 편입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혀 갔다. 부동산신탁, F&I, 리츠 등을 잇달아 편입하며 금융과 부동산이 연결된 ‘밸류체인’을 구축했고, 단순 중개회사에서 ‘자산·부동산 종합관리 그룹’으로 체질을 바꿔 나갔다.
2012년에는 계열사들을 묶어 ‘대신금융그룹’을 출범시키며 그룹 체제를 공식화했고, 2022년 창립 60주년에는 그룹명을 ‘대신파이낸셜그룹’으로 재정비해 금융그룹 체제를 확고히 다졌다. 외형 확장과 사업 다각화 모두, 비교적 조용하지만 꾸준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외형이 커지는 동안, 이어룡 회장이 놓지 않은 키워드는 ‘질적 성장’과 ‘신뢰’였다. 대신증권은 20년 넘게 현금배당을 이어오고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주주가치 제고에 나섰다. 지배구조 평가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지킨 것도 이 같은 노력의 결과다.
온라인 거래 인프라에 선제적으로 투자해 수익 구조를 다변화했고, 그룹 차원에서는 리스크 관리와 선택·집중을 통해 ‘지속가능 경영’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이를 ‘고객수익경영’과 ‘사회책임경영’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설명한다. “기업은 단순히 이익을 내는 조직이 아닙니다.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윤의 사회환원, 고객과 주주의 신뢰, 임직원의 성장,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습니다.”
2022년 선포한 새로운 그룹 미션, “유연한 시도, 가치 창출(Try Agile ways, Create The Value)” 역시 이러한 방향성을 간결하게 압축한 문장이다.
최근 몇 년간 이어룡 회장이 특히 강조하는 화두는 ‘자본 효율’이다. 자기자본 10조원 달성을 목표로 글로벌 사업을 넓히고, 대형 IB(투자은행)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전략이 구체적 성과로 드러난 장면이 지난해 대신증권의 ‘종합금융투자사업자(종투사)’ 지정이다.
그동안 대신증권은 수익원 다변화, 기업금융·자기자본투자 강화, 리스크 관리 고도화 등을 통해 까다로운 인가 요건을 충족해 왔다. 종투사 지위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금융상품 공급과 자본시장 기반 확대가 가능한 토대를 마련했다.
“종합금융투자사업자라는 지위와 2000명이 넘는 금융·부동산 전문가라는 성장 토대를 갖췄습니다. 이제는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혁신과 역량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합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금의 대신파이낸셜그룹은 ‘다음 점프’를 위한 연료를 이미 채운 상태다. 과제는 자본을 얼마나 생산적이고 신뢰 있게 운용하느냐의 문제다.
그의 경영 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축은 상생과 나눔이다. 대신그룹의 사회공헌은 창업주 고 양재봉 회장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지만, 이어룡 회장 취임 이후에는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전남 나주와 충북 괴산을 향한 행보는 상징적이다. 그는 매년 이 지역 사회복지시설을 직접 방문해 성금을 전달해 왔고, 이 행사는 2004년 이후 한 해도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도 대신파이낸셜그룹은 나주시 사회복지시설과 괴산군 복지시설 등에 ‘사랑의 성금’을 전달하며 다문화가정, 장애인,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비·생계비·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기업 활동의 결과물이 우리 사회 발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업과 지역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가치가 진정한 지속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ESG가 유행처럼 소비되는 시대에, 대신파이낸셜그룹이 택한 방식은 ‘조용하지만 오래 가는’ 방식에 가깝다.
글로벌 경쟁 심화, 디지털 전환, 고령화와 자산관리 수요 확대. 앞으로의 10년은 금융회사에게 더 복잡한 과제를 안겨줄 전망이다. 그 속에서 이어룡 회장이 20년 넘게 강조해 온 ‘고객수익·사회책임·지속가능성’이 어떤 방향으로 더 구체화될지, 그리고 ‘대신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에 시장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분명한 것 하나는, 남성 중심의 증권업계에서 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한 여성 회장의 꾸준함이 오늘의 대신파이낸셜그룹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제13회 매경 LUXMEN 기업인상 수상은, 그 꾸준한 리더십이 써온 지난 20년의 성장 스토리에 찍힌 하나의 단단한 마침표이자, 다음 장을 여는 첫 문장이기도 하다. 다음은 이어룡 회장과의 일문일답.
Q 매경 LUXMEN 기업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A 이번 수상은 제 개인이 아니라 대신파이낸셜그룹과 임직원 모두에게 주어진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업의 성과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기여를 함께 평가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윤의 사회환원, 고객과 주주의 신뢰, 임직원의 성장,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동시에 이루는 ‘따뜻한 금융’을 실천하겠습니다.
Q 최근 증시 반등, 어떻게 보시나요? 한국 시장이 진정한 선진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A 최근 증시 반등은 단순한 기술적 흐름이 아니라 한국 기업 경쟁력이 재평가되는 과정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제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과도한 유동성이 아니라 기업의 체질 개선과 신뢰입니다. 투명한 지배구조, 지속적인 주주환원, 견고한 사업모델이 자리잡고, 예측 가능한 제도 환경이 뒷받침될 때 한국 자본시장은 코스피 4000, 6000을 넘어 진정한 선진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기업가치·제도·투자문화 측면에서 꼭 바뀌어야 할 한 가지를 꼽는다면요?
A 단기 주가와 단기 실적에만 집중하는 문화를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업의 본질적 가치를 키워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이 자본시장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합니다. 경영진이 장기 경쟁력과 책임경영에 초점을 맞추고, 투자자는 그 철학과 원칙을 인내심 있게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Q 정부와 거래소가 추진하는 ‘밸류업’ 기조 속에서, 대신파이낸셜그룹은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나요?
A 저희가 지향하는 밸류업은 일시적인 주가 부양이 아니라 자본을 얼마나 생산적이고 신뢰 있게 운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대신증권은 올해 초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마련하고 자본효율 중심의 경영과 투명한 소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질적 성장과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추구하며 국내외 투자자와의 신뢰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갈 계획입니다.
Q 앞으로 5년, 한국 자본시장의 구조 변화와 증권사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A 한국 자본시장은 양적성장 단계에서 질적 수준을 높이는 단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기업의 내재가치, 투자문화의 성숙도, 제도의 일관성이 시장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증권사는 단순한 중개 기관이 아니라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하는 플랫폼, 그리고 장기적 자산 형성을 돕는 파트너로서 역할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3호 (2025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