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이 AI 시대의 글로벌 전략적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생태계의 토대 격인 데이터센터의 핵심 기지로 각광받으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너도나도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초기 격인 AI 산업 생태계에서 데이터센터는 AI기술 고도화에 필수적인 장치여서 경쟁력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AI용 데이터센터 건립은 만만치 않다.
일단 대규모 부지가 확보돼야 하고, 이를 운영할 수 있는 전기가 값싸게 공급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아세안은 꽤 매력적인 건립 후보지로 간주된다. 이런 요건들을 잘 정비된 환경에서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요인 외에도 최근 빅테크들이 아세안 데이터센터 건설 추진에 몰리는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를 상대로 한 관세 전쟁도 한몫하고 있다. 미국으로 수입되는 각종 건설 자재들이 치솟으면서 관련 비용이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줄이기 위해 다변화 전략을 취하고 있고 가격 경쟁력이 있는 아세안의 몸값이 치솟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아세안 각국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AI가 불러일으킨 산업 격변의 시대를 국가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 바삐 움직이고 있다.
아세안 데이터센터 건설에 가장 열정적인 곳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다. AI 기술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기반 기술 중 가장 중요한 데이터센터 건설에서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세안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기존 강자는 싱가포르였다. 하지만 늘어나는 데이터센터로 국가 전체의 전력 부담이 가중되자 싱가포르는 신규 데이터센터 건립을 일시적으로 중단했고, 이로 인해 관련 수요가 주변국으로 분산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뒤를 이어 아세안에서 데이터센터의 새로운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곳은 말레이시아다.
구글은 지난해 말레이시아 셀랑고르주 엘미나 비즈니스 파크에 20억달러(2조 7910여억원)를 들여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시설 건설 등에 나섰는데, 이는 아세안 국가에 대한 구글의 투자 가운데 최대 규모다. 오라클은 지난해 구글보다 더 큰 규모인 9조원 규모의 데이터센터 구축을 밝혔다. 아마존 웹서비스(AWS)가 추진했던 데이터센터 건설은 이미 완공돼 운영 중이다.
말레이시아의 데이터센터는 조호르 지역에 몰렸는데, 엔비디아도 여기에 AI 데이터 거점을 마련했다. 현재 말레이시아에 들어선 데이터센터는 총 49개로, 23개의 기업이 진출해 있다.
데이터센터와 관련해 글로벌 자금이 말레이시아로 몰려드는 흐름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말레이시아 통상산업부는 2021년부터 2023년 3월까지 데이터센터에 760억링깃(24조 6000여억원) 상당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밝혔는데, 지난해 결정된 구글, 오라클 등의 대규모 투자금액이 더해지면 그 규모는 훌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체 용량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전력공사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용량은 2028년 5000㎿ 수준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같은 기간 지역 내 예상되는 데이터센터 용량의 5분의 1에 해당되는 수준이다.
물론 이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말레이시아에만 올인 전략을 펴는 것은 아니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지역 내 다변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에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인근 국가들에서도 빅테크들의 움직임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태국에서는 방콕에서 가까운 촌부리 지역에 구글 아마존 웹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에퀴닉스 등이 데이터센터 건설을 추진한다. 특히 AWS는 50억달러(7조1000억원)를 관련 인프라 건설을 투자한다고 해 지역을 깜짝 놀라게 했다. AWS는 이를 위해 지역 관할 사무소를 방콕에 설립키로 했다.
태국 데이터센터 흐름과 관련해 눈에 띄는 대목은 미국뿐만 아니라 중동 자금까지 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랍에미리트의 부동산 대기업인 다막이 태국에 데이터센터 설립 계획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 사례로, 닛케이아시아는 이와 관련해 다막이 향후 3~5년 동안 태국을 포함해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에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고 운영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최대 투자 규모가 30억달러로 알려졌다.
최근 국가 간 관계가 돈독해진 중국의 기업들도 태국 내 움직임도 활발하다.
중국 부동산 기업 베이징 하오양이 태국에 22억달러(약 3조 700억 원) 규모의 300㎿급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기로 했는데, 이는 태국 내 최대 규모다. 또 틱톡은 지난 1월 태국 3개 주에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며 37억달러(5조 1300여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기준 태국투자청(BOI)이 승인한 데이터센터·클라우드 프로젝트는 총 37건, 약 3조 7000억원 규모에 달한다.
중국 기업들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데이터센터 건설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텐센트가 2030년까지 5억달러(약 7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며, 알리바바 클라우드는 이미 인도네시아에 3개의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인도네시아에서도 미국 빅테크들의 움직임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엔비디아는 현지 통신사와 함께 AI센터 구축을 위해 2800억원을 투자키로 했다. 아세안 내 자체 데이터센터 건설 움직임도 있다. 베트남 국영 통신사 ‘비엣텔’이 4㏊ 부지에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설립한다. 비엣텔 첨단 데이터센터·연구개발(R&D) 허브로 140㎿ 규모다. 이 데이터센터는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100㎿ 이상 용량을 갖춘 시설이자,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규모 기준 상위 10위권에 해당하는 규모다.
아세안 각국 간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도 치열하다. 데이터센터가 자리잡는 것만으로도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 유발효과가 크지만, 첨단기술인 AI 능력을 자국에 이른 시일 내에 이식시킬 수 있다는 계산도 한몫하고 있다. 세금 감면 다양한 인센티브로 이들을 공략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디지털 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안(Malaysia Digital Bill of Guarantees, BoGs)을 마련해 체계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먼저 데이터센터 등 디지털 관련 투자자들에게 말레이시아 디지털 스테이터스(Malaysia Digital Status)‘란 자격을 부여해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법인세의 경우 최대 10년간 0~10% 세율로 책정했으며, 디지털 인프라 제공자(DIP)로 분류된 데이터센터는 최대 10년간 100% 투자세 공제(ITA)가 적용되고, 디지털 기술 공급자(DTP)로 분류된 신규 기업은 0~10%의 소득세율을 10년간 적용받을 수 있다. 자본집약적 서비스 활동에 대해선 투자액의 100%까지 세액 공제 혜택을 준다.
또 ‘그린 레인 패스웨이’ 정책을 통해 데이터센터 건설 인허가 기간을 12개월로 단축하는 등 행정 절차를 대폭 간소화했다. 데이터센터 및 디지털 기업에 대해 외국인 100% 지분 소유가 허용된다. 토지의 경우 주 정부 승인 하에 장기 임대가 가능하다.
말레이시아는 올해 새로운 데이터센터 인센티브 프레임워크를 도입할 예정이다.
태국 정부의 데이터센터 투자 기업 인센티브는 말레이시아와 비교해 더 파격이다. 법인세의 경우 최대 8년간 전액 면제해 준다. 이후 5년간 50% 감면 혜택을 제공한다. 또 서버 임대, 데이터 백업, IT 보안 등 데이터센터의 핵심 서비스에 대해 부가가치세도 면제된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의 데이터센터의 지분 100% 확보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토지 소유도 가능케 했다. 태국 내 투자 유치 측면에서 토지 소유권까지 주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기계 및 장비의 수입관세도 면제된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태국 내 최소 2개 이상의 데이터센터를 운영해야 하고, 토지 및 운전자본을 제외한 최소 50억 바트(약 1800억 원)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역시 법인세를 면제해주는데, 투자 규모에 따라 차등을 두고 있다.
신수도 및 경제특구 내 투자시에는 최대 30년까지 면제가 가능하다. 또 데이터센터 투자에서 발생한 배당소득 및 임대 수익에 대해 원천징수세를 면제한다. 인허가와 관련해서는 온라인 단일창구 시스템을 마련해 신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역시 데이터센터 사업에 외국인의 지분 100% 소유를 인정하고 있다.
베트남 역시 사회주의국가이지만 외국인 투자자의 지분 100% 소유를 지난해부터 인정하고 있다.
법인세의 경우 최대 4년간 전액 면제해주고, 이후 9년간은 50% 감면해준다. 경제특구 등에 자리 잡으면 우대세율도 적용한다.
필리핀 등 다른 아세안 국가들도 법인세 혜택, 신속 인허가 등을 내세우며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인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아세안 AI 데이터센터 유치 붐과 관련해 일종의 낙수 효과로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데이터센터를 실제 착공하게 되면 이에 수반되는 전력 설비 등의 연관 분야에서 사업적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LS에코에너지가 베트남 국영 인터넷 기업의 데이터센터(IDC)에 대용량 전력배전시스템을 공급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LS에코에너지가 공급하는 제품은 버스덕트로, 플랜트·빌딩·아파트 등에서 대용량 전력을 공급할 때 전선을 대신해 사용하는 고부가 가치제품이다. 전력 소모를 전선 대비 30% 이상 줄일 수 있어 IDC용 부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회사 측은 “베트남에서 IDC 분야는 연간 10% 이상의 고성장이 기대되는 부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설업체들에게도 아세안 내 데이터센터 붐은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거론되고 있다. 데이터센터 자체가 건축물이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리 건설업계의 경쟁력이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현대건설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회사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서 직접 수주를 노리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기업들이 소버린AI 구축에 도움을 주는 등 아세안 내 기술적 전파 사례가 나타난 것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최근 KT가 태국에 거대언어모델(LLM) 수출에 성공했다.
물론 리스크에 대한 우려도 있다. AI 거품론이 일면서 일부 지역에서 데이터센터 건설 자체가 유보되는 등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문제일 뿐, AI 기술 고도화가 진행 될수록 데이터센터 등 AI 관련 설비와 전·후방 기술에 대한 필요성은 그만큼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아세안 내 AI 흐름은 우리 기업들에게 위기보다는 기회로 다가올 공산이 더 커보인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수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7호 (2025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