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들의 전방위 공세에 한국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수십년간 대한민국 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석유화학·철강 산업부터 미래 먹거리 산업인 배터리 산업까지 위기감이 확산되며 존폐 갈림길에 섰다.
기술로 무장한 중국 기업들의 융단폭격식 진출에 따른 산업계 위기감은 전국의 산업단지 곳곳에서 감지된다.
K산업 기반의 근간이었던 철강·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산 저가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공장 폐쇄가 이어지며 가장 심각한 상황에 노출돼 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 중국의 물량 공세는 공포 그 자체다. 지난 5년간 전 세계 나프타 분해설비 신·증설 규모의 56%가 중국에서 이뤄졌다.
무엇보다 석유화학 산업은 업종 특성상 공장을 멈추기 어려워 수요가 줄어도 생산을 계속할 수밖에 없어 재고만 늘어가고 있다. 여수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제값도 못 받으면서 24시간 공장을 돌리고 있다”며 “제조원가가 높은데다 전기요금 등 유틸리티 비용은 계속 올라가는 삼중고”라고 하소연했다.
롯데케미칼이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의 여수2공장 에틸렌글리콜(EG), 메틸메타크릴레이트(MMA) 생산 공장 박스업(Box-Up·철수 전 정리) 절차에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발 저가·물량 공세와 실적부진 여파를 견디지 못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손해를 봄에도 불구하고 일단 버텨왔던 생산 공장들은 최근 본격적으로 백기 투항에 나섰다. 석유화학기업 롯데케미칼은 2024년 12월부터 여수2공장 가동을 중단하며 공장 폐쇄 수순에 나섰다. 주력생산제품인 EG와 MMA 공장 등 생산라인 운영 중단과 박스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박스업은 생산시설을 비우고 질소를 충전하는 절차다. 통상 공장을 멈추거나 정기보수를 위해 진행하는데 지금은 해체·매각을 위한 준비 단계로 알려졌다. 차량용 냉각제의 주원료인 EG와 아크릴 유리 핵심소재인 MMA는 1970년대 후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시절부터 생산해 온 롯데케미칼의 핵심 플라스틱 제품으로 종전에는 단위공장 매출이 연간 3조~4조원에 달했다.
롯데그룹은 주력 사업인 석유화학사업의 부진으로 크게 휘청이고 있다. 결국 고강도 인적쇄신 일환으로 계열사 대표(CEO) 21명을 교체하고 기존 임원의 22%를 퇴임시키는 정기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화학군 임원 중 30%를 퇴임시켰다.
실적악화와 유동성 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롯데케미칼이 수십 년간 효자노릇을 해온 핵심 제품군 생산 공장에 대해 칼을 빼든 것은 위기극복을 위한 회사의 의지가 투영된 것이다.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경우 재도약은 고사하고 현재 상황 극복도 쉽지 않은 만큼 전방위적 구조조정도 불사하겠단 태세다.
롯데케미칼은 주요 생산공장 전반에 대한 운영 효율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과다생산으로 재고가 쌓인 플라스틱 제품군을 수요처 확보와 함께 더 이상 수익화가 어려운 제품군에 대한 과감한 정리도 포함됐다.
여수국가산업단지 관계자는 “롯데케미칼 여수2공장의 EG와 MMA 생산시설에서 생산량을 줄이며 박스업을 위한 준비에 나서고 있다”며 “공장을 멈추는 과정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 박스업이 시작되면 금방 공장이 정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석유화학산업업계에서 쓰이는 박스업은 사실상 공장 운영 중단을 위한 전 단계로 불린다. 정기 보수를 하거나 점검을 위해 박스업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사실상 공장 폐쇄를 위한 수순으로 보고 있다. 롯데케미칼 협력업체 관계자는 “공장이 완전히 문닫지 않더라도 재고가 쌓이는 문제나 인건비 절감을 위해서라도 박스업이 진행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한때 3조원 가까운 영업이익을 내며 롯데그룹의 주축을 담당했던 롯데케미칼이 이제는 위기설의 진원지가 됐다. 롯데케미칼은 2024년 3분기 4136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4분기 연속 적자다.
롯데케미칼 관계자는 “현재 여러 공장에서 운영 최적화를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다”라며 “구체적으로 공장을 멈추거나 폐쇄하는 것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문제는 이런 위기가 국내 석유화학업계 전체에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서 과생산된 범용플라스틱 제품으로 인해 주요 수출국이던 중국 시장이 사실상 사라진 데다 오히려 중국산 플라스틱이 역으로 국내 시장으로까지 침투하고 있다.
실제 2023년 중국의 연간 에틸렌 생산능력은 5174만톤(t)으로 5년 전인 2018년(2565만t)의 두 배를 넘어섰다. 게다가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수출기업 전반으로 산업 부진 우려가 커지며 산업 전반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LG화학 역시 여수산단 내 스티렌모노머(SM) 공장 가동중단을 검토중이다. 한화솔루션 역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7000억대 규모의 영구채를 발행했다.
업계에선 정부 차원의 전향적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금융지원과 산업용 전기료 차등 지원 등 석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지원이 필수”라며 “구조조정과 기업 간 인수합병에 앞서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원이 선제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밝혔다.
시계제로의 위기 상황에 처한 국내 석유화학산업을 심폐소생하기 위한 기업과 정부정책의 방향성이 분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대대적인 석유화학 업계 지원을 위한 종합대책 준비에 나섰다. 세제 감면 혜택, 인수합병(M&A) 규제 완화를 포함한 각종 방안이 거론된다.
정부는 기업 간 인수합병을 촉진하기 위한 각종 방안들도 검토하고 있다. 인수합병으로 석화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를 이룰 경우 고정비용이 줄어 중국발 저가공세를 버틸 체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합병과정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공정거래법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주주총회 없이 이사회 결의만으로 합병 여부를 결정하는 ‘기업활성화법’ 적용 기준을 완화하는 안도 논의된다.
양도세·취득세 등을 감면하거나 이연해 당장의 기업 부담을 줄이는 안도 검토 중이다. 석유화학업계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한 납사(나프타)·나프타 제조용 원유에 대한 할당관세 0% 유지 여부도 관심사다.
정부는 이미 선제적으로 사업 재편을 추진한 일본 석유화학 산업 현황을 참고하기 위해 긴급 연구 용역도 발주한 상태다.
제철소가 즐비한 포항 역시 폐쇄 공포에 휩싸였다. 포스코는 최근 잇달아 공장 폐쇄를 발표하며 인력 재조정에 들어갔다. 특히 45년 넘게 가동해온 포항제철소 1선재공장 폐쇄 소식은 철강업계 전반에 큰 충격파를 줬다.
K-제철은 세계 일류 상품으로 경쟁력이 높았다. 하지만 중국산에 밀려 차라리 공장을 닫는 게 그나마 손해를 줄인다는 게 현실이다.
지역경제도 함께 무너지고 있다. 산업단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지역경제는 산단 붕괴로 도미노 피해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산단 인근 번화가에는 상당수의 공실이 발생해 썰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중국발 위기는 비단 전통산업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도체와 더불어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 중추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 역시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음극재 산업이 위기의 중심에 서 있다.
전 세계 음극재 시장에서 포스코퓨처엠은 시장 점유율 3%(9위)로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10위 안에 포진해 있다. 점유율 10위 내 나머지 9곳은 모두 중국 기업이다. 중국은 전 세계 음극재 생산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2020년까지만 해도 포스코퓨처엠 음극재 공장 가동률은 80~90%에 달했다. 영업이익률도 10%대를 기록하며 호실적을 누렸다. 하지만 2020년 이후 생산량과 공급량을 늘린 중국 음극재 기업들의 저가 공세에 ‘중국 쏠림’이 심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글로벌 배터리 시장을 이끌고 있는 한국 배터리 3사조차 중국산 음극재 비율을 크게 늘렸다.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한국 배터리 3사의 국내산 음극재 구매량 비율은 2020년 41.5%에서 올해 17.1%로 급감했다. 사실상 중국산인 해외 비율은 58.5%에서 82.9%로 늘었다.
사업 부진은 가동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포스코퓨처엠 세종 음극재 제2공장은 전체 생산 가능 용량의 15%가량인 7500t 정도에 해당하는 생산라인만 가동 중이다.
실적도 고꾸라졌다. 포스코퓨처엠의 3분기 영업이익은 13억6700만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6.3% 급감했다. 주력인 배터리 소재 사업은 지난해 3분기 218억원 흑자에서 2024년 3분기 158억원 적자 전환했다.
전기차 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배터리 소재기업이 무너지면 배터리 제조사와 전기차 회사까지 연쇄적으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의 위기는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음극재를 중국이 장악하면서 시작됐다. 중국은 정부 지원과 낮은 인건비를 앞세워 원가 경쟁력을 높이며 시장을 싹쓸이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한국 배터리 생태계를 구성하는 소재사들이 무너지면 ‘요소수 대란’과 같은 공급망 위기가 터질 것을 걱정한다.
2024년 하반기부터 전기차 시장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이 심화하자 중국은 한국 배터리사들에 ㎏당 4~5달러에 음극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2022년 고점과 비교하면 40~50% 싼 가격이다. 낮은 인건비와 저렴한 전력비용을 앞세운 중국이 원가 경쟁력을 높여 ‘치킨게임’을 주도하는 것이다.
문제는 당장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국은 중국 대비 인건비와 전기요금 부담이 훨씬 큰 데다 환경 관리 비용도 높다. 중국의 전력단가(kwh당)는 80원대로 우리나라(150원)의 절반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2024년 5월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상 중국산 흑연 사용을 배제하는 ‘해외우려집단(FEOC) 규정’ 적용을 2026년까지 2년 유예하며 오히려 국내 배터리사들의 저가 중국산 음극재 구매량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흑연과 더불어 음극재 핵심 소재인 동박 역시 상황이 안 좋긴 마찬가지다. 고객사가 줄어든 일부 국내 동박 제조기업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중국의 저가 수주 경쟁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터리 업계 전반에 만연한 캐즘 공포는 음극재뿐 아니라 양극재 시장으로도 확산 중이다. 양극재·분리막 등을 생산하는 LG화학은 중장기 양극재 생산능력을 크게 낮췄고, 시설투자액도 4조원에서 3조원으로 줄였다. 양극재 주력 업체인 에코프로비엠과 엘앤에프는 적자 전환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음극재 기업은 중국 기업들의 가격 인상을 억제하기 위한 방파제”라며 “만일 국내 음극재 기업들이 고사하면 중국 업체가 판가를 대폭 인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배터리 생태계의 밸류체인이 깨지면 배터리 제조사와 전기차 업체로까지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한시적이더라도 보다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자국 기업 제품을 구매하는 기업에 보조금으로 원가를 보상하거나 미국 IRA의 첨단 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와 같은 세제 혜택을 도입하는 방법이 거론된다. 박재범 포스코경영연구원 연구원은 “음극재는 전력단가 비중이 높은 만큼 전력 요금을 한시적으로 30~40% 감면해주는 방안을 비롯해 보다 직접적인 지원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