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0명 중 1명은 80세 이상이고 65세 이상 인구가 30%에 육박하는 고령자 대국 일본.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는 일본 내 산업에 다양한 영향을 주고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범용 제품은 살아남기 힘든 반면, 고령자 또는 특정 계층을 겨냥한 제품은 인기를 끌고 있다. 고령자는 연금과 저축 등으로 두둑한 지갑을 갖고 있어 젊은 세대보다 소비 능력도 더 높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등에 따르면 일본 신발 업체 치요다에서 판매하는 ‘스팟 슈즈’가 지난해 한 해 동안 약 75만 켤레가 판매됐다. 일본에서는 신발이 연간 10만 켤레 정도 판매되면 히트 상품으로 분류하는데 스팟 슈즈는 ‘메가급’ 히트상품인 셈이다.
스팟 슈즈의 특징은 허리나 무릎을 굽히지 않고도 신발을 신고 벗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발뒤꿈치 부분이 특수한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손을 사용하지 않고도 신고 벗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특수 형상은 치요다의 특허 상품이기도 하다. 2022년 3월 첫 제품을 출시했는데, 초기에는 남성용 구두 제품에 이를 적용했다. 식당이나 거래처 등을 방문할 때 신발을 벗는 경우가 많은 데 이를 배려한 것이다.
제품 판매와 동시에 고령자 등을 중심으로 재구매가 크게 늘었다. 신고 벗기 편한 것도 있지만 가격이 5000엔 안팎으로 저렴한 것도 한 몫했다. 이에 따라 첫 해 판매량은 15만 켤레에 달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회사는 고객층을 넓히기 위해 운동화 형태 제품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운동화 형태 제품은 남편 신발을 보고 부러워하던 여성 고령층이 제일 먼저 구입하기 시작했다. 이어 허리를 굽히기 어려운 임산부나 신발 신는 것이 어려운 아동층에서의 구입도 활발했다. 지난해 75만 켤레 판매에 이어 올해는 100만 켤레 판매가 목표다.
미국 브랜드인 스케쳐스가 출시한 ‘핸즈프리 슬립인스’는 신발굽 바깥쪽을 단단하게 만들어 손을 대지 않고도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신발 안쪽은 쿠션을 대어 잘 벗겨지지 않도록 했다. 발포우레탄을 사용해 신발 자체의 무게도 가볍다. 이 제품은 2022년 6월 일본에 출시됐는데 출시 초기부터 50대 이상으로 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고령자가 늘면서 자동차 산업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고령 운전자가 모는 차량이 어린이 행렬을 덮치거나, 역주행하다 마주 오던 버스와 충돌하는 등 끔찍한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고 있다. 이러한 사고 대부분은 고령 운전자의 인지 기능이 떨어져서 발생하고 있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일본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관리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령 운전자에 대해 운전면허자율반납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꼭 차량이 필요한 고령자에게는 특수한 안전장치가 부착된 ‘사포카(서포트카)’ 구매를 적극 유도하고 있다.
이 차량은 전방에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경우 자동으로 멈추고, 차선 이탈 시 경고음을 울려주는 등 기본적인 주행에 도움이 되는 기능이 갖춰져 있다.
인상적인 부분은 액셀러레이터를 갑자기 급가속할 경우, 엔진으로 출력이 가지 않도록 해 차량이 과속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이다. 이로 인해 고령 운전자의 급가속 문제로 인한 교통사고가 크게 줄었다는 분석이다.
고령자가 해당 차량을 구매할 경우 정부에서는 대당 최대 10만엔의 보조금도 준다. 보험료도 최대 9%가량 할인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차량 구매를 유도하는 상황이다. 사포카는 도요타와 혼다 등 일본 브랜드뿐 아니라 테슬라와 BMW 등 외국 브랜드에서도 출시하고 있다. 사포카 업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는 최근 해당 기능을 모든 차량에 의무적으로 장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고령자나 장애인을 위한 자율주행 휠체어도 일본에서 등장했다. 파나소닉의 전동 모빌리티 기기 ‘피모(PiiMo)’는 휠체어 형태로 여러 대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선두 차량의 움직임을 그대로 쫓아서 여러 대의 전동 모빌리티가 일렬로 이동하는 구조다. 후속 차량은 앞 차량에 달린 반사판을 장애물 센서로 감지해 그대로 따라간다. 빛이 튕겨나가는 데 걸린 시간이나 빛의 세기를 활용해 거리를 재는 구조다. 기기에 센서가 장착되어 있어 충돌 등을 피할 수 있다. 최대 10대의 휠체어를 연결해 이동이 가능하다. 일본 자동차 업체 스즈키는 고령자를 대상으로 개발 중인 1인승 전동차량을 지난해 10월 ‘도쿄 모빌리티쇼’에서 공개했다. ‘스즈라이드(SUZU-RIDE)’로 이름 붙여진 이 차량은 운전면허가 없어도 주행이 가능한 특정 소형 원동기 부착 자전거로 분류된다. 이 제품은 스즈키가 지난 1985년 출시한 ‘세니아카(시니어카)’의 변형 형태로 분류된다. 이는 고령자가 보도를 달릴 수 있는 3륜 형 자전거 스타일의 원동기 차량이다. 현재 매년 1만대가 판매되는 인기 상품이다.
세니아카는 고령자층에서 인기지만 건강한 고령자의 경우 ‘좀 더 빨리 달리면 좋겠다’라는 요청이 많아서 이를 반영한 제품이 스즈라이드다. 세니아카의 최대 속도가 시속 6㎞라면 이 제품은 시속 20㎞까지 가능하다.
고령자 증가는 대중교통의 흐름도 바꾸어 놓고 있다. 교토에는 일본에서 가장 짧은 전체 길이 207m의 철도가 있다. 이 철도는 사찰 입구에서 해발 584m 산 중턱에 있는 본당까지 운행한다. 차량 한 량이 케이블로 이동하는 케이블카 형태인데, 산을 오르내리기 힘들어하는 고령자 등에게 큰 인기다. 승무원은 절에서 일하는 직원이 맡는다. 철도는 지상 역에서 경사 27도의 철길을 오른다. 2분이면 종점에 도착한다. 차량 길이는 전체 6m인데 JR나 사철 등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사업 인가를 받은 철도로 분류된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하루 3000여 명, 지금도 하루 1000여 명가량이 이 철도를 이용하고 있다.
철도 이용에 따른 운임은 없다. 대신 어른 200엔, 초등학생 이하 100엔의 기부금을 받는다. 일본 정부는 케이블카나 모노레일도 철도로 분류한다. 이 때문에 쿠라마산에 설치된 이 철도가 전국에서 가장 짧은 거리를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