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몬, 빠에야, 이베리코…. 지중해식(食)의 특색을 가장 다채롭게 담고 있는 스페인 요리는 최근 한국에서도 많이 대중화한 모양새다. 스페인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은 물론, 가정에서 즐길 수 있는 간편식에도 스페인 음식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스페인 음식이 새로운 와인 소비층으로 떠오른 MZ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다. 하지만 스페인 현지의 맛을 제대로 구현한 음식은 여전히 흔치 않다.
최근 서울 청담동 골목에 새롭게 문을 연 ‘빈트 청담’은 조금 남다르다. 스페인 현지 레스토랑에서 10여 년을 보내고 지난해 말 한국에 막 들어온 김환이 셰프(37)가 주방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김 셰프는 현지에서 익힌 따끈따끈한 감각을 살려 정통 스페인 음식은 물론, 한국의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스페인 요리를 새롭게 재해석한 창작 요리를 선보인다. 계절 등에 따라 메뉴의 디테일은 수시로 바뀐다. 그는 “한국 손님들의 입맛에 맞춰 세부적인 요소를 조금씩 변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빈트 청담은 파인다이닝을 지향하는 하이엔드 요리를 내놓지만, 일반적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달리 일괄적인 코스 메뉴는 운영하지 않는다. 타파스(스페인식 전채)와 파스타, 구이류(숯&그릴), 빠에야(스페인식 쌀밥 요리), 디저트로 구성된 메뉴를 모두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다. 메뉴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풀코스 다이닝이 될 수도 있고, 와인에 곁들이는 가벼운 식사나 안주가 될 수도 있다. 가격대 역시 문턱을 낮췄다. 김 셰프는 “편안하고 캐주얼한 분위기로, 좀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찾아와 우리 음식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빈트 청담의 시그니처 메뉴는 단연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들이다. 플루마 이베리코 스테이크와 그릴에 구운 스페인산 문어, 그리고 빠에야다. 이 가운데 빠에야는 상대적으로 익숙하게 느껴지는 메뉴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흔히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빠에야와는 차이가 있다. 김 셰프는 “빠에야가 쌀을 활용한 팬 요리이다 보니 ‘스페인식 볶음밥’으로 잘못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정통 빠에야는 팬 위에 생쌀을 얇게 깔고 해산물과 함께 서서히 익혀내는 드라이한 쌀 요리”라고 설명했다.
빈트 청담의 빠에야는 현지 방식 그대로 생쌀을 자작자작하게 육수에 졸이듯 그대로 끓여 쌀의 꼬들꼬들한 식감과 함께 구수한 밥알에 깊게 스며든 해물의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올려진 큼지막한 새우와 부드럽게 씹히는 오징어까지 조화롭다. 김 셰프는 “정통 빠에야는 자칫하면 쌀이 눌어붙거나 탈 수 있고, 그렇다고 볶음밥을 만들듯 쌀을 너무 많이 휘저으면 전분 때문에 죽이 되기 쉬워 노하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플루마 이베리코 스테이크는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생산되는 이베리코 품종의 ‘플루마’라는 부위를 숯불에 구워낸 스테이크다. 빈트 청담은 이베리코 품종가운데서도 최고급인 ‘베요타’ 등급만을 사용한다. 베요타는 도토리만을 먹여 야생 방목해 키운 돼지를 뜻한다. 특히 플루마는 소량만 나오는 돼지고기 목살과 등심 사이 삼각형 모양의 최고급 부위다. 지방질이 과하지 않게 담백하면서도 살코기와 적절히 섞여 식감이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특유의 풍미 덕분에 마치 소고기처럼 느껴진다.
라드(자투리 돼지고기의 지방에서 얻은 유지) 오일을 발라가며 두세 번에 걸쳐 숯불에 구워낸 플루마 이베리코 스테이크는 비주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소고기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소고기보다 더 담백하고 고소해 잘 아는 단골손님들은 한우 스테이크보다 플루마 이베리코 스테이크를 더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구울 때 들어간 약간의 후추와 소금 외엔 어떠한 시즈닝이나 소스도 없지만, 톡톡 터지는 아이리시 홀그레인 머스타드를 곁들여 먹기만 해도 숯불 향을 머금은 육즙과 함께 입안을 가득 채우는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통감자와 아스파라거스, 꽈리고추, 새송이버섯 구이가 함께 제공되는데 특히 꽈리고추와의 색다른 조화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그릴에 구운 스페인산 문어도 빈트 청담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메뉴다. 국산보다 다리가 굵고 튼실한 스페인산 문어를 산지에서 한 번 자숙한 상태로 들여와 그릴에 구워낸 요리다. 겉은 바삭한 식감에 불맛이 느껴지고 속은 부드럽고 쫀득하다. 짜지 않고 촉촉해 어린아이가 먹기에도 좋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역의 문어 요리를 응용해 만든 메뉴로, 파프리카로 만든 소스와 구운 가지 속살을 긁어내 만든 가지 퓨레를 감자와 함께 곁들였다.
빈트 청담은 계절마다 제철 생선구이도 선보인다. 현재는 숯불에 구운 연자돔을 제공하고 있다. 방블랑 소스와 콤부오일, 홍합, 섬초를 곁들였다. 김 셰프는 “개인적으로 캐주얼 레스토랑과 하이엔드 레스토랑의 차이는 생선 요리의 유무라고 생각한다”며 “생선은 손질이 까다롭고 비린내를 잡아 풍미를 살리기 어려운 식재료로 꼽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임젤리와 유자오일, 루바브 주스, 그린허브오일, 샬롯피클이 어우러진 ‘줄무니전갱이 세비체’, 단새우에 감자 뢰스티, 파다노 아이올리, 비스크 에멀전 소스를 곁들인 ‘단새우 뢰스티’ 등 타파스 메뉴도 인기다.
빈트 청담의 다채로운 파스타도 와인에 제격이다. 고르곤졸라치즈 소스와 캐슈넛, 호두 프랄린(견과류를 설탕 시럽에 조린 과자)를 곁들이고 트러플오일을 가미한 핸드메이드 뇨끼가 대표적이다. 감태 봉골레 링귀니(넓은 파스타 면의 일종)는 모시조개와 백합, 홍합 등 3가지 조개와 아주 작게 깍둑썰기한 주키니 호박을 함께 오일에 볶고 마늘 콩피와 토마토 콩피, 감태 퓨레를 곁들인 파스타로 깊은 바다 향과 산뜻함을 동시에 가진 메뉴다.
셰프가 직접 만든 디저트 메뉴도 눈길을 끈다. 홈메이드 치즈케이크와 토종꿀 아이스크림은 3가지 치즈를 적절히 섞어 만든 치즈케이크에 코코넛으로 만든 크럼블과 바스크치즈케이크 크림을 올렸다. 부드러운 토종꿀 아이스크림 밑에는 아몬드 프랄린을 깔아 식감을 살렸다. 치즈케이크는 한입 베어 물면 커스터드처럼 첫맛은 부드럽고 달콤하며 씹을수록 고소하고 짭짤한 치즈의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스패니시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처럼 빈트 청담의 음식이 장르를 넘나드는 이유는 김 셰프를 포함한 4명의 셰프가 각기 다른 장기를 가진 덕분이다. 김 셰프는 “재패니시 프렌치를 해온 멤버와 파스타 쪽에서 경력을 오래 쌓은 멤버, 다재다능한 막내 셰프까지 똘똘 뭉쳐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며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조리법을 활용하면서도 주로 지중해식의 요소를 많이 가져와 한국 식재료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빈트 청담의 다이닝 공간은 이노베이티브 스패니시를 선보이는 만큼 일반적인 스페인 식당보다는 와인 바 같은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꾸며졌다. 홀 중앙을 가르며 엇갈려 놓인 원형 테이블을 감싼 곡선형 소파는 소파 양쪽의 테이블들을 각각 프라이빗하게 만들어주는 구획 역할을 하고, 테이블과 곳곳에 놓인 화병, 은은한 간접조명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홀은 4~6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원형 테이블 6개, 사이드 창가의 2인석 4개로 구성돼 있다. 최대 8명이 이용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은 1개만 운영하지만,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일반홀 테이블도 차분하게 식사를 하기엔 충분하다.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 셰프는 대학 시절 유럽으로 떠난 어학연수에서 우연한 기회에 셰프의 길로 전향하게 됐다. 김 셰프는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중 고민을 했는데, 세계적인 레스토랑 상위 10곳 중 5곳이 스페인에 있었고 스페인어에 상대적으로 익숙해 한국에 돌아온 뒤 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스페인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2년 스페인으로 간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곳곳의 여러 레스토랑을 거치며 실력을 쌓았다.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미쉐린가이드 3스타 레스토랑인 ‘디베르쇼’에서 5년 가까이 근무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 김 셰프는 “하나의 방향을 정해놓기보다는 계속 연구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앞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싶다”고 답했다.
빈트 청담
장르 이노베이티브 스패니시
위치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79길 19 레인에비뉴 201호
헤드셰프 김환이 셰프
영업시간 월~토 17:30~01:00 (22:30 라스트 오더)
가격대 2만6000~8만9000원
프라이빗 룸 1개(최대 8인·최소 주문금액 60만원)
전화번호 050-71361-2156
주차 발레파킹
[송경은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