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한 첼로 소리로 열리는 이 영화의 타이틀곡을 듣는 순간, 멈칫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바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冷靜と情熱のあいだ)>입니다.
사랑과 망각, 이별과 재회, 침묵과 애정을 주제로 다룬 이 영화는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어딘가가 저릿해지는 명작으로 기억됩니다. 특히 이 영화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버릴 곡이 하나도 없을 정도의 명곡으로 유명하지요.
2001년 개봉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원작은 1999년 출간된 동명의 소설 두 권이었습니다. 작가 츠지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하나의 같은 이야기를, 남녀의 두 시선으로 각각 쓴’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었지요. 당시 ‘아시아의 스타’였던 홍콩 가수 출신 배우 진혜림과 그윽한 눈빛의 일본 배우 다케노우치 유타카가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면서 세기말과 21세기 초엽의 감성을 대표했던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인간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을 최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았습니다. 감정도 시간과 깊이에 비례하는 걸까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서른 번째 생일날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한 연인의 10년에 걸친 사랑의 궤적을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1994년 봄, 자전거를 타고 피렌체 골목을 달리는 쥰세이의 하루를 비추며 영화는 시작됩니다. 국문과 출신이지만 미술에 관심이 컸던 아가타 쥰세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복원사들이 집결한 피렌체에서 ‘유화 복원’을 공부하는 연구생으로 일했습니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한 추상화가의 손자였던 쥰세이는 복원 소질이 남달랐습니다. 쥰세이의 뛰어난 재능을 확인한 화실 대표 조반나 선생은 쥰세이를 특별히 아꼈습니다.
피렌체에 온 지 벌써 3년쯤 지난 어느 날, 쥰세이는 옛 연인 아오이가 마침 이탈리아의 보석가게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한때 두 사람은 서로를 ‘정신의 쌍둥이’처럼 여길 만큼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러나 아오이와 쥰세이 사이에는 불가해했던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고, 쥰세이는 아오이의 중대한 결정 과정에서 자신이 철저하게 배제됐다고 느껴 이별을 통보합니다. 아오이는 침묵 속에서 쥰세이를 떠났습니다.
불같이 화를 냈던 쥰세이. 그러나 차갑게 떠났던 아오이. 하지만 두 사람은 가슴 한편에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치 내면에 하나의 작은 방을 만들어 두고, 그 방을 아주 가끔 열어보는 식이었지요. 망각은 결심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리 속에 새겨 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 내려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12쪽, 쥰세이의 독백) 쥰세이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아오이 자택을 찾아갑니다. 두 사람은 감정을 회복하게 될까요. 그러는 사이,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만나자던 옛 약속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관객들은 쥰세이와 아오이가 피렌체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마침내 재회하고, 10년 전 대학 교정에서 들었던 첼로 음악을 피렌체 공원 한복판에서 다시 듣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며, 직후 사흘간 한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아오이를 붙잡기 위해 쥰세이가 더 빠른 기차를 탔던 장면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하지만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어보면 영화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발견됩니다. 먼저, 왜 하필 쥰세이가 택한 직업이 ‘미술품 복원사’인지가 소설에 두드러집니다. 작가에 따르면,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과거’로만 이뤄진 공간입니다. 그곳엔 현재를 숨쉬면서도 과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전 세계 3분의 1의 고화가 피렌체에 전시돼 있습니다. 고화 복원 실력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도시 전체가 하나의 복원센터가 돼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미술품은 훼손되기 마련이고 쥰세이를 비롯한 고화 복원사들은 작품이 가진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일을 담당합니다.
색을 보정하고 방부제를 칠하는 작업을 통해 쥰세이는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영화 속에서 고백했습니다. “죽은 작가의 영혼이 나를 빌려 작업하는 듯한, 영혼이 맑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들여다보면 쥰세이의 복원은 단지 ‘영혼의 정화’만은 아니었습니다. 미술품을 복원하는 일은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희미해지는 기억을 선명하게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옛 연인 아오이가 있었지요. 쥰세이는 1인칭 문장으로 고백합니다.
“복원 작업을 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할 미세한 부분에 이르면, 어김없이 그때 그녀(아오이)의 표정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복원 일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돌이키는, 세계에서 유일한 직업이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21쪽, 쥰세이의 독백)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입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어로 리나시멘토(Rinascimento)입니다. 리나시멘토는 15~16세기 이탈리아 문화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본뜻은 ‘재생’입니다. 쥰세이가 살아가는 피렌체 땅도, 쥰세이가 복원하는 미술품도, 전부 아오이와 가졌던 시간의 재생, 즉 재회(再會)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볼까요. 소설과 영화에는 큰 차이점이 하나 발견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선 쥰세이가 복원 중이던 그림이 날카로운 칼로 북북 찢긴 채 발견됩니다. 조반나 선생이 쥰세이에게 맡긴 500년 짜리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영화와 소설에서 전혀 다른 작품으로 나옵니다.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조반나 선생은 쥰세이에게 15세기 중엽의 이탈리아 화가 프렌체스코 코사의 작품 복원을 제안했습니다. (코사의 어떤 작품인지는 소설에서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작품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였겠지요.) 반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조반나 선생이 쥰세이에게 복원을 맡긴 그림은, 16세기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았던 화가 루도비코 치골리의 그림이었고, 작품의 이름은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Maddalena penitente)>였습니다.
저 귀중한 그림이 날카로운 칼로 ‘X’자로 찢어진 채 발견되면서 쥰세이는 절규하고 절망합니다.
이 그림을 훼손한 진짜 범인이, 애초에 쥰세이에게 그림 복원을 맡겼던 조반나 선생이었음이 훗날 밝혀집니다. 조반나 선생의 권총 자살 직후였습니다. ‘조반나 선생은 쥰세이의 재능을 시기했고, 어쩌면 쥰세이를 사랑했기에 이 그림을 찢었던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쥰세이의 동료는 쥰세이에게 귀띔해줍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작품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였을까요.
막달라 마리아의 참회를 그린 이 그림은 따지고 보면 ‘후회하는 여성’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미술품을 복원할 때 만나게 되는 작품 속 인물은 결국 아오이였다고 쥰세이는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이를 상기한다면 쥰세이에게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속 여성은 성서의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아오이입니다. 또 이 그림의 주제까지 감안한다면 결국 그가 대면하게 되는 여성은 ‘후회하는 아오이’인 것이지요. 쥰세이가 그림을 복원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얼굴은 바로 지금 이 순간 후회하고 있을 아오이라는 의미입니다.
조반나 선생은 쥰세이에게 “복구를 해본들 또다시 부서질 뿐이야”(영화에만 나오는 대사)란 말을 남긴 뒤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조반나 선생은, 쥰세이의 작업을 통해 쥰세이가 오직 한 명의 여성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눈치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조반나 선생이 질투했던 건 쥰세이의 재능이었을까요, 아니면 쥰세이가 일생을 두고 못 잊었던 연인 아오이였을까요.
아오이는 오래전 연인 쥰세이를 자꾸만 떠나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쥰세이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지요.
“쥰세이는, 내 인생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먼 옛날 학생 시절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는 무엇이다.” (97쪽, 아오이의 독백)
그런 아오이는 한 보석가게에서 일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화와 달리, 소설 속 아오이가 3년째 근무하는 보석가게는 일반 보석가게가 아니라 ‘앤티크(antique) 보석’ 판매점입니다. 영화에선 뜻이 희미해졌는데, 아오이가 만지는 앤티크 보석은 중요한 함의를 가집니다.
쥰세이가 복원하는 그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에 훼손된 물건들입니다. 그에 반해 아오이 곁의 앤티크 보석은, 한때의 사연을 추억처럼 간직한 채 영원히 변치 않는 모습으로 염결하게 존재하는 물건들입니다. 훼손된 것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는 쥰세이와, 그저 시간의 한때를 간직한 보석들 곁에서 ‘냉정’하게 침묵하는 아오이는 서로 상반된 감정을 가진 남녀가 아닐까요. 이 영화 제목이 ‘냉정과 열정 사이’인 이유이겠지요. 영화는 질문합니다. ‘우리는 열정을 다하여 지나간 사랑을 회복해야 마땅할까, 아니면 흘러간 시간을 냉정하게 떠나보내며 추억해야 할까.’ 정답 없는 이 질문 앞에서, 인간의 모든 사랑이 ‘사이(間)’ 안에 자리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냉정을 유지하려는 아오이를 설득해내는 강력한 힘은 쥰세이가 가진 열정이었습니다. “과거 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206쪽, 쥰세이의 독백)
한 가지 더. 영화 속 쥰세이가 최후에 이르러 결국 복원을 끝마치는 루도비코 치골리의 작품은 <무염시태(無染始胎)>였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나셨다는 가톨릭 교리를 ‘무염시태’라고 부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대작입니다. 영화 속 쥰세이는 이 그림을 복원하면서 결국 아오이의 심연을 이해했던 것이겠지요. 루도비코 치골리의 이 그림이 현재 어디에 보관돼 있나 궁금해 구글링으로 찾아봤더니, 사진 한 장을 어렵게 발견했습니다. 이탈리아 엠폴리 지역에 위치한 ‘생 미셸 아르칸젤로 교회’의 측면 제단에 이 그림이 놓여 있다고 하네요. 불에 그슬린 흔적이 있지만 성모 마리아는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슴속의 어느 독방에 홀로 앉아 있을, 사랑했던 누군가의 표정처럼 말입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