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업계를 관통하는 화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전장’이다. 그동안 냉장고와 세탁기 등 가전을 만들던 LG전자는 이제 명실상부 전장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디지털 콕핏 등을 내세워 전장 사업을 키우고 있다. 최근 경기 침체로 불황 터널을 지나고 있는 디스플레이와 전자부품업체들도 모두 ‘전장’을 새 먹거리로 꼽고 있다.
오랫동안 ‘미운 오리’였던 LG전자 내 전장 사업은 이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평가받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2018년 취임 이후 새 먹거리로 선택한 게 바로 전장 사업이다. 휴대전화 등 오랫동안 부진했던 사업을 정리하는 대신 일찌감치 전장을 새로운 먹거리로 점찍었던게 구 회장이다.
LG전자 내 전장 사업은 크게 인포테인먼트(VS사업본부), 램프(ZKW), 파워트레인(LG 마그나 파워트레인) 등 3개 축으로 나뉜다. LG전자는 2018년 오스트리아 차량용 조명 회사 ZKW를 인수했고, 2021년 3월 자동차 부품사 마그나와 합작법인인 LG 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을 설립했다.
우선 LG전자의 전장 사업을 대표하는 VS사업본부가 180° 달라졌다. 올해 1분기 VS사업본부는 매출 2조3865억원, 영업이익 540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역대 1분기 실적 가운데 최대치다.
이 같은 실적 호조는 올해 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업계는 올해 LG전자 VS사업본부 매출이 약 11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본다. 지난해 매출(8조6496억원)과 비교하면 20% 넘게 증가한 규모다. 주력 사업인 생활가전과 TV를 제외하고 사업본부에서 매출 10조원이 넘은 건 2017년 이후 6년 만이다.
VS사업본부의 연간 매출액이 LG전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올해 10%를 넘을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2018년 7%였던 VS사업본부 매출 비중은 2020년 9%대로 상승했다.
VS사업본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차량용 인포테인먼트(정보+오락)’ 사업이다. 인포테인먼트란 차량 디스플레이에서 각종 주행 정보를 비롯해 다양한 콘텐츠 등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자율주행차의 등장으로 차량이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탑승객을 위한 인포테인먼트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상황이다.
증권업계에서 추정하는 VS사업본부의 올해 수주 잔고는 100조원에 달한다. 이 중 인포테인먼트 수주액이 약 65%에 달할 거라는 게 업계 추정이다. 인포테인먼트는 크게 텔레매틱스와 내비게이션, 오디오, 디스플레이 등으로 구성된다.
LG전자의 강점은 약 26년간 휴대전화 사업을 하면서 쌓아온 통신특허를 기반으로 한 텔레매틱스다. 텔레매틱스는 차와 인터넷을 연결하는 장치다. 자율주행차 시대에 이 기술은 다양한 데이터를 빠르게 수집·분석해 차를 제어하는 데 필수로 꼽힌다. 테슬라처럼 차량 안에서 소프트웨어를 실시간으로 내려 받는 무선업데이트(OTA)에서도 텔레매틱스 기술이 중요하다.
LG전자는 전 세계 텔레매틱스 시장의 선두주자다.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지난해 텔레매틱스 시장에서 LG전자 점유율은 23.3%에 달한다. LG전자가 보유한 통신특허만 3만 건에 이른다.
차량용 램프를 맡고 있는 ZKW는 고휘도 LED 주간 주행 램프, 레이저 헤드램프 등을 세계 최초로 양산한 기업이다. BMW와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포르쉐 등 프리미엄 완성차 업체에 헤드램프를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 마그나 파워트레인의 성장세도 가파를 것으로 전망된다. 김지산 키움증권 센터장은 “신규 멕시코 공장이 (LG전자의) 핵심 성장 거점이 될 것”이라며 “하반기에 공장을 본격 가동하면 북미 고객사 신규 전기차 플랫폼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e파워트레인 성장세가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e파워트레인은 연평균 50% 성장률을 달성할 거라는 게 증권업계의 전망이다.
삼성전자도 전장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전자와 마찬가지로 인포테인먼트는 삼성전자가 힘주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하만은 지난해 영업이익 8800억원을 기록해 2016년 인수 이후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올해 1분기에도 영업이익 1300억원을 낸 하만은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하만의 주요 전장 사업은 ‘디지털 콕핏’이다. 디지털 콕핏이란 운전석과 조수석 등 차량 전방의 내부 운전 공간을 디지털화한 것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하만의 디지털 콕핏 점유율은 24.7%로 추정된다.
삼성 디지털 콕핏의 강점은 오랜 명성을 떨쳐온 하만의 오디오다. 디지털 콕핏의 경우 음성 지원 시스템과 스피커가 필수라서다. 하만은 오디오뿐만 아니라 생체 인식 등 새로운 기술을 내놓으며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내놓은 차량용 솔루션 ‘레디’가 대표적인 예다. 레디케어는 운전자 상태 변화를 인지해 최상의 운전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 솔루션이다. 예를 들어 운전자가 운전 도중에 졸면 경고 알람을 들려주는 식이다.
하만은 올해 초 슈퍼카 브랜드인 페라리와 디지털 콕핏 ‘하만 레디 업그레이드’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BMW,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등도 하만의 고객이다.
삼성전자의 대표 사업인 반도체에서도 ‘전장’이 새 성장 동력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내연기관차에 반도체가 평균 200~300개 들어간다면, 자율주행차에는 2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 핵심인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과 카메라 등에 반도체가 탑재된다.
전 세계적인 메모리 반도체 불황 속에서도 차량용 메모리 반도체는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갈 거라는 게 시장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운전자 개입이 필요 없는 레벨 5단계 완전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D램 용량이 기존의 50배인 약 300GB(기가바이트)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낸드플래시의 경우 약 32배 성장한 5TB(테라바이트) 수준이다.
대만 TSMC에 맞서고 있는 삼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부로서도 차량용 반도체는 뺏길 수 없는 시장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4월 10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첫 회동을 한 것도 그만큼 차량용 반도체가 중요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2019년부터 자율주행차 반도체 위탁생산을 삼성에 맡겨왔다. 자율주행 칩은 자율주행차에서 카메라와 레이다 등으로 수집한 정보를 분석한 뒤 차량을 제어하는 ‘두뇌’ 역할을 한다.
삼성전자는 올해 들어 신규 고객사를 잇달아 확보했다. 지난 2월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전문기업 암바렐라와 자율주행용 반도체를 5㎚(나노미터·1㎚=10억 분의 1m) 공정에서 생산하는 계약을 맺은 게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자율주행차 반도체 개발업체 모빌아이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칩 위탁생산 주문도 따냈다.
최근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디스플레이업계도 ‘전장용 디스플레이’에 주목한다. 인포테인먼트 서비스 시장이 커지고, 자동차 상태와 주행 정보를 알려주는 디스플레이 역할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차량용 프리미엄 디스플레이 시장은 지난해 전체의 21%(4100만 대) 수준에서 2027년 전체의 약 47%(1억1300만 대)로 비중이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연평균 성장률은 약 19%다.
이 같은 흐름에 맞춰 LG디스플레이도 전장용 디스플레이 사업을 키우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성장성이 높은 10인치 이상 프리미엄 차량용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LG디스플레이의 차량용 디스플레이 매출은 2022년 1조6000억원에서 2025년 3조5000억원으로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4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LG디스플레이는 “차량용 디스플레이 사업 비중이 2021년 5월에서 2022년 7%로 증가했다”며 “향후 이 비중이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LG디스플레이는지금까지 중대형 제품에 주력해왔는데, 올해부터 소형급 패널인 스마트폰과 차량용 디스플레이 등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차량용 플라스틱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의 경우 전 세계에서 LG디스플레이가 유일하게 공급한다. OLED는 액정디스플레이(LCD)보다 화질과 시야각이 뛰어나고, 자연스러운 곡면 구현이 가능한 게 장점으로 꼽힌다.
여기에 LG디스플레이는 독자 기술을 적용한 차량용 OLED와 저온다결정실리콘(LTPS) LCD 차별화 기술로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탠덤 OLED도 주력 제품 중 하나다. 텐덤 OLED란 유기발광층을 2개 층으로 쌓는방식으로, 기존 1개 층보다 휘도가 높고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부터 양산하는 2세대 탠덤 OLED의 경우 유기발광 소자 효율을 개선해 화면 밝기가 높아졌고, 소비전력도 기존 제품보다 약 40% 줄었다.
LG디스플레이는 텐덤 OLED를 탄성 있는 플라스틱 기판에 결합해 차량용 P-OLED(플라스틱 OLED)도 선보였다. 차량용 P-OLED는 LCD보다 소비전력은 60% 낮고, 무게는 80%나 가벼워 전기차에 최적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LG디스플레이의 연간 차량용 디스플레이 수주액도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LG디스플레이의 지난해 차량용 디스플레이 연간 수주 금액은 4조~5조원 수준으로 전년 대비 약 40% 증가했다. LG디스플레이는 차량용 디스플레이를 비롯한 수주형 사업의 전사 매출 비중을 올해 4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삼성디스플레이도 차량용 디스플레이 시장에 적극적이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최근 슈퍼카 페라리에 최첨단 OLED 디스플레이를 공급하기로 했다. 내년부터 양산하는 BMW 신형 최고급 세단에도 OLED를 공급한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올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에도 참가해 ‘오토모티브 체험존’을 마련했다. 체험존에는 34인치 디지털 콕핏용 디스플레이와 13.4인치 라운드 디스플레이 등 차량용 디스플레이가 전시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디스플레이 사업에 특히 힘을 주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2월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를 찾아 전장용 디스플레이 사업 현황과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 개발 계획 등을 논의했다. 이 회장은 당시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혁신하고 선제적으로 투자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키우자”라고 직원들에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경제 산업부 이새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