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무수히 많은 위스키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독립병입(IB·Independent Bottling) 위스키는 다양한 브랜드와 레인지를 충분히 즐겨본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복잡하고 오묘한 술이다. 독립병입은 증류소에서 위스키를 병입하는 공식병입(OB·Official Bottling)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독립병입업자(Independent Bottler)들이 증류소에서 오크통을 사서 개별적으로 병입을 하는 것이다.
19세기 위스키 업계에 첫 상업 브로커가 등장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들이 오늘날 독립병입업자의 전신이다. 이들은 여러 증류소에서 대량으로 위스키 오크통을 매입하여 그것을 블렌딩해 병입하거나 오크통째 술집과 식당에 팔았고, 때때로 자본력을 가진 개인 소비자들에게 판매했다.
독립병입업자들은 구입한 원액에 대해 자유롭게 통제권을 행사하며 병입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쉽게 볼 수 없는 마니악하고 희소성이 있으며 흥미로운 배경을 가진 위스키들이 탄생할 수 있다. 이런 독립병입 회사들은 고든 앤 맥페일(Gordon & MacPhail), 시그나토리(Signatory), 더글라스 랭(Douglass Laing) 등과 같은 대형 회사부터 소규모 부티크 형태까지 다양하다.
국내에서도 위스키 시장이 점차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독립병입 위스키에 대한 관심과 수요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독립병입 위스키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바 ‘퍼플라벨’ 같은 공간이 생기기도 했고, ‘위스키내비’ ‘달달위스키’ ‘레거시스피리츠’처럼 해외의 독립병입 위스키를 수입하면서 동시에 직접 본인들이 캐스크 구매부터 병입, 레이블까지 기획하여 진행하는 한국의 독립병입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레거시스피리츠를 설립한 김태호 대표는 취미로 위스키에 입문했다가 그 매력에 푹 빠져 정신을 차려보니 바텐더가 되었고, 종국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립병입 위스키를 만들게 된 사람이다. 김 대표는 ‘더부즈’ 한남, 해운대를 비롯해 총 4개의 바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상에 출시된 위스키는 약 20만 종을 넘어섰어요. 매일 하루에 10종류씩 50년을 마신다고 해도 결코 마셔볼 수 없는 양이죠.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방향성을 정해 중점적으로 마셔야 할 위스키를 추려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제 취향에 잘 맞는 독립병입 위스키를 파고들게 됐어요.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규모의 독입병입 회사들도 있습니다만 그 반대편에는 그저 위스키가 좋아서 시작한 소형 독립병입업자들도 많이 있죠. 저 또한 직접 독립병입 위스키 만드는 일을 오래전부터 늘 꿈꿔왔어요.”
그가 처음으로 만든 위스키의 이름은 ‘레거시스피리츠 글렌로시스 1997 24년’이다. 오직 211병만이 세상에 나왔다. 캐스크 브로커의 소개를 통해 세계적인 위스키 전문가 단체인 키퍼스 오브 더 퀘익(The keepers of the Quaich)의 일원이자 국제주류품평회(IWSC)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콜린 햄튼 화이트 경과 함께 줌 미팅으로 캐스크 샘플을 테이스팅했다. 모두가 만족한 캐스크였기에 첫 제품으로 낙점됐다.
이 위스키는 내추럴한 당도, 꽃과 건과일의 조화로운 향, 긴 피니시 등을 보여준다. 한옥에 살고 있는 그는 최근 전통문화에 관심을 더욱 갖게 되며 이 위스키의 레이블을 풍속화를 그리는 이효준 작가와 함께 제작했다. ‘바 더부즈’ ‘보이드’ ‘머스크’ ‘미스터 칠드런’ 등의 바에서 이 위스키를 맛볼 수 있다.
사실 독립병입 위스키는 입문자나 초심자에겐 그렇게 친절한 술은 아닐 수 있다. 독립병입 위스키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성인데, 거기서 오는 재미를 느끼려면 비교의 기준이 되는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이렇게 설명한다. “A 증류소의 위스키는 이런 특징이 있는데, A 증류소의 독립병입 위스키인 B 제품은 그 특징과는 전혀 다른 맛이 난다든가 하는 식의 비교를 해볼 수 있겠죠. 이런 기준 없이 독립병입 위스키를 접하면 그저 처음 보는 위스키를 마셔보았다는 점 외에 다른 매력을 놓칠 수 있어요.” 김 대표는 ‘레거시스피리츠 글렌로시스 1997 24년’을 ‘부나하벤 25년’ ‘글렌로티스 12년’과 같이 비교 시음해봐도 좋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번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 있다. ‘달달위스키’는 오랫동안 술로 교류하며 알고 지낸 친구 3명이 동업한 회사다. 이들 역시 좋아하는 캐스크를 골라 마시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고 어느새 취미가 일이 되었다. 현재 20여 가지의 독립병입 위스키를 출시했는데 이 중 절반은 달달위스키가 직접 캐스크를 구매하여 독창적인 레이블을 입혀 선보였다. 위스키의 가격은 10만원대부터 수천만원대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달달위스키의 이세희 이사 역시 우연히 맛본 독립병입 위스키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상했다. “사마롤리 1966년 보모어 독립병입 위스키를 싱가포르 바에서 마셔볼 수 있었어요. 10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그 맛이 선명하게 기억나요. 결이 촘촘하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이랄까요. 유명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 완벽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위스키였죠. 지금은 1억원 가까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마 파는 사람도, 갖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을 거예요.”
현재 달달위스키는 ‘사마롤리’의 유통권을 갖고 있다. 최근에 ‘보모어’ 코리아 에디션을 선보였다. 가격은 한 병에 약 200만원이며, 130병 정도 국내에 출시했다. 올드 보틀 위스키에서 느낄 수 있는 나무향과 흔히 파우더 화장품에 비유하곤 하는 특유의 향을 지닌 술이라고 묘사했다.
달달위스키는 동일 이름의 갤러리달달을 운영하며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과 레이블 협업을 펼친다. 프로베니언스 블레어에솔 레이블 작업을 함께한 김예슬 작가, 한승수 작가와는 기획 전시를 한 달간 열기도 했다. 환경단체 ‘와이퍼스(WIPERTH)’의 포스터를 제작해, 위스키 레이블로 제작하고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는 계획도 예정되어 있다.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위스키 모임 바깥 풍경에서는 이토록 흥미롭고 낯선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다.
김아름 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