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음식남녀| “아버지가 좋아하는 고산차예요, 마시면 기분이 한결 나을 거예요”
김소연 기자
입력 : 2022.10.07 11:12:48
수정 : 2022.10.07 11:13:54
<결혼피로연> <음식남녀> <센스 앤 센서빌리티> <와호장룡> <브로크백마운틴> <색계> 그리고 <라이프 오브 파이>까지. 중국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가 정신없이 섞여있는 듯한 이 영화 리스트는 모두 대만 출신 영화감독 ‘이안’이 감독한 작품이다. 이안은 <브로크백마운틴>으로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이후 <라이프 오브 파이>로 다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두 번째 감독상을 수상한다.
<음식남녀>는 <결혼피로연>으로 재기발랄함을 널리 알린 이안 감독이 그 다음해인 1994년에 선보인 영화다. 벌써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역시 그냥 ‘영화 천재’라 불렸던 게 아니야” 인정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아시아권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한 배우 유덕화와 함께 영화 <천장지구>를 찍은 후 일약 스타로 떠오른 배우 오천련이 여주인공으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만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요리사였던 ‘주사부’는 미각을 잃은 후 퇴직하고 세 딸과 함께 낡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가족들과 함께 먹는 것이 주사부의 유일한 낙이다. 혼기를 놓친 큰딸 ‘가진’은 중학교 선생님으로 보수적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둘째딸 ‘가천’은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 가천은 어려서부터 요리에 소질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힌 이후 절대 주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막내 ‘가령’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다. 세 딸은 매주 일요일마다 식탁에 둘러앉아 아버지가 준비한 근사한 음식을 함께 먹지만, 서로의 생활에 대해 관심도 없고 오로지 독립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온갖 다양한 인간사’. 흔하디흔한 스토리 같지만, <음식남녀>는 그 스토리 위에 양념으로 얹힌 근사한 요리의 향연으로 관객의 눈길을 빼앗았다. 19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비즈니스 디너’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미슐랭 스타 식당이 즐비한 요즘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식 문화가 척박했다. 그런 시절에 만난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음식 영화는 꽤 문화적 자극을 주는 기제였다. 제목부터 <음식남녀>가 아닌가.
‘음식으로 눈요기 하고 그 안에서 남녀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음식남녀>에, 그런데 뜬금없이 자꾸 ‘고산차’ 얘기가 나온다. 오천련이 역할을 맡은 둘째딸 ‘가천’과 애인이 어느 날 찻집에서 만나는데 주문을 받으려 하자 “고산차 주세요”라고 하지를 않나, 우울해하는 아버지에게 ‘가천’이 고산차를 내밀며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고산차예요, 마시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하는 식이다. 까마득한 30년 전에도, 심지어 영화에 PPL이 있었나? 실제 당시 대만 고산차 업계에서 PPL을 세게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복습. 녹차, 백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 등 6대 다류의 한 가지인 청차는 우롱차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우롱차는 다시 크게 4가지로 분류한다. ‘민북우롱’ ‘민남우롱’ ‘광동우롱’ 그리고 ‘대만차’다. 민북우롱과 민남우롱은 각각 복건성 북쪽과 남쪽에서 생산되는 우롱차다. 이 중 민북우롱은 복건성 북쪽에서도 ‘무이암산’ 지역에서 주로 만들어져 ‘무이암차’라는 이름으로 따로 불린다.
대만차는 당연히 대만의 우롱차를 의미한다. 대만은 중화민국으로 독립하기 전까지는 원래 복건성에 속한 부속섬이었다. 결국 넓은 의미에서 대만차도 복건성 우롱차에 속한다. 광동우롱은 광동성에서 만들어지는 우롱차를 가리킨다.
대만 여행 하면 망고빙수와 펑리수(파인애플로 만든 대만의 대표적인 디저트)부터 떠올리지만, 차를 사가지고 오는 이도 꽤 있다. 실제 대만차는 한국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꽤 이름이 나 있다. 그뿐인가. 대만차는 깨끗하고 청정하기로 소문이 났다. 이런 이유로 “중국차는 안 마셔도 대만차는 마신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대만차의 시작을 놓고 오래도록 두 가지 차가 서로 자기가 ‘원조’라고 싸웠다. 문산포종과 동정오룡이다(한자 ‘오룡’의 중국어 발음이 ‘우롱’이라 우롱차다). 보통 ‘북포종, 남오룡’이라 한다. 대만 북쪽에서는 문산포종이, 남쪽에서는 동정오룡이 주류라는 의미다.
청나라 시절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하던 존 도트는 복건성에서 만드는 홍차를 유럽으로 수출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 존 도트가 어느 날 대만 타이베이에 와보고는 기후와 토양이 차 생육에 딱이라며 타이베이 문산 지역에 차나무를 가져다 심었다.
이게 ‘문산포종’의 시작이다. 당시 존 도트가 가져온 차나무는 복건성 무이암산의 차나무였다. 무이암산의 원래 이름은 무이산. 바위가 많아 ‘바위 암’자를 붙여 ‘무이암산’이라 불렀다. 무이암산에 바위가 많은 것처럼 문산에도 바위가 많았고, 존 도트의 예상처럼 문산에서 무이암산 차나무는 엄청 잘 자랐다. 그렇게 ‘문산포종’의 역사가 시작됐다.
보통 차 이름은 앞쪽이 지명, 뒤쪽이 차의 품종이다. 그럼 ‘포종’이 품종일까? NO. 당시 문산에서 만든 차를 종이에 싸서 팔았는데 여기서 ‘포종’이란 단어가 생겨났다. ‘포종’은 ‘종이에 쌌다’라는 의미다.
청차(우롱차)의 한 갈래인 대만차는 보통 이렇게 동글동글 말려있다.
문산포종이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비교적 역사가 명확한 데 반해 동정오룡은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청나라 때 대만에 살던 한 선비가 복건성에 가 과거시험을 본 후 합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이암산 차나무를 선물로 받아와 고향인 동정산 꼭대기에 심었고 이렇게 동정오룡이 시작되었다는 스토리만 전해져 온다.
눈 밝은 분이라면 여기서 “문산포종이나 동정오룡이나 모두 무이암산 차나무로 시작했네” 하실 터. 딩동댕! 결국 대만에 들어온 두 가지 차는 모두 무이암산 우롱차였고(우연하게도 품종도 둘 다 ‘청심오룡’이라는 품종이었다), 역시 복건성의 일부였던 대만에서는 그 우롱차가 잘 자랐고, 그렇게 대만차의 역사가 시작됐다. 다만 북쪽에서는 그 차를 ‘문산포종’이라 불렀고, 남쪽에서는 ‘동정오룡’이라 불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만차 ‘동방미인’ 유명세에 중국 ‘귀비우롱’ 나와
품종도 무이암산 청심오룡으로 똑같은데 재배 지역과 이름만 차이가 나는 걸까? 다른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문산포종은 그냥 길쭉한 모양으로 만들어 종이에 싸서 판매한 반면, 동정오룡은 동글동글 말려있는 ‘구슬’ 형태다.(동그랗게 똘똘 뭉쳐놓으면 차 부피가 줄어든다. 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차를 내부가 알루미늄으로 코팅된 비닐봉투에 넣어 대거 수출하기 시작했다. 부피도 작고 밀봉되어 보관도 용이한 이런 형태의 차에 전 세계인이 열광했다. 대만차의 영광이 시작된 지점이다.) 또 문산포종은 청량한 맛이 대부분인 반면, 동정오룡은 훨씬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난다. 그런 맛이 나게 제다했기 때문이다.
동방미인은 ‘어린 싹’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얀 털이 붙어있는 흰색 찻잎이 많이 섞여있다.
그럼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고산차’는 무엇일까? ‘고산(高山)’이라는 단어에서 바로 알 수 있듯, ‘높은 산에서 만든 차’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지역이 아리산과 리산이다. 보통 ‘아리산 고산차’ ‘리산 고산차’라 부른다. ‘차나무를 높은 곳에 가져다 심어 재배하고 그렇게 만든 차를 좀 더 비싸게 파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일종의 ‘고급 대만차’인 셈이다. 실제로 차나무 산지 고도에 따라 차 가격이 확확 달라진다.
보통 고산차라 하면 1000m 이상 해발고도에서 만든 차를 얘기한다. 똑같은 차나무를 높은 지역에 가져다 심고 거기서 나온 찻잎으로 차를 만들면 뭐가 달라지냐고? 높은 산에는 안개가 꼈다 걷혔다 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고지대에 심어진 차나무를 에워싸고 안개가 꼈다 걷혔다 하면서 일종의 독특한 ‘테루아(작물 생산에 영향을 주는 토양, 기후 등 조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보통 와인을 두고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가 형성되는 것. 그 테루아의 결과 ‘산두운(山頭韻)’이라고 하는 독특한 고산차의 풍미와 정취가 생겨난다나.(사실 무이암차의 풍미인 ‘암운(巖韻)’만큼이나, 고산차의 풍미인 ‘산두운’도 느끼기란 꽤 쉽지 않다.)
동방미인(東方美人)은 ‘동양의 미인같은 차’라는 의미다. 중국에서는 ‘東方美仁’이라는 이름의 짝퉁 차를 종종 볼 수 있다. 왼쪽이 찍퉁 차.
▶1000m 이상 해발고도에서 만든 고산차
영화에서는 ‘고산차’ 얘기가 계속 나왔지만, 실제 대만차를 대표하는 것은 ‘동방미인’이다. 대만차가 모두 뿌리를 중국에 두고 있는 반면 ‘동방미인’은 대만이 원조다.
동방미인차가 워낙 유명해지면서 중국 일부 지역에서 ‘귀비우롱’이라는 일종의 ‘짝퉁차’를 만들어냈지만, 향이나 맛에서 따라오질 못한다.(이름이 왜 귀비우롱이냐고? 중국의 미인을 떠올려 보시길. 첫손에 꼽히는 미인이 양귀비다. 그래서 ‘귀비우롱’이다.) 심지어 원래 한자인 ‘東方美人’ 대신 ‘東方美仁’이라 이름 붙여 판매하는 짝퉁 차도 있다.(10여 년 전 차를 전혀 모르던 시절, 상하이 예원 앞 시장에서 다들 차를 사기에 따라서 ‘東方美仁’ 차를 사온 적이 있다. 차를 알게 된 후 “내게도 그 귀하다는 동방미인차가 있다. 그것도 아주 싸게 사왔다”며 호들갑을 떨다 자세히 보니 ‘東方美仁’ 이어서 망신을 당한 적도….)
영국 여왕이 이 차를 마시고 ‘동방의 미인 같은 차’라고 감탄해서 ‘동방미인’ 이름이 붙었다나, 어쨌다나. 대충 감탄사 조로 “Beautiful” 했을지도.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든 동방의 미인 같은 차 ‘동방미인’은 오늘날 대만을 대표하는 차로 올라섰다. “대만차는 역시 동방미인이지.” 어디 가서 이 정도 얘기만 할 수 있어도 ‘대만차 쪼~옴~ 아시는 분’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