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의 ‘골프(Golf)’가 올해로 탄생 50주년을 맞았다. 1974년 첫선을 보인 이후 현재까지 8세대에 걸쳐 진화한 이 준중형 해치백의 전 세계 판매량은 약 3700만 대. 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자동차이자 폭스바겐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모델로 해치백의 무덤이라 불리는 한국에서도 올 3월 누적 판매량 5만 대를 돌파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차 발표가 이어지는 시대에 과연 어떤 매력이 골프를 타임리스 아이콘으로 이끌었을까.
수입차 딜러사의 한 임원은 “자동차 모델이 수십년 간 명맥을 잇는다는 건 자국에서의 인기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며 “자국 시장에서 인정받은 모델이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수입 브랜드 관계자는 “단종 대신 계승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쏘나타’나 ‘그랜저’만 봐도 알 수 있다”며 “소비자에게 회자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골프의 역사는 1974년 독일 시장의 새로운 변화에서 출발했다. 그동안 폭스바겐을 대표한 모델은 딱정벌레 차로 알려진 ‘비틀’. 그 어떤 모델도 명함을 내밀지 못할 만큼 아성이 높았지만 폭스바겐은 1960년대부터 비틀의 명성을 이어갈 후속 모델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 폭스바겐의 개발 목표는 ‘온 가족이 안전하게 탈 수 있는 기술적 완성도와 가성비 높은 차’였다. 여기에 폭스바겐 엔지니어들이 내세운 ‘스스로 타고 싶은 차’란 기준이 더해진다. 개발 프로젝트는 쉽지 않았다. 수년간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EA276’ ‘EA337’ 등 콘셉트 모델을 내놓은 끝에 골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멕시코만에 흐르는 거대한 해류, 걸프 스트림(Gulf Stream)의 독일식 발음 ‘Der Golfstrom’에서 이름을 따온 1세대 골프의 등장은 기존 자동차 시장의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십년간 차량 후방에 자리하던 엔진이 앞쪽에 배치됐고, 비틀이 지배했던 후륜구동 대신 전륜구동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후 ‘뉴 비틀’ ‘티구안’ 등 폭스바겐 차량뿐 아니라 계열사인 아우디, 스코다, 세아트의 소형, 준중형, 중형 모델이 모두 골프의 전륜구동 플랫폼에서 탄생하게 된다.
골프의 초기 디자인은 현대차 ‘포니’를 디자인한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손을 거쳐 차별화됐다. 외관은 선과 면, 예리한 각으로 구성돼 마치 종이접기를 한 것처럼 강렬했고, 실용적인 실내 공간이 더해지며 유럽 소형차의 판도를 단번에 바꿀 만큼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고급 차에만 적용되던 첨단기술과 안전 장비, 다양한 파워트레인이 탑재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 됐다. 물론 소비자가 눈여겨 본 건 그럼에도 여전히 높은 가성비였다. 1세대 골프(Golf Mk 1·1974~1983년)는 1974년 3월 독일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한다. 그 해 5월 매장에 출시됐는데, “모던한 디자인과 우수한 기본기, 해치백 설계 등 모든 요소의 장점을 한데 모은 현대적인 콤팩트 카의 표준”으로 평가받았다. 1세대 골프는 후륜구동 대신 전륜구동, 공랭식 대신 수랭식, 복서 엔진 대신 인라인 엔진을 배치했고, 넓은 테일게이트와 접이식 뒷좌석을 채택해 용도에 맞게 공간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판매량은 독일 내 출시 이후 2년 만에 100만 대를 돌파했고, 전 세계에서 총 699만 대가 판매(구조가 동일했던 모델 ‘제타’ 판매량 포함)됐다.
베이비붐 세대의 첫 차는 2세대 골프(Golf Mk 2· 1983~1991년)였다. 높은 인기에 ‘골프 제너레이션’이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기술의 진보를 대중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2세대 골프는 산소 센서로 제어되는 촉매 변환기, 고급 차에만 적용됐던 ABS 시스템, 골프 최초로 사륜구동 시스템이 탑재된다. 오프로드 주행 성능을 보강한 ‘골프 컨트리’ 등 다양한 파생 모델도 인기를 누렸다. 전 세계 판매량은 약 630만 대. 골프는 탄생 10주년이 된 1984년에 생산량 1000만 대를 돌파했다.
‘안전의 대명사’란 수식어는 3세대 골프(Golf Mk 3·1991~1997년)에서 비롯됐다. 우선 1992년부터 운전석 에어백이 적용됐고, 1996년부터 전 모델에 ABS를 기본 장착했다. 이외에 동급 최초로 6기통 엔진이 탑재됐고, 반자동 변속기, 크루즈컨트롤 시스템, 디젤 엔진용 첫 산화 촉매변환기, 첫 직접분사방식 디젤 엔진, 첫 사이드 에어백 등이 적용됐다. 1994년 5월, 골프는 누적 생산량 1500만 대를 돌파한다.
4세대 골프(Golf Mk 4·1997~2003년)는 스타일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특히 골프 특유의 ‘C필러’ 디자인이 주목받았다. ESP(전자제어 주행안정 프로그램)를 선보이며 등장한 4세대는 여타 독일 차의 ESP 탑재를 이끌기도 했다. 2002년에는 직접 분사 방식 가솔린(FSI) 가솔린 엔진을 얹은 첫 골프가 등장했고, 머리 보호(커튼식 사이드) 에어백이 기본 설치된 모델이 첫선을 보였다. 2002년 폭스바겐은 최고 속도 250㎞에 이르는 ‘골프 R32’를 출시했다. 4세대 골프는 499만 대가 생산된 후 5세대에게 바통을 넘겼다.
5세대 골프(Golf Mk 5·2003~2008년)는 수많은 중소형 경쟁자들과 품질로 승부를 겨룬다. “레이저 용접 차체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평가받았는데, 실제로 이전 모델에 비해 비틀림 강성이 35%나 향상됐다. 처음으로 뒷좌석 측면 에어백이 옵션으로 마련됐고, 4링크 리어 서스펜션, 6단 DSG 듀얼클러치 변속기, 바이제논 헤드라이트, 틸팅·슬라이딩 기능이 있는 파노라마 선루프 등이 탑재됐다. 또한 ‘골프 GTI’에 세계 최초로 터보차저와 슈퍼차저를 함께 사용하는 트윈차저 기술을 선보여 역동성 면에서 한 단계 앞서나갔다.
6세대 골프(Golf Mk 6·2008~2012년)는 유로 NCAP 충돌 시험에서 최고 등급인 별 다섯 개를 획득할 만큼 안정적이었다. 이번에는 무릎 에어백이 기본으로 설치됐다. 라이트 어시스트 상향등 자동 제어 기능, 파크어시스트, 힐 스타트 어시스트 등 새로운 운전 보조시스템과 ‘DCC 어댑티브 섀시 컨트롤’ 같은 새로운 기술이 당시 기준으로 가장 진보적인 골프를 완성했다.
7세대(Golf Mk 7·2012~2019년)로 넘어오면서 골프는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최대 100㎏이나 경량화에 성공하며 엔진에 따라 연료소비량이 최대 23%나 줄었다. 폭스바겐은 7세대 골프에 다양한 운전 보조 시스템을 새롭게 추가했다. 다중 추돌 방지 브레이크,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ACC), 프런트 어시스트, 긴급 제동 보조 시스템 등 기능이 전 세계 약 600만대의 생산을 이끌었다.
가장 진화된 골프는 현재진행형인 8세대 골프(Golf Mk 8·2019~현재)다. 동급 최고 수준의 최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 ‘IQ.드라이브-트래블 어시스트’로 시속 210㎞까지 능동적 주행 보조가 가능하고, 최첨단 인터랙티브 라이팅 시스템 ‘IQ.라이트-LED 매트릭스 헤드라이트’를 탑재해 안전한 야간 주행 환경을 구현했다. 무엇보다 EA288 evo 엔진을 탑재한 ‘2.0 TDI’는 유로 6d를 만족하는 획기적인 배기가스 저감 능력까지 갖췄다.
폭스바겐은 올해 전 세계적으로 골프 5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진행 중이다. 지난 7월에는 독일 볼프스부르크에서 2500여 대의 골프와 1만 5000여 명 이상의 골프 오너가 모인 ‘2024 GTI 팬 페스트’가 열렸다. 9월에는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에서 ‘골프 50주년 기념 글로벌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지난 10월 12일 전국의 국내 골프 오너들이 한데 모이는 ‘2024 폭스바겐 골프 트레펜 코리아’가 열렸다. 인천 영종도에서 개최된 행사에는 다양한 세대의 골프 100여 대, 골프 오너와 가족, 친구 등 총 280여 명이 참석해 자신의 차량을 전시하고, 다른 오너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틸 셰어 폭스바겐그룹코리아 사장은 “골프 출시 50주년을 맞은 기념비적인 해에 골프의 앰배서더라 할 수 있는 고객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기쁘다”며 “골프가 한국 수입 해치백 시장의 선두 주자로 자리잡아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응원을 부탁한다”고 전했다.
50년간 세계적인 베스트셀링카로 등극한 골프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최근 폭스바겐의 행보는 심상치 않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의 국민기업 폭스바겐의 현실에 대해 “정밀하게 작동하는 값비싼 기계의 경이로움을 생산해 온 독일의 경제시스템이 디지털 세상에서 더 이상 그 경이로움을 재창조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창사 87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 공장 폐쇄 검토에 들어간 데 이어 잇따르고 있는 실적 경고를 꼬집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시장에서도 마찬가지. 업계에선 폭스바겐코리아의 연간 판매량이 1만대 선을 밑돌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가 집계한 통계를 살펴보면 폭스바겐 브랜드는 올 1월부터 9월까지 5916대를 판매했다. 국내 시장에 진출한 독일 브랜드 중 최하위 수준이다. 브랜드별 연간 누적 판매량 순위에선 9위에 오르며 10위 안에 머물렀지만 베스트셀링카 순위에선 밀려났다. 폭스바겐의 올해 월평균 판매량은 657대에 그쳤다. 수입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다 할 신차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지만 최근 트렌드인 하이브리드 모델이 전무한 것도 의아한 부분”이라며 “해외에서 판매 중인 골프나 티구안 PHEV 모델의 국내 판매 계획도 알려진 바가 없다”고 전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0호 (2024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