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트렌드코리아 2024’를 통해 본 올해의 키워드는 분초사회였다. 분초사회란 시간의 중요성이 매우 강조되는 사회로 시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분초를 다투며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향은 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최근에는 유명 맛집의 대기 시간을 줄여주는 웨이팅 앱이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하기보다 유튜브에 게재되는 몰아보기 영상을 선호하는 현상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해 최근 시간을 아껴주거나 투입된 시간 대비 높은 효율을 보여주는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바로 시간 대비 성능을 의미하는 ‘시성비’가 중요한 소비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는 것. ‘시성비’ 트렌드는 점차 전 영역으로 확대되며 소비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활용률이 급증하고 있는 챗GPT 같은 생성AI 서비스들 역시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시성비에 부합한 것이 성장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세계적으로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유튜브 ‘숏츠’ 등 짧은 길이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흐름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숏폼 드라마가 큰 인기를 누리며 산업화하는 추세다. 이러한 흐름을 감지한 국내에서는 숏폼 드라마 플랫폼 ‘탑릴스’가 지난 4월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다.
숏폼의 인기 배경에는 시성비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짧은 시간을 활용해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숏폼 콘텐츠 이용이 꾸준히 늘어나는 모습이다. 실제 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콘텐츠를 ‘10초 건너뛰기’하거나 ‘2배속’으로 시청하는 일은 일상이다. 영상뿐 아니라 음악도 ‘배속 감상’이 유행하면서 숏폼 콘텐츠를 기반으로 기존 노래를 2배속한 ‘스페드 업(Spedup)’ 버전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워너뮤직코리아 등 대형 음원 유통사들이 소속 아티스트들의 스페드 업 버전을 공식 발매할 정도다. ‘속도’뿐 아니라 ‘압축’된 형태의 K팝 히트곡들이 많아지고 있는 점도 독특하다. 노래 길이가 2분 30초대로 짧아지는 것은 물론, 아예 전주가 생략되거나 인트로부터 율동이 바로 등장하는 노래들도 많아지고 있다.
콘텐츠를 압축해서 소비하는 흐름은 영화, 드라마의 ‘요약본’ 시청이 대세가 될 만큼 주류 트렌드가 되고 있다. 영상을 짧게 요약해주는 ‘지무비’나 ‘고몽’ 등 유튜버들은 구독자 수가 200만~3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도서 역시 요약본을 즐겨 보는 사람들이 늘면서 ‘간편한 방식’으로 책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독서 플랫폼 기업 ‘밀리의 서재’는 원작 도서를 15~20분 분량으로 각색해 채팅 형태로 제공하는 ‘챗북’ 서비스를 내놓았다.
청소, 빨래와 같은 집안일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 중 하나다. 쌓인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집안일을 할 시간도 부족한 경우가 더러 있다. 실제로 가사 서비스 이용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국내 가사 서비스 시장 규모는 약 12조원으로 2021년 대비 20% 이상 증가했다. 실제 청소·세탁 같은 가사노동을 지원하는 홈서비스 스타트업들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비대면 모바일 세탁 서비스 ‘런드리고’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의식주컴퍼니는 누적 세탁 건수가 900만건이 넘어서는 등 지난해에만 500억원의 매출을 냈다. 지난 2020년만 해도 매출 규모가 70억원에 그쳤지만, 매년 약 2배씩 성장했다.
각종 홈서비스 앱을 이용하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앱 시장 분석 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미소·청소연구소·대리주부·런드리고·세탁특공대·오늘의분리수거·해주세요 등 주요 홈서비스 앱을 설치한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는 지난해 4월 기준 350만 명에 달한다.
모바일 앱 기반의 가사도우미 중개 플랫폼 ‘미소’의 경우 지난해 4분기 90만명이 이용하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0% 성장했다. 미소 관계자는 “배달 앱 플랫폼이 배달 시장을 키운 것처럼 홈서비스 플랫폼이 이 시장을 키우고 있다”며 “2년 연속 흑자를 내는 등 성장이 안정되면서 오는 2026년 상장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가사도우미 중개 앱 ‘청소연구소’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생활연구소 역시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30% 늘었다. 생활 서비스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맞벌이 부부의 증가가 꼽힌다. 의식주컴퍼니 관계자는 “일하는 여성들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보다 ‘시성비(가격 대신 시간 중시)’를 따지는 경우가 많다”며 “세탁·건조·정리에만 주 평균 5시간이 필요한데, 돈을 지불하고 이 시간을 아끼는 것”이라고 했다.
가전업계에서도 이 시장에 주목하고 있다.
갈수록 집안일이나 식사 준비 같은 ‘비필수노동’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싶어 하는 수요가 커지면서 관련 제품에 대한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오늘의집’이 지난해 발표한 ‘2023 검색어 트렌드’를 살펴보면 시간을 아껴주는 식기세척기, 건조기, 로봇청소기, 에어드레서 등에 대한 검색량이 이전에 비해 급증했다고 한다. 특히 가전제품 경우 시성비는 물론 가성비까지 챙기려는 소비자들이 증가하면서 저렴한 가격대에 기능까지 두루 갖춘 중국산 프리미엄 가전제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빠른 배송, 초저가를 무기로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는 중국 알테쉬(알리, 테무, 쉬인)가 무서운 성장세와 함께 시성비와 가성비를 모두 잡아 판매가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시성비를 추구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일본에서 시간 대비 효율성, 즉 시성비를 따지는 젊은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소형 가전제품의 인기가 늘어나고 있다.
6일 코트라에 따르면 일본 Z세대(28세 이하) 중 70%가 ‘타이파(タイパ, Time Performance, 시간 대비 효율)’를 의식해 행동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코트라 오사카무역관은 ‘분초사회 일본, 시간을 단축해주는 소형 가전제품 열풍’ 보고서를 통해 일본 1위 전자상거래 기업 ‘라쿠텐’이 조사한 ‘신생활 2024 트렌드 예측’을 소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라쿠텐의 신생활 상품 유통 총액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약 2.4배 증가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전자상거래를 통한 가전제품 구매가 확대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주목할 만한 트렌드는 타이파 관련 상품 판매가 급증했다는 점이다. 라쿠텐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 응답자 약 70%가 ‘타이파를 의식해 행동한다’고 답했다. 이에 타이파 가전인 소형 식기세척기, 의류 건조기, 커피 메이커 등의 유통 총액이 4년 전 대비 2.3배나 늘어났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타이파 가전에는 파나소닉의 소형 식기세처기 ‘솔로타(SOLOTA)’, 행거형 의류 건조기 ‘드리미 플러스(Dreamy+)’ 등이 꼽히고 있다. 또한 별도의 조리 없이 흔들어 바로 먹는 ‘마루가메셰이크’와 같은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고, 일본에서 가장 많은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은 온라인으로 제품을 주문하면 30분 이내에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시성비 트렌드 확산은 유통기업들의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프라인 채널의 경우 시성비 면에서 온라인 채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프라인 기업들이 내건 전략이 바로 ‘경험 확대’다.
고객들에게 짧은 시간에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예가 ‘팝업스토어’다. 실제 팝업스토어 성지라 일컫는 ‘성수동’에서는 한 달 평균 100여 개 정도의 팝업스토어가 열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팝업스토어는 다양한 상품과 경험을 직접 체험하고, 특별한 상품까지 구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방문하는 시간 대비 매력적인 장소가 되는 셈이다. 편의점 CU가 홍대 인근에 ‘라면’만 판매하는 특화 매장 ‘라면 라이브러리’를 선보인 데 이어 최근 ‘스낵’ 특화 매장까지 선보이는 등 이색 매장을 확대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시간 관리’에 대한 수요가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핵심 지침으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이러한 트렌드에 부응하는 게 필수로 부상했다. 권정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시간은 한정돼 있다.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하려 한다. 유튜브를 보더라도 재미없으면 바로 다른 영상을 본다. 분초사회에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시간의 실패를 피하려고 시성비(시간 대비 가치)를 따진다”면서 “기꺼이 투자하고 무엇인가를 발굴하고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디깅(digging)을 한다.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매장 안에서의 소비자 행태를 경험이라고 봤다면, 요즘은 웨이팅부터 매장을 나선 이후까지가 경험이 될 수 있다. SNS에 인증샷을 올리거나, 댓글 작성까지 할 수 있도록 책임져주는 것이 시성비를 높인다”고 설명했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