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20분,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에 자리한 인구항. 포털사이트로 검색한 일출시간은 정확히 7시34분. 수평선 저 너머로 서서히 붉은 기운이 감돌 즈음 컬러풀한 줄무늬 플리스 추리닝에 검은색 롱패딩으로 무장한 너덧 명의 청년 무리가 인구해수욕장에 나타났다. 갈지자 걸음걸이로 보아하니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꼬박 하루 밤을 새운 모양이다.
“넌 왜 이런 것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이리로 온 거냐고. 이게 뭐냐. 낮에는 낮이라고 밤에는 밤이라고 새벽에는 또 새벽이라고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이잖아. 아, 저기 한 사람 있긴 있네.”
키가 훌쩍 큰 A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그 말에 어깨가 축 처진 B가 대꾸한다.
“나도 처음 와보니 알 수가 있나. 겨울에도 서핑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서핑로드도 북적이는 줄 알았지.”
모자를 눌러쓰고 종종걸음으로 쫓던 C와 D가 서로 번갈아가며 몰아세운다.
“여하튼 이건 니가 잘못한 거야. 니가 우리 셋보다 먼저 제대했잖냐. 먼저 와보든지 제대로 알아보든지 했어야지.”
“나도 동감. 그래도 날이 개어서 해돋이 볼 수 있는 게 다행이네.”
다시 A가 한마디한다.
“그래도 친구들 제대했다고 여행계획까지 세워서 여기 온 건 인정. 일출 보기 전에 감사부터 먼저!”
이번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덕담이다.
“맞아. 너밖에 없다. 그런데 너 제대할 땐 아무도 없었잖아? 아이고, 서운하네. 미안타.”
“친구끼리 미안한 거 음따. 나도 고맙다. 어, 저기 뜬다 떠!”
보아하니 제대여행을 제대로(?) 준비한 B가 조용히 한마디했다.
“음…. 독수리 4형제 새해에는 날아보자. 오늘 하루도 굿이다!”
누가 그랬던가. 겨울 양양의 서핑로드는 잠시 쉬어간다고. 독수리 4형제의 열정을 응원하며 조용히 ‘굿~!’
강원도 동해안의 겨울은 일출의 계절이다. 12월 마지막 날이면 해안선 어느 곳이나 드문드문 사람이 몰려든다. 낙산이나 경포대, 호미곶처럼 이름난 일출 명소에는 그야말로 인파가 넘친다. 봄, 여름, 가을, 초겨울까지 서퍼들로 밤이 낮처럼 밝았던 양양의 서핑로드는 어떨까. 인근 상인의 말을 빌리면 “세 계절은 벌고 겨울은 채비 갖춰 준비하는 시기”다. 그러니까 이름만으로 가슴 뛰게 하던 맛집, 멋집들 대부분이 휴가에 들어가거나 문을 열더라도 명목상 개점하는 형식이다. 서퍼들로 북적이던 해변은 휑하고 새벽까지 네온사인 훤하던 거리는 새로운 시즌을 겨냥한 신축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니까 별다른 이벤트나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은 상황.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 이들이 있다. 홀로 혹은 둘이 고즈넉한 겨울을 즐긴다. 특히 죽도를 중심으로 죽도해변과 인구해변이 맞닿은 인구항부터 휴휴암, 남애해수욕장, 갯마을해수욕장, 남애항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42코스는 산책 삼아 걷기 딱 좋은 길이다.
인구항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휴휴암(休休庵)은 바닷가에 자리한 암자다. 번뇌를 내려놓고 쉬고 또 쉬라는 의미의 이름 처럼 눈이 시릴 만큼 멋진 풍광이 일상의 고민을 잠시 잊게 만든다. 1997년 홍법스님이 창건한 이곳은 묘적전이란 법당 하나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1999년 바닷가에 누운 관세음보살 형상의 바위가 발견되며 기도처로 유명해졌다. 묘적전 아래 바닷가에는 활짝 핀 연꽃을 닮아 연화대라 불리는 너른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관세음보살 바위와 거북이 형상의 바위를 볼 수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언덕 위에 자리한 지혜관세음보살상도 휴휴암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어리석은 이들에게 지혜를 갖추게 해준다 해 엄마 손을 잡고 기도하는 학생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휴휴암에서 내려와 걷게 되는 남애해수욕장과 갯마을해수욕장은 그야말로 뻥 뚫린 해변이다. 수많은 서퍼들이 양양을 국내최고의 서핑 장소로 손꼽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너른 해변이다. 해변이 넓어 수심이 낮고 북동, 남동, 정동 방향의 파도 너울을 모두 받은 질 좋은 파도가 몰려 초보자도 쉽게 서핑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정설. 서핑로드의 중심은 죽도해변과 인구해변이지만 그 아래쪽으로 펼쳐진 남애와 갯마을해수욕장의 파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애3리해수욕장을 끼고 돌면 남애항이 눈에 들어온다. 산책의 마무리는 남애항 전망대다. 그리 높지 않은 전망대이지만 바다 한가운데에 들어온 듯 탁 트인 공간이 펼쳐진다.
물론 맛집 탐방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 중 하나. 겨울 동해안 의 별미는 ‘섭’과 ‘게’다. 특히 대게와 홍게는 자동차로 15분 거리의 주문진수산시장에서 제대로 맛볼 수 있다.
[글 · 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