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너무 큰 거 아냐? 항공모함만 한 유조선인데!”
남자가 오른손을 길게 뻗어 긴 손가락으로 배 한 척을 가리키자 여자가 살짝 실눈으로 째려본다.
“그런데 오빠. 저기 큰길 놔두고 왜 자꾸 골목길로 가는 건데.”
“어? 그게… 여긴… 골목길이 예쁘다잖아. 다들 골목으로 다니는데 뭘. 이상…해?”
속마음을 들킨 것 처럼 화들짝 놀란 눈으로 겨우 답변을 마친 남자가 이번엔 살짝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쭈, 자네 지금 어디에 뭘 올려놓은 건가.”
“어…어… 아니, 그게 쿨럭.”
말문이 막힌 남자, 짧게 기침 소리를 내자 여자의 호통이 이어졌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자네 머리에 마구니가 끼었구만.”
그때 막다른 골목길에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 한 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거, 그런 총각들 많이 와. 그냥 그러려니 애쓴다 생각허고 어여 내려가서 커피나 한잔해. 여 골목이 다 사람 사는 집들이거든. 다… 들려.”
(남녀 모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네….”
부산 남포역에서 걷기 시작한 부산 갈맷길 3-3 구간이 4-1 구간으로 이어지는 흰여울문화마을 골목길. 초겨울 바닷바람이 꽤 기세를 올렸지만 골목길 사이사이를 누비는 젊음을 앞지르기엔 역부족이다. 평일 오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오가는 이곳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인도어, 불어 등이 공존하는 이미 세계화된 구간이다. 부산이 뜨겁다.
오랜만에 부산이다. 서울보다 훨씬 남쪽에 있으니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하지 않을까란 생각은 그냥 바람일 뿐이다. 부산도 제주도 겨울엔 ‘춥다’. 낮은 체감온도의 8할은 바닷바람 때문인데, 바다와 인접해 있어 찬 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럼에도 올겨울 부산은 뜨겁다. 아니, 사계절 내내 그랬는지 올겨울만인지 딱히 확인할 순 없지만, 적어도 눈앞에 펼쳐진 부산역의 풍경은 평일 오후임에도 꽤 북적였다. 특히 해외 관광객이 많았는데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언어가 들려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의 맛집에도 한 무리의 외국인 손님들이 도열해 있다. 두어 시간 지난 점심시간이 무색할 만큼 줄이 길다. 갈맷길을 걷기 전 만두 한입 먹고 가려던 일정이 살짝 틀어졌다. 일단 지하철을 타고 내린 곳은 남포역. 영도다리 방향으로 이어진 출구로 나서니 갈맷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자, 지금부터 시작이다.
갈맷길은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다. 바닷가를 걷다보면 어느덧 산속이고, 산을 벗어나면 강이, 걷다 노곤하면 온천이 반겨주는 길이다. 총 9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이번에 걷게 된 코스는 3-2와 3-3, 4-1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그러니까 남포역에서 영도다리, 깡깡이 예술마을, 절영해안산책로, 흰여울문화마을, 남항대교, 거북섬, 부산송도해수욕장에 이르는 길이다. 첫 기착지는 영도대교. 남포동과 영도를 잇는이 다리는 영화 <친구>의 모티브가 되며 유명세를 탔다. 부산 최초의 연륙교이자 국내 최초의 도개식가동교로 1934년 준공 당시의 이름은 부산대교였는데, 1980년에 부산대교가 개통되며 영도대교가 됐다.
교통량 증가로 철거 후 재가설된 현재의 영도대교는 2013년에 재개통됐다. 지금도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다리가 들어 올려져 배가 지나간다. 영도대교는 다리 아래 조성된 유라리광장이나 남포역 앞 롯데몰 광복점 전망대에 오르면 색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특히 무료로 운영되는 롯데몰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영도대교를 건넌 후 오른쪽으로 다리를 끼고 돌면 깡깡이예술마을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바다가 마치 강처럼 흐르는 이 길은 누군가의 일상이자 생활터전인 곳이다. 뭍에선 배를 만들거나 수리하고 바다에선 이 배로 삶을 꾸려간다. 1970~1980년대 수리조선업의 메카였던 깡깡이예술마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항이 열린 후 일본 어선들이 이곳에서 어선을 수리하며 조선소나 선박수리 업체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는데, 1912년 일본인 다나카 와카지로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엔진이 얹힌 목선을 만드는 다나카 조선소를 세웠다. 광복 이후 이 조선소 자리는 사업자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는데 현재는 ‘우리조선’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골목길 곳곳은 배와 관련된 업을 하는 곳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조선소의 상징인 커다란 크레인이 웅장하다.
깡깡이예술마을을 벗어나 절영해안산책로에 이르면 멀리서도 풍경이 진귀하다. 절벽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집들도, 그 아래 조성된 산책로도 이채롭다. 현재 공사를 진행 중인 바닷가 산책로 구간에서 위쪽에 자리한 흰여울문화마을로 이동하면 전혀 색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생활하던 이곳은 2011년 낡은 가옥을 리모델링하며 독창적인 문화 예술마을이 됐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 곳곳에 공방과 갤러리, 카페 등이 자리했고, 찬란한 바다와 맞닿아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소문을 듣고 찾은 해외 관광객들이 많은데 살짝 과장하면 전망이 좋은 구간은 멈춰서야 할 만큼 사람이 많다.
남항대교를 건너 송도해수욕장에 이르면 배가 출출하다. 이곳은 물회가 좋다. 혼자서도 2만~3만원이면 소주 한잔까지 뚝딱 마무리할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은 어떠냐고? 국내 첫 공설 해수욕장인 이곳은 아담하고 포근하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데, 거북섬에 조성된 해안산책로나 송도 해상 케이블카에서 보는 일몰이 일품이다.
[안재형 기자]